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읽은 시

전형적인 시

(이 글은 월간 <심상> 2016년 4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어떤 오래된 시인이 자신의 시를 읽는 영상을 보았다. 천천히, 단어 하나하나를 더듬으며 꾹꾹 읊어 내려가는 모습에서 시가 ‘낭독’의 장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우리는 자주 눈으로만 시를 읽는다. 묵독은 현대시를 받아들이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지만 때때로 많은 것을 놓친다. 소리 내어 발음할 때의 어휘 감각, 호흡 사이에서 느껴지는 여백, 무엇보다 목소리의 울림과 떨림들. 이런 것들은 대체로 오래된 시, 즉 전형적인 서정시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쉽게 지나치면 그저 평범해 보이는 몇몇 서정시들은 천천히 곱씹어 읽을 때 형언하기 어려운 충만함을 준다.

 

 

서리 내린 세계는 하얀 미사포를 쓴 채 성당을 나오는 여인 같네

 

나는 농담을 마른 갈잎 위에 적네, 바스락거리며 당신의 바닥에서 뒹굴도록

 

오늘 나는 빛에 예민하게 반짝이는 감정의 액세서리를 했네

 

나의 감정은 초조한 나뭇가지 끝에서 하늘의 절벽으로 쏟아지네

 

흥분한 분수처럼 위로 솟구치네

 

불안정한 기류 속을 날아가는 여객기 같네

 

털실로 짠 옷을 털면 나오는 먼지 같네

 

저 평화롭고 너그러운, 큰 생각에 잠긴 벌판 쪽으로 데려갈 수는 없나

 

나의 꿈은 불안하게 반짝이는 서리처럼 잠깐 섰다 사라지네

 

문태준, 「불안하게 반짝이는 서리처럼」, 《문학사상》, 2016년 3월호

 

 

시인은 서리가 내린 세계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일견 덤덤한 듯 보이지만 “나의 감정”과 “꿈”에 대한 조금은 격정적인 고민이 숨어 있다. “서리 내린 세계”는 “하얀 미사포를 쓴 채 성당을 나오는 여인”처럼 고요하고 차분하지만, 순간 “예민하게 반짝”여서, “불안”하다. 그러니 어찌 시인이 새벽녘 하얗게 내려앉은 서리를 보며 반짝였지만 이제 사라져버린 꿈에 관해, 주체할 수 없었던 감정에 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끝내 당신에게 건네지 못했던 농담, 날이 선 채로 흩어지는 대화, 불안하게 흔들리던 모습 같은 것들이 이 시 속에 숨어 있다. 시인은 “저 평화롭고 너그러운, 큰 생각에 잠긴 벌판 쪽으로” 향하고 싶어 하지만 당연히 그것은 불가능하다. 시인은 그저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일 뿐이다. 어쩌면 시인은 햇살에 녹아 사라지는 서리를 바라보며 안도했을지도 모르겠다.

 

 

저것은 연이다.

연실 없는 연

자기 몸을 태우는 불꽃을

연실로 만드는 저것은 연

불의 연이다.

 

저것은 바람이다.

제 몸을 태워

스스로 바람을 일으키는

제 몸을 덥혀 스스로 가벼워지는

저것은 소신공양이다.

 

저것은 별

지상에서 올라가는

마음이 올려보내는

마음의 별이다.

마음으로부터 가장 멀어질수록

마음이 환해지는 별이다.

 

저것은 소진이다.

자기 몸을 다 태워야

가장 높이 날아오르는

가장 높이 날아올라

자기 몸을 불살라버리는

저것은 가장 높은 자진이다.

승화다.

 

아침이슬이

유난히 차고 맑은 까닭이다.

 

이문재, 「풍등風燈」, 《시로여는세상》, 2016년 봄호

 

무수한 풍등이 하늘로 떠오르는 광경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이 시가 얼마나 ‘적확’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풍등은 “연”이고, “바람”이며, “소진”하는 “별”이다. 그 연은 “자기 몸을 태우는 불꽃을 / 연실로 만드는” “불의 연”이고, 그 바람 역시 “제 몸을 덥혀 스스로 가벼워지는” “소신공양”이다. 그러니까 풍등은 그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희생으로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이 풍등을 바라보며 그것을 하나의 “별”로 그려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별이야말로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가 아니던가. 게다가 그 별에는 지상의 “마음”이 담겨 있다. 저마다 띄우는 풍등에 웬만한 사연이야 없을까. 그것은 곧 “마음으로부터 가장 멀어질수록 / 마음이 환해지는 별”이 된다. 이윽고 시인은 “소진”, “자진”, “승화” 등의 어휘를 동원해 태우고 불살라 높아지는 풍등의 이미지를 고조시킨다. 그러면서 마지막 연을 “아침이슬이 유난히 차고 맑은 까닭이다”로 끝내는데, 풍등이 타올라서 아침이슬이 차고 맑다는 것인지, 아침이슬이 차고 맑기 때문에 풍등이 비로소 소진될 수 있다는 것인지 모호하다. 그 모호함 덕분에 이 시는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준다.

 

 

내 손보다 더 거친 여자 손들을 안다

 

할머니, 아니 계시고

어머니, 멀리 계시고

누나, 연락 없고

 

밥을 들고 부르던 손이었다

손은 원래 발이었구나

손으로 걷는 것이 삶이구나,

싶어지던 손이었다

 

알록달록 물들이고 싶던 손이었다

그려보려 했지만,

그려지지 않던

장갑 같은 손이었다

 

펜과 술잔을 오래 쥐어

부들부들 떠는 내 손,

곱고 병든 발을 꺼내

하늘의 빗물을 받아본다

먹어본다

 

이영광, 「네일숍 앞에서」, 《현대문학》, 2016년 3월호

 

 

이 단순한 시 앞에서 몇 번을 망설이다가 나는 끝내 멈춰 섰다. 아마 소리 내어 천천히 읽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네일숍”의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 속에 자신이 알고 있는 “여자 손들”이 떠오른다. 자기 손보다도 거칠었던 그 “발” 같았던 손.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의 손은 “손으로 걷는 것이 삶이구나, 싶어지던 손”이었고, 그 손들은 이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리고 지금 이 시인의 손. 그의 손은 “펜과 술잔”에 익숙하다. 그래서 곱지만 병들어 있다. 그 손으로 빗물을 받아 먹는 장면이 이 시의 마지막인데, 나는 여기에서 계속 주저했다. 손에 관한 앞선 구절들의 평범함을 뒤집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비가 내리는 네일숍 앞에서, 차마 그릴 수도 없는 “장갑 같은 손”을 생각하면서,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빗물을 받아 먹는 한 사내를 떠올렸을 때, 그 사내의 마음을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사내는 아마도 울고 있었을 것이라고, 멋대로 짐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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