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읽은 시

평범함에 대하여

(이 글을 월간 <심상> 3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시에 관한 가장 전통적인 상식 중 하나는 독자를 ‘낯설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상어가 아니라 문학어로서 이루어진 언어 예술 장르가 ‘시’임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시인은 언어를 잘 다듬어 새로운 세계로 독자를 초대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시의 언어가 평범하다고 해서 곧바로 그것이 나쁜 시는 아니다. 일상어를 완전히 배제한 시라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고, 평범한 언어들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어떤 시들은 아주 특별해질 수 있다. 여기 세 편의 시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평범함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서 소개하고자 한다.

 

 

다 식은 찌개를 데우고 있다

커튼이 그늘을 데려와 내 곁에 앉는다

 

혼자 하는 식사는 너무 고요하다

귀가 붙어 있는지 만져보아야 한다

찌개에 수저를 담그고

뭉크러진 양파의 호흡을 건진다

 

탁자 위에 개어 놓은 수건들은 침착하다

닦지 않은 그릇들이 개수대에 모여 있다

고개를 숙이면 무거운 생각들이

발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저녁

 

누구의 생일도 어떤 기념일도 아니지만

오븐에서 밀가루가 부풀고

손바닥 모양의 시계가 구워진다면

 

옥수수 같은 얼굴을 가진 아이와 식탁에 앉아

알갱이처럼 대화를 굴려보겠지

이제 막 여행에서 돌아온

가방의 안부를 식탁 위에 펼친다

 

안은 곧 밖이 될 거야

도착은 이미 흘러나왔다

나는 너의 미래가 될 거야

 

우리는 기울어진 위로에 걸터앉아

쓱쓱 맛있게 시간을 비벼먹는다

아이가 컵에 고인 세계를 엎지른다

나는 떠나기 좋게 식탁을 깨끗이 치운다

 

차가운 저녁을 가득 담은 채

빈 방은 커다란 배낭이 되고 있다

 

임지은, 「미래의 식탁」, 《현대시학》, 2015년 2월호

 

 

혼자 쓸쓸히 밥을 먹으면서 “미래의 식탁”을 상상해 보는 이 시는, 일견 단순하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몇몇 구절을 품고 있다. 우선 “혼자 하는 식사”를 그리는 시인의 솜씨를 보자. 무척이나 덤덤한 듯 보이지만, 적확한 표현들에 의해 그 광경은 절절해진다. “다 식은 찌개를 데우”는 일은 평범하지만 “커튼이 그늘을 데려와 내 곁에 앉는” 장면은 평범하지 않다. “혼자 하는 식사”가 “너무 고요하다”는 구절은 당연하지만 “귀가 붙어 있는지 만져보아야 한다”는 표현은 그 깊이를 충분히 더한다. “찌개에 수저를 담그고 / 뭉크러진 양파의 호흡을 건진다”는 구절에서 우리는 이 식사가 그저 ‘오래된 습관’ 같은 것임을 능숙하게 알아챌 수 있다. 시인은 여기에서 “고개를 숙이면 무거운 생각들이 / 발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저녁”이라며 “미래의 식탁”을 그려보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제 식탁은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 되고, 여행에서 돌아와 가방을 펼치는 곳이 되며, 안과 밖, 도착과 미래가 공존하는, 결국 ‘시간의 세계’가 된다. “시간을 비벼먹”고, “세계를 엎지”르면서 시인은 “빈 방”을 “커다란 배낭”으로 만든다. 여기에 다다르면 식탁은 여행자의 가방 속 도시락이 된다. 다시 우리는 식탁이 “여행에서 돌아온 / 가방의 안부”를 펼치는 곳이었음을 기억하자. 이처럼 시적 사유의 확장은 때때로 평범한 시공간을 매력적으로 바꾼다.

 

 

손가락들은 벌써 잊었고

 

그때 날씨와 보도블록에 떨어진 아이스크림과 흘러내리는 무지개와 뒤죽박죽 엉킨 채 걸어가던 팬티들과 바지보다 바지 속이 궁금해 고개를 수그리던 머리통과 머리통에서 떨어지던 기억과

 

그곳으로는 안 갈 겁니다

 

천성이죠 말보다 앞질러 가는 것

먼저 튀어나온 말이 뒤돌아 나를 볼까봐

재빨리 튀어나온 말을 앞지르는 거

불안하거든요

하나 걸러 돋아난 이빨처럼

이빨을 건너다니는 말라깽이처럼

절뚝이는 건지 주저앉는 건지

쿵, 쿵

오른쪽과 왼쪽을 한 번씩

(아니오, 나는 오른쪽과 왼쪽을 공평하게 사랑하는 건데요)

