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에 읽은 시

지구를 떠나서 – 하재연의 시

(이 글은 월간 <심상> 8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예술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은 ‘뻔하다’는 것, 익숙함이다. 새로움에 대한 욕망과 갈급함은 모든 시인에게 있겠지만 결코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늘 그들은 ‘낯설게 하기’라는 망령과 싸워야 한다. 잘 알려져 있듯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고, 조금씩의 변화, 아주 약간의 차이가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예술의 진보를 형성한다. 시인들은 새로움을 위해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언어, 새로운 감각,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언제나 구상한다. 이번 계절에 하재연의 시들은 새로운 공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곳은 ‘우주’이기도 하고, ‘프로그램’이기도 하며, ‘무(無)공간’이기도 하다.

 

 

 

영원히 종료되지 않을 여행이라는

프로그램을 너는 시작하게 된 것일까

아무 이유가 없이

 

네게 입력된 커맨드가 치명적으로만

너를 전진시킬 때

 

가장 먼 곳에서 전해오는

모래바람의 정신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온몸이 먼지에 뒤덮여야 한다는 것

 

어떤 세계의 시작도 먼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너의 눈동자로 증명하는 것이다

 

망가진 시간의 골짜기에 굴러떨어지는 스피릿

 

펼쳐져서는 안 되는 장면에

펼쳐지고 만 인공위성의 날개처럼

 

슬픔이 무한으로부터 전달되어온다.

 

무한과 무한의 사이에 찍힌 하나의 점과 같은

우리에게

 

하재연, 「스피릿과 오퍼튜니티」, 《문예중앙》, 2016년 여름호

 

우선 “스피릿과 오퍼튜니티”가 화성을 탐사하고 있는 쌍둥이 로봇이라는 것을 언급해 두지 않을 수 없겠다. 그렇게 보면 이 시는 화성에서 그 세계의 모습을 지구로 전송해오는 두 로봇에 관한 것이 된다. 그렇게 읽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읽으면 이 시는 좀 단순해지는 면이 있다. ‘너’를 그야말로 각자의 ‘너’로 읽어보는 건 어떨까. “영원히 종료되지 않을 여행이라는 /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된” ‘너’는 명령어에 따르는 로봇과도 같다. “가장 먼 곳에서 전해오는 / 모래바람의 정신을 기록”하는 ‘너’는 “어떤 세계의 시작도 먼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 너의 눈동자로 증명”한다. 태초의 먼 곳으로, 혹은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떠나버린 ‘너’는 “무한으로부터” “슬픔”을 “전달”한다. 우리가 있는 공간은 “무한”하지만 ‘너’와 우리의 거리는 유한하고,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는 슬프다. 완전히 가상의 공간, 즉 그것이 설령 프로그램일지라도 ‘너’가 신호를 보내온다면 그곳은 ‘스피릿’과 ‘오퍼튜니티’가 있는 곳이지 않을까.

 

 

 

눈동자 없는 노루의 눈물 한 방울과

 

불가리아 갈란타민 아세틴콜린 알츠하이머 알칼로이드

녹는점 130도

무색의 주상결정과 같은

 

물질이 된 너의 웃음을 발견한 순간

 

아름다운 복잡한 기술로

제작되지 않은 글자들로만 쓰인 책의 한 페이지 귀퉁이가

접혔다

 

분화구 속으로

4월의 눈송이들이 끝없이 떨어진다

 

너의 무색 웃음이 내 손가락들 사이로 빠져나간다

 

너는 결정되지 않는

수식

 

풀 수 없는 순열로만

아름다워졌다

 

하재연, 「스노드롭」, 《문예중앙》, 2016년 여름호

 

 

