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에 읽은 시

상실의 시대

(이 글은 월간 <심상> 7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은 한국에서 1989년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후 한국 문학의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엄청나게 읽히고,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후 하루키에 의해 다시 소설은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으로만 출간되어 오고 있지만,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주는 느낌은 여전히 강렬하다. 사실 “노르웨이의 숲” 역시 비틀즈의 노래에서 빌려온 것임을 생각하면 당시 하루키를 읽었던 우리 모두에게 더 정확한 제목은 “상실의 시대”일지 모른다. 그것은 ‘시대’라는 말에서 오는 현실의 긴박감과 청춘의 한 시절 같은 시간적 감각 때문일 수 있으나 핵심은 ‘상실’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은 그것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허전하고 쓸쓸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를 때, 혹은 잃어버림으로써 오히려 그 존재를 자각하게 되는 순간, ‘상실’은 매우 복합적인 양상을 띠기도 한다.

 

 

등을 잃었다

가리고 가려도 등이 없다

등을 잃었다는 사실을 숨길 수가 없다

 

등을 잃자 사람들은 등만 쳐다보았다

고개도 갸웃거리지 않고

엑스레이같이 적나라한 나안들

 

등에 힘을 줄 수가 없다

등짝을 잃었는데 과거를 잃은 것 같다

단짝을 잃은 것 같다

 

등 뒤의 놀

없는 등이 가려우면 등으로 등을 긁는다

없는 등을 토닥이는

텅 빈 자세

 

등을 잃은 게 나뿐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밤중에 등을 고르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등받이를 모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등도 없는데 어디다 쓰려고요?

쓸데가 없으니까 좋아 보여서요. 등을 기념할 수도 있고.

 

겨울비 온다

비의 실뿌리 하나하나

없는 등을 들쑤시고

없는 등으로 박히는 시린 소리

나를 추려낸다

 

가릴 수 없다

가리킬 수 없다

이제 가슴을 잃어요. 그게 있어 힘들었잖아요.

 

김성대, 「등을 잃었다」, 《대산문화》, 2016년 여름호

 

 

잃어버린 것은 등이다. 우리 몸의 뒷면, 그냥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고, 쉽사리 만져지지도 않는 그 등이다. 등이 없어졌다는 독특한 시적 상상력 아래 전개되는 이 시의 매 구절은 하나같이 매력적이다. “등을 잃었다는 사실을 숨길 수가 없다”는 구절은 속절없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 ‘등’이라는 신체의 속성을 정확히 가리킨다. 등은 없어도 없는 게 아닌,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등을 잃었다는 것은 원래 보이지 않던 것을 상실한 것이고, 따라서 역설적으로 그제야 “사람들은 등만 쳐다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행했던 일들, 등에 힘을 주거나 등을 긁거나 등을 토닥이거나 등을 받히거나 했던 일들이 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시인은 새삼스럽게 자각한다. 다만 이 시에서 아쉬운 것은 후반부이다. 등을 찾는 사람들의 행렬이 낯설게 그려지고 있던 순간, “겨울비” 속에서 “나를 추려”내는 장면은 다소 비약처럼 느껴지고, “이제 가슴을 잃어요. 그게 있어 힘들었잖아요.”로 끝나는 마지막 구절은 과장된 위무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설정한 상실의 대상, 즉 ‘등’은 근래에 보기 드문 신선한 이미지이긴 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숨길 수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인간의 신체에서 ‘등’은 타인에게 속수무책으로 노출되는 유일한 부위일지도 모르겠다.

