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음과모음, 2015년 겨울호

자음과모음은 이래저래 ‘구설수’에 올랐던 출판사이지만, 계간지만큼은 그 희한한 판형과 표지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꾸준히 밀고 나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특히 복도훈 편집위원의 힘이겠지만 SF에 대한 꾸준한 이 잡지의 관심은, 장르소설에 대한 최근의 ‘구설수’와 맞물려 꽤 의미 있어 보인다.

이번 호 뉴 아카이브에 실린 다르코 수빈의 논문과 그 해제가 나같은 SF 무지랭이에게 좋은 가르침이 되었다.

 

 

1. 최수철, 거절당한 죽음

지루한 90년대 소설을 읽는 기분을 느끼다가 하룻밤의 기억이 통째로 휘발되던 그 순간, 한수영의 이야기에 그대로 빨려 들었다.

흔하다면 흔한 운동권 이야기이지만, 이 작가가 요즘 관심을 갖는, 전쟁포로, 포로수용소의 사연과 맞물리면서, 그리고 그 시대의 디테일들에 속수무책으로 공감하면서 읽었다.

80년대 학번들이 이 이야기를 읽으면 어떤 기분일까, 싶다.

리얼과 모던이 혼합된, 올드하다면 올드한 소설이지만, 또 이렇게 쓸 수 있는 작가는 몇 되지 않아서 좋게 읽었다.

 

2. 김지현, 선희

근사한 문학적 SF를 쓰고 싶었을 것이다.

종말의 상상력을 동원하고, 거기에서 추악한 인간의 본성들을 끌어내며, 동시에 신선한 풍경들을 보여주는.

그러나 종말은 설명이 부족하고, ‘선희’라는 인물은 이해하기 어려우며, 시적인 묘사에 대한 강박만이 있었다.

끔찍한 태양광 아래에서 이제는 사라져 버린 ‘물’의 귀환에 관한 이야기로 읽히는데, 결말에 다다라서도 선희의 고통에 대해, 이 세계의 운명에 대해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3. 김사과, 카레가 있는 책상

읽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그래, 이거지.

2016년의 한국소설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망해간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

박민규의 <갑을고시원 체류기> 이후 내 지지부진했던 한국소설의 청년 공간은 드디어 김사과에 이르러서 한 단계 올라섰다.

당연히 이 계절의 베스트.

 

4. 김멜라, 호르몬을 춰줘요

‘부신성기증후군’이라는 증상을 가진 ‘나’의 이야기.

몸에 관한, 정체성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다.

성별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한 “여자지만, 남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없”는 열셋의 아이가 로또 같은 자신의 운명을 찢어 버리는 과감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좀 많다 싶은 인물들이 등장해 각자의 사연을 펼치는 바람에 산만한 감이 있다는 게 아쉽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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