여전히 이 시인에게는 ‘너’이다. 역시 이 ‘너’를 “스노드롭(snowdrop)”, 즉 갈란투스(Galanthus) 혹은 설강화(雪降花)로 불리는 꽃으로 읽어내면 정확한 독법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다시 우리는 각자의 ‘너’를 소환해 보기로 하자. 시적 주체가 발견하는 것은 “너의 웃음”이다. 그 웃음은 “눈동자 없는 노루의 눈물 한 방울”이나 “무색의 주상결정”과 같은 “물질”이다. 그 꽃피움, 웃음은 “아름다운 복잡한 기술로 / 제작되지 않은 글자들로만 쓰인 책의 한 페이지 귀퉁이가 / 접혔다”는 구절이 말해주듯 형언할 수 없는 최초의 아름다움이다. 이 무공간의 공간에서 “너의 웃음”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이미 이 시에서 “너의 웃음”은 물질이라고 했으나 그것들은 “손가락들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웃음은 아름답다. 다시 말해 “너는 결정되지 않는 / 수식”이며 “풀 수 없는 순열”일 때, 비로소 아름답다. 그 신비로움은 이 시의 공간이 무(無)라는 것에서 발생한다. 이 시에서 공간 감각을 가져다주는 것은 “불가리아”나 “분화구” 등의 어휘가 전부인데, 구체적인 시적 공간을 지칭하는 방식으로 쓰이지는 않아서 오히려 ‘무공간’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결국 무공간이라는 것은 공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모호하고, 신비롭게 만들어 그것을 섣불리 상상할 수 없게 만들어낸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랬을 때, 시는 아주 조금은 새로워진다.

 

 

 

암뿌우르에 봉투를 씌워서 그 감소된 빛은 어디로 갔는가

– 이상, 「지도의 암실」

 

지구에서 지낸 밤이 깊어갈수록

나는 점점 더 부족해진다.

 

더 많은 나의 숨이 필요하다.

 

뒤집어져 불길로 타오르는 것

망가진 고요를 통해서만

나는 너를 조금 이해한다.

 

오래전의 미래를 향해 침식되는 대기

 

두 개의 영혼 사이에서 부서지는 인간의 마음

 

인간의 죽음과는 연관하지 않고

아름다운

푸른 불꽃의 석양 쪽으로 가산되는

꿈의 시간들

 

이제 나는 화성의 고리가 되어가고

 

발생하는

희미한

 

하재연, 「화성의 공전」, 《문예중앙》, 2016년 여름호

 

 

우선 이 시인이 ‘이상(李箱)’을 인용하는 것은 그리 어색하지 않은 일이라는 점을 밝혀 두고 싶다. 이 시인은 시인임과 동시에 문학연구자로서, 특히 근대 초기 시적 언어의 형성과 변이에 큰 관심을 두었고, 이상은 대표적인 연구 대상이었기 때문이다(하재연, 『근대시의 모험과 움직이는 조선어』, 소명출판, 2012). 따라서 “암뿌우르에 봉투를 씌워서 그 감소된 빛은 어디로 갔는가”라고 인용된 구절을 그저 시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만 관여하는 것으로 읽지는 않는 것이 좋겠다. 시인은 그 빛이 감소되었다면, 그래서 어딘가로 사라졌다면 그곳이 어디일지 집요하게 추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시에서 우리는 ‘나’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다. “지구에서 지낸 밤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부족”해지는, 끝내 “화성의 고리가 되어가”는 어떤 것. 그러나 너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시적 주체인 ‘나’, 빛으로서의 ‘나’, 움직임 그러니까 공전으로서의 ‘나’, 인간적인 어떤 것으로서의 ‘나’ 등 무수히 많은 ‘나’를 상정할 수 있고, 또 그 모든 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핵심은 “지구”나 “인간”으로 대표되는 이 세계의 구성들, “숨”, “불길”, “침식”, “대기”, “불꽃”, “석양” 같은 것들을 벗어나 “화성의 고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발생하는 / 희미한 / 빛”은 이상이 언급한 “감소된 빛”과 이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은 섣부르게 이를 인간적인, 지구적인 것으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여전히 “나는 너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뿐이고, “인간의 마음”은 “두 개의 영혼 사이에서 부서”진다. 시인은 그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도, 거기에도 희미한 빛이 있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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