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희, 세상에 없는 나의 집(창비, 2015)

금희세상에없는나의집

 

 

써야 할 것을 쓰는 영리함

(이 글은 <자음과모음> 2016년 봄호에 실려 있습니다)

 

김금희라는 작가의 이름을 본 것은 계간 『창작과비평』 2014년 봄호에서였다. 한창 활발히 쓰고 있던 동명의 작가가 있었기에 이인(異人)임이 오히려 더 눈에 띄었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작가라는 사실에서 그랬겠지만, 「옥화」라는 작품이 보여준 그 생생한 재중 한인 디아스포라의 현실이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이후 한동안 지면에서 보지 못하다가 계간 『실천문학』 2015년 여름호에 역시나 인상적이었던 「봉인된 노래」를 ‘금희’라는 이름으로 발표했고, 놀랍게도 이 작품들은 단행본으로 가을에 바로 출간되었다. 조선족 작가의 전면적인 등장은 처음이거니와 단숨에 완성도 높은 소설집을 펴내는 놀라운 속도 덕분에 나는 이 작가의 이력을 다시 살피게 되었다.

1979년생이니 작가로선 젊은 편이지만, 2006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니 벌써 10여 년 활동한 중견급이라 할 수 있고, 이미 2013년에 중국에서 『슈뢰딩거의 상자』라는 첫 소설집을 냈다. 그러니 이 ‘발굴’은 사실 상당히 늦은 편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작가가 지금이라도 한국 문단에 안착할 수 있음이 다행스럽기도 하다. 자국어 문학의 빈곤함은 때때로 그 사회의 문학적 폐쇄성에 기인하는데, 금희라는 작가의 등장 자체가 새로운 한국문학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열어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그동안 디아스포라 문학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탈북 문인들이나 조선족 작가들, 이민자 작가 등 다채로운 작가군이 여러 갈래에서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문학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디아스포라적 ‘현실’ 그 자체와 이를 다시 한국어로 ‘서술’해야 하는 이중의 어려움을 늘 가지고 있었고, 그 어려움은 디아스포라 문학이 획일적인 방식으로 쓰여지게 되는 하나의 원인이 되어왔다. 또 대체로 작가 자신의 실제 경험이 서사적 상상력을 압도하는 수준이어서 문학적 형상화는 실패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그것이 디아스포라 문학의 1세대가 처해 있는 상황이었다면 금희와 같은 2세대 작가의 등장은 비로소 그들의 현실에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던 셈이었는데, 그 거리를 통해 오히려 디테일은 더 풍부해지고 서사는 과장되지 않으며 생생해졌다.

대부분의 디아스포라 작가가 그러하듯, 금희 역시 자신이 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쓸 수밖에 없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중국, 북한, 한국 등을 경유하는 국적이나 민족의 문제, 그러니까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복합적이고 혼란스러운 ‘아바타’, 즉 정체성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당면한 문제의식의 중요성과는 별개로 그에 따른 서사의 천편일률적 전개는 늘 경계해야 할 문제인데, 이 작가는 그런 우려를 영리하게 돌파해 나간다.

한국 문단에 미리 소개되었던 두 편의 작품은 앞서 언급한 대로 한국어를 공유하는 디아스포라의 현실을 그리고 있지만, 「월광무」 「쓰레기통 위의 쥐」 「돌도끼」 등은 본격적인 개발의 시대로 접어든 중국의 현실, 빠르게 변해가는 세태, 도농 간의 격차 등을 주로 다룬다. 이러한 서사적 확장을 통해 작가는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 정체성의 문제에만 심각하게 골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렇듯이 삶의 여러 국면에서 많은 고민과 갈등을 반복한다는 것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금희의 소설이 서사적 활기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런 부분인데 도시의 건물이나 기차의 풍경, 음식에 대한 묘사 등을 보면 이 작가의 일상에 대한 애정이 굉장하다는 것이 곧바로 느껴진다. 그것은 곧 중국의 작가만이 확보할 수 있는 놀라운 디테일일 텐데 아마도 책을 덮고 나면 중국의 장춘이라는 곳이 무척이나 궁금해질 것이다.

이 소설집에서는 중편 분량의 소설이 두 편 있는데, 그 작품들의 구성력과 서사적 완성도를 보건대 이 작가의 첫 장편을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월광무」에서 ‘유’의 그 머나먼 여정을 ‘마로얼’의 대문 앞에서 마무리하는 영리함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노마드」에서 서사를 엮어가는 솜씨가 대단했다. 「노마드」의 인상적인 대목 일부를 옮겨놓는다.

 

조선족을 그냥 조선족이라고 말한 것뿐인데도 박철이는 한국 사람의 입에서 ‘조선족’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가 가장 미묘하게 불쾌해졌다. 무의식간에 “중국 조선족인데, 일 잘해!”라고 칭찬하던 사장들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평범한 칭찬 앞에는 마치 ‘중국 조선족은 워낙 한국 사람과 달라서 일 잘 못하는데……’라는 전제가 이미 깔려 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에 박철이는 항상 그런 말들을 다만 말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205쪽)

 

일에 대한 입장 차이 외에 박철이가 난감했던 것은 단지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 나라 사람들한테 무의식간에 걸었던 근거 없이 높은 기대였다. 다만 다른 점은 영어가 많이 섞인 교양 있는 말투나 세련된 옷차림, 그리고 교통질서, 위생 습관, 음식 솜씨 등등 대체로 그런 자잘한 것들뿐이라고 어리석게 단정한 박철이는 마침내 그런 자잘한 것들이 모여 기어코 넘을 수 없는 큰 벽이 된다는 사실을 실감해야 했다.(206쪽)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