 

 

정오 이전에는 하나의 이미지만을 생각하자

내가 죽는 이미지

 

물 한 컵을 통해

나는 깨닫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고기들이 어항 속에 살아가고 어항이 물고기들을 앎에서 보호하듯이

나를 이루고 있는 무리 중 하나가 파업하고 나는 체인처럼 드러눕는다

 

그러면 생각이 축구 하는 시간

앎을 얻은 물고기들이 죽어서 폐수 위로 둥둥 흘러가는 풍경

죽어서도 둥둥 가야할 곳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보며

 

정오의 땡볕을 거닐던 지난여름

 

영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하기를 그칠 수 없었던

인간의 잘못에 대해

다정하게 물어오시던 아줌마에게

햄버거 세트를 사드리곤 떠났지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라던 돌 같은 말

 

남의 밥값을 내주고서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던

예감과 성전과

내 주인이 누군지 물어오던 개 한 마리와

 

송승언, 「죽고 싶다는 타령」, 《문학사상》, 2016년 7월호

 

가장 흔한 상실의 대상 중 하나는 역시 ‘나’가 아닐까. 물론 ‘나’의 상실은 ‘죽음’과 매우 가까울 것이다. “정오 이전에는 하나의 이미지만을 생각하자 / 내가 죽는 이미지”라는 시작은 단순하면서도 꽤 의미심장하다. “정오 이전”의 의미 때문일 것이다. 대체로 죽음은 밤이라는 시간과 연결되지만 새삼 생각해보면 정오 이전, 즉 오전과도 멀지 않다. 정오 이전에야 잠을 청하든 오전 중에 잠에서 깨어나든 그 순간 “내가 죽는 이미지” 하나만을 생각하게 되는 시인에게 “어항 속” “물고기들”이 떠오르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럽다. 시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죽음에 관한 것이지만 또 동시에 상실의 역설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영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하기를 그칠 수 없었던 / 인간의 잘못”,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라던 돌 같은 말” 같은 것들이 그렇다. ‘잃어버렸다’가 아니라 ‘잃어버리고 싶다’라고 했을 때 묘하게 열리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그 틈새를 시인은 발견한다. 그러니까 “죽고 싶다는 타령”은 언제나 생(生)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 그것을 잘 보여주는데, 그것은 곧 정오 이후의 삶이다.

 

 

타이프 소리가 들린다. 타이프 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의자를 조금 당겨 고쳐 앉는다. 나는 고친다. 나는 고치가 아니다. 나는 떠오르는 대로 쓴다. 나는 쓰지 않는다. 나는 없다. 나는 쓸 때, 내가 아니다. 나는 반복을 통해 어떤 속도를 얻고자 한다. 그 속도는 망각으로 향한다. 나는 시를 쓴다. 나는 고집하지 않는다. 나는 고집한다. 노래가 흐른다. 문장은 흐르지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나의 생각을 생각한다. 나는 나를 생각할 수 없다. 생각하는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고개를 든다. 나는 점점 멍청해진다. 나는 포즈를 버림으로써 다시 또 다른 포즈가 된다. 나는 소리 지르지 않는다. 이 문장은 나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저 문장을 쓰는 순간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하나의 문장을 쓰고 난 직후에 나는 그 문장의 뜻을 잊을 때가 있다. 나는 늘 처음부터 다시 한다.

 

이준규, 「1」, 《한국문학》, 2016년 여름호

 

 

지금 가장 흥미로운 실험을 하고 있는 시인을 하나 꼽으라면 아마도 이준규가 아닐까. 그의 시를 읽으면 어쩌면 이 실험의 핵심이 상실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시인임을 잊고, 시라는 것을 잃고자 하는 어떤 시도. 그러나 결국 그럴 수 없다는 역설적 깨달음. 그리고 그것들의 끊임없는 반복. 거칠고 범박하게 말하자면 이런 것이 이준규의 세계가 아닐까. 타이핑 소리가 들리는, 시를 쓰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시작하는 이 시는 끊임없는 고쳐 쓰기이자 자유 연상이다. 동시에 그것은 퇴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에서 고쳐 쓰기가 아니며, 연상은 앞뒤로 긴밀하게 이어져 있어 자유롭다고 하기는 어려울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준규의 방식은 뭐라고 규정하는 순간 말할 수 없이 촌스러워지는 ‘어떤 것’이다. 그저 “나는 시를 쓴다.”는 구절처럼 우리는 시를 읽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읽음은 이준규의 쓺처럼 계속해서 반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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