1월에 읽은 시

소리에 관하여

(이 글은 월간 <심상> 1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때때로 시가 ‘노래’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듯하다. 운율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압축된 언어들로 감정을 드러내는 본질적인 속성 말이다. 그것은 ‘읽음’으로써 느껴지는 리듬이나 멜로디의 차원이 아니다. 오히려 ‘소리’라는 것 자체에 가까운 것 같다. 청각적인 자극이면서도 명확한 감각은 아닌, 차라리 소리라기보다 ‘소음’에 가까운, 어떤 광범위하면서도 사소한 파장이다. 지금은 꽤 달라진 것 같지만, 시는 노래와 같은 뿌리에서 나왔고 이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불행을 느낄 때 최대한 많은 사람을 탓하기
다지증의 발가락처럼 달랑거리는
다섯 아닌 여섯, 외롭지 않게

모르는 사람의 기념사진에 찍힌
나를 발견하듯이

오늘날의 태양은 상상의 동물이 되었다

아름다운 건 왜 죄다 남의 살이고 남의 피일까
강물에 돌을 던지고 물의 표정을 살핀다
내가 던진 돌을 잊어버린다

컵 안을 응시하면서 컵에 담긴 것을 마시기
너밖에 없어 같은 말을 믿는 짝눈이 되기

안색이 왜 그 모양이냐
바깥에서 형형색색이 묻는다
잠든 사람의 잠긴 눈꺼풀 속에서
눈동자가 바라보는 곳에서
내가 거의 완성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요

꼭 길이 아닌 곳으로만 가려 하는 개와 어린이가
수풀 속으로 뛰어든다
검정색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사라지면서 휘날리면서

나의 내부에 더 깊고 긴 팔이 나를 끌어안고
강바닥을 향해 가라앉는 돌
여섯 아닌 일곱, 외롭지 않게

유계영, 「언제 끝나는 돌림노래인 줄도 모르고」, 《현대문학》, 2016년 2월호

 

단지 ‘돌림노래’라는 제목에 이끌려 이 시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불행을 느낄 때 최대한 많은 사람을 탓하기”로 시작하는 이 시가 “나의 내부에 더 깊고 긴 팔이 나를 끌어안고 / 강바닥을 향해 가라앉는 돌”로 끝날 때, 나는 시인의 ‘침잠’(沈潛)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소외되는 ‘나’에 관해 이 시는 덤덤한 듯 보이지만 꽤 강렬하고 직접적으로 ‘노래’한다.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은 시인의 목소리와 하나의 돌이 강 속으로 가라앉는 고요하면서도 동시에 둔중한 소리이다. 불행도, 타자도, 심지어 주체인 ‘나’마저도 여럿인 게 좋다는 진술은 “외롭지 않게”가 이 시의 핵심임을 말해준다. 돌림노래가 외롭지 않은 것은 영원히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숫자를 더해 가면서 “언제 끝나는”지 모르는 채 계속될 이 노래는 언제나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게 될, “모르는 사람의 기념사진에 찍힌 / 나를 발견”하는 일과 같다.

 

겨울밤
복도에는 복도의 소리
빈방에서는 빈방의 소리가 나고
거울 속에는 거울 속의 소리가 난다

눈길에 장화를 신은 남자가
나무를 끌고 가는 소리
겨울
음악은 사운드지
네가 말했다
쓸모없는 소리
내가 말했지

너의 불안에도 소리가 있어
귀뚜라미 소리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
누가 오나 보다

강성은, 「사운드」, 《세계의 문학》, 2015년 겨울호

 

이 시는 “사운드”라는 제목과 시에서 계속해 언급되는 “소리” 때문에 선택한 것이 맞다. 이 시는 시에서 생성되는 이미지가 상(想)이 아니라 성(聲)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시에서는 운율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 차원으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겨울밤”이 어떤 소리들로 지각될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실제로 귀에 명확히 들려오는 것은 없지만 “복도의 소리”, “빈방의 소리”, “거울 속의 소리”는 ‘있다.’ 동시에 “음악은 사운드”라는 말과 “쓸모없는 소리”라는 말은 ‘같다.’ 그러니까 소리는 언제나 있고, 그래서 언제나 없는 것이다. 시인은 결국 “너의 불안에도 소리가 있어”라고 쓴다. 소리는 모든 것에 깃들어 있으니까.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 시인은 “귀뚜라미 소리 /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누군가가 오고 있다는, 너무나도 명확한 지각이다. 너무나도 생생한, 말 그대로 ‘소리’의 감각이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한 마지막 연이 인상적이다.

 

 

센,
세상이 당신의 이름일 때
나는 밥을 꽃처럼
꽃을 밥처럼 먹고
옥상에 날아든 새들을 보며
담배도 피웠다
인간의 일들이 어리석게 느껴질 때
인간다운 일을 했다
이별하는 사람들의 눈 속에는
그럼에도 아픔이 존재한다
아파서 우리는 어딘가로 흘렀다
밤의 몸은 젖지 않고
젖는 건 다만 흙과 나무와 구름이었다

센,
보랏빛 질병들이 저기 흘러가고 있어
노란 술을 삼키고
비틀거리며 흘러가고 있어
어리석고 아프게

긴 밤이면 우리는 카페에 앉아 잊지 못하는 것들을 차례로 꺼내놓았어
센,
우리는 바보의 어법으로
모든 것에 이름을 붙였지
심지어 잡을 수 없는 빛들에게조차
사랑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된 하루가 끝나면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젖지 않는
어리석고 아픈 사랑의 노래가
유유히 멀어지며
우리의 마음에 새겨졌다
그리고 또 나는 생각했지
너를 그리워하는 일
그 치욕으로 또 하나의 밤을 건넜다고

검게 변하지 않는 건 없었다
그래도 부드러운 흰밥을 지어서
너의 입에 한 숟갈씩 넣어주려고 했다
내 모든 밤이 그러했다

박시하, 「센 강」, 《문학과사회》, 2015년 겨울호

최근 읽은 시 중 가장 마음에 오래 남았다. 이 시는 그리움에 관한 것으로도, 혁명에 관한 것으로도 읽힌다. 어쨌든 ‘사랑’에 대한 것이다. “센”이라는 소리가 주는 어감은 아련하면서 아득하다. “센”은 단지 파리의 강 이름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온 한 시절을 의미하게 된다. 시인이 “센”이라고 몇 차례 부를 때마다 그 시간들, 이별과 아픔과 사랑과 그리움이 강물처럼 흘러간다. 몇 마디 덧붙이는 것은 다 사족이 될 것 같다. 그냥 한 번 더 읽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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