오른쪽에 오른발

왼쪽에 왼발

동시에는 안 돼요

 

시간은 지나가면서 유령이 되고 뭉개지거나 각인돼요

오래 생각하면 안 돼요

귀 막고 코 막고 가세요

입으로는 숨만 쉬세요

 

손가락들은 그곳으로 가려 하지 않아요

 

박연준, 「실언 트라우마」, 《현대문학》, 2015년 2월호

 

이 시에서 시인은 말이라는 것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다. 그가 가진 “실언 트라우마”는 늘 그를 “말보다 앞질러 가”게 한다. 말들이 흘러넘치는 인간들의 세계에서 말을 앞지르는 방법은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다. “오른쪽”과 “왼쪽”에 대한 시인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시인은 강박적으로 “한 번씩”, “공평하게”와 같은 어휘를 동원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는 “동시에는 안 돼요”라고 쓴다. 이것은 곧 말들이 점유하는 “시간”에 관해서도 시인이 철저하게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테다. 그는 “오래 생각하면 안 돼요 / 귀 막고 코 막고 가세요 / 입으로는 숨만 쉬세요”라고 쓰는데, 이는 말을 아예 차단하려는 태도일 것이다. 이제 이 시의 앞뒤에 등장하는 “손가락들”에 주목해 볼 때인 것 같다. 시인은 첫 구절에서 “손가락들은 벌써 잊었”다고 했지만 무엇을 잊었는지 그 다음 구절에 ‘쓰면서’ 역설적으로 “글”이라는 것이, 혹은 나아가 ‘시’라는 것이 말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음을 살짝 드러낸다. 손가락을 움직여 기록하는 언어는 “그곳”으로 결코 가지 않을 것임을 시인은 강조하는데, 두말할 나위 없이 “그곳”은 ‘침묵의 세계’일 것이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최후의 수단은 글임을, 그리고 그 글은 이 시의 두 번째 연이 잘 보여주듯, 평범한 일상의 “기억”들일 것임을 시인은 나지막이 보여준다.

 

 

온몸으로 물을 껴안고 쓸쓸한 천국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과

물고기와

몸이 없었으면 주어지지 않았을 고통과 숨과 검고 매운 물줄기와

내 등 뒤에 숨어 국가를 바라보는 딸과

문학적인 삶 뒤에 숨어 딸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나와

담배와 가족과

국가가 될 권리와

국민이어야 할 비루함이 나누는 전희의 폭력과

비참한 꿈만큼 비천한 언어들 하고만 싸우는

쓰기와 무감의 나날들과

온종일 내리는 빗줄기의 비린내와 눈 감으면

나뭇가지 휘어져 깨져버리는 유리창들과

폭우와, 신과 용서와 함께

밀려오는 눅눅한 방에 갇혀 있던 내 사춘기들 이젠 너희의 사춘기들

내가 써내려가는 이 비루한 사랑의 파지破紙들

신마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

하나의 얼굴

얼굴이 놓여 있던 자리에는 얼어붙은 물결들,

영영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김안, 「불가촉천민」, 《현대시학》, 2015년 1월호

 

 

김안의 최근 시편들은 꽤 흥미로운데, 그것은 우선 시의 제목들 거개가 “불가촉천민”이어서 그렇다. 2014년에 발표한 시집 『미제레레』의 에필로그 격이었던 시의 제목이 “불가촉천민”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이후 이 시인의 작업이 일관된 방향으로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작업은 이제 시인 자신의 처지를 가감 없이 돌아보는 순간에 도달해 있는 듯하다. “문학적인 삶 뒤에 숨어 딸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나”, “비참한 꿈만큼 비천한 언어들 하고만 싸우는 / 쓰기와 무감의 나날들”, “내가 써내려가는 이 비루한 사랑의 파지들” 등의 구절은 시인이 어떤 절망과 고통에 처해 있는지 충분히 알게 한다. 결국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가 아닌가 싶다. 개인을 자유롭게 두지 못하고, 끝내 “불가촉천민”으로 만들고야 마는 이 세계에서 시인은 가진 것은 “비천한 언어”뿐이다. 그는 비천하고 비루한, 즉 평범한 언어들로 ‘계속’ 쓴다. 그리고 그것만이 시인의 이름을 가진 자가 이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임을 끈질기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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