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 읽은 시

어쩌면 영원

(이 글은 월간 <심상> 9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영원(永遠)이라는 명사는 “어떤 상태가 끝없이 이어짐 또는 시간을 초월하여 변하지 아니함”의 의미를 가진다고, 국어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무한이 공간의 문제라면 영원은 시간의 문제이고, 시간은 인간이 가진 모든 고민의 근원이다. 그런데 어떤 상태가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은, 또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시간의 문제와 관계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늘 그대로인 것 앞에서 시간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인간이어서 우리의 시간 앞에서 영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어떤 형태로든 변하거니와 인식의 순간이 이미 시간성을 담보하고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다. 그렇지만 영원의 상태를 상상해보는 것, 영원에 가까운 어떤 것을 상정해 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데, 몇몇 시들이 그러한 시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잘못 들어선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

길가에 늘어선 사과나무를 보다 절벽으로 추락해 죽은 지 보름 만에 발견된 친구와 산숲에 들어갔다 한 달 뒤에 시신으로 돌아온 친구와 횡단보도를 건너다 운명한 친구가 한꺼번에 떠올랐고 사과나무에 매달린 사과들은 왜 여기 열렸는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어서

용서를 구할 일은 없었지만 용서를 구하고 싶었지 평지를 달리며 기우는 석양을 보며 지금까지만 치자면 영원을 사는 중이니까 모든 게 마지막인 거지 간밤의 주정도 아침에 먹은 국과 밥 한 그릇도 좀 전의 주유도 카드 계산도 또 보자는 말도 건강하라는 말도 순산하셨다는 말도 명복을 빈다는 말도 마지막이었던 거지

마지막 이후에도 마지막이 끝없이 이어지는 나날 영원만 영원한 것은 아니라고 우겨보는 거지 이 길 끝에 도착지가 있을까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고개 멀어지는 구름 멀어지는 달 멀어지는 사람 길을 나설 때부터 잘못 들어선 거였지 영원의 끝은 언제쯤일까

장례식장이 보였고 몇 번은 와본 느낌인데 인간에겐 죽음만이 영원하다고 말해 주던 인간이 처음 가는 길을 떠날 채비를 하는 곳 영문을 알 수 없었지 받을 수 없는 용서를 받아야 했지

좀처럼 가까이 갈 수 없었지 영원 바깥으로는

 

윤의섭, 「영원 다양성」, 《시와 사상》, 2016년 가을호

 

 

이 시인은 우리가 흔히 영원이라고 쉽게 말해오던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시인에게 영원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잘못 들어선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이라는 첫 구절이 암시하듯 장례식장을 찾는 시적 화자의 발걸음에는 여러 ‘죽음’과 ‘마지막’이 함께 한다. 속절없는 친구들의 죽음을 떠올리며 그는 “용서를 구할 일은 없었지만 용서를 구하고 싶었지”라고 읊조린다. 그에게 영원은 바로 “지금”까지의 삶 자체이기도 하고, “마지막 이후에도 마지막이 끝없이 이어지는 나날”이기도 하다. 요컨대 그는 “영원을 사는 중”인데, 바꿔 말하면 산다는 것이 곧 영원 속에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까 죽음이 오기 전까지 우리 삶은 영원 ‘안’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우리는 늘 삶은 유한하고 죽음 이후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시인에 따르면 오히려 그 반대로, 살아있는 지금이 영원하다. 그리고 죽음은 어쩌면 “인간에겐 죽음만이 영원하다고 말해 주던 인간이 처음 가는 길을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일지 모른다고 시인은 말한다.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을 “영원만 영원한 것은 아니라고 우겨보는” 시인의 태도는 “좀처럼 가까이 갈 수 없었지 영원 바깥으로는”라는 마지막 구절에 다다른다. 즉 우리가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영원이 아니라 영원 “바깥”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이미 영원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일 텐데, 이런 시인의 사유는 꽤 곱씹어볼 여지가 있어 보인다.

 

 

한낮에 나는 빛이 아닌 적 없어

 

내가 나를 펼치면 내 그림자는 새 떼일 테니

 

영혼을 뼈 가까이에 두면 등 뒤에 있는 미래가

 

나의 불가능의 가능의 불가능들이

 

여름 깃과 겨울 깃, 착실한 빛과 사라진 빛이 아니었던 것

 

두 가지 중에 영원한 하나의 결정을 하고

 

꿈의 색인처럼 첫과 끝을 지우는 먼 배들의 부교

 

난반사 없이 검은 비누를 문질러 얼굴을 지우고 흰

 

소년으로서 숲속에 살 듯, 잃어버려도 흐르는 말들을 잃고

 

작게 작게 소멸해서 죽은 자세로 잊지 않는 것

 

다시, 볼륨이 되고 싶어서 내가 아닌 것을 만나러 가듯

 

장식 깃을 부러뜨리고 온몸을 열면 내 것은 전부 등 뒤에 있어

 

어깨까지 날개를 걷어 올리고 세계와 싸우는 나의 재긍정

 

현실태, 충분한 끝으로 넓이를 놓치며 등 뒤에서 미래를 발견한 기억으로부터

 

흰 것의 흰, 흰 것의 흰 국수를 펼치고 국수를 다 놓치듯 옳지 않은 아름다움이

 

 

자, 이제 내가 아닌 빛을 말할 시간

 

안미린, 「백공작白孔雀」, 《현대문학》, 2016년 9월호

 

 

제목이 잘 알려주듯 이 시는 “백공작(白孔雀)”, 즉 흰색 공작새를 다루고 있다. 아마도 시인은 백공작이 날개깃을 활짝 펼친 광경을 무척 인상 깊게 보았고, 그 모습에서 ‘영원’을 발견한 것 같다. 이 시에서 영원이 등장하는 구절은 “두 가지 중에 영원한 하나의 결정을 하고”라는 행이 전부이지만 백공작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영원에 가까운 어떤 것을 상상하고 있음을 군데군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이 시의 핵심어는 “빛”일 텐데, “한낮에 나는 빛이 아닌 적 없어”라는 첫 구절이 가리키듯 백공작의 흰 자태는 빛을 받아 눈부시다. 이후로 이어지는 구절들은 백공작이 날개깃을 펼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인데 “내가 나를 펼치면 내 그림자는 새 떼”, “꿈의 색인처럼 첫과 끝을 지우는 먼 배들의 부교” 등의 표현이 신선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백공작이 날개깃을 열어 보이는 장면을 ‘나’의 “가능성”, “세계”와의 “싸움” 등과 연결시킨 것이 독특하다. 그것은 다시 “온몸을 열면 내 것은 전부 등 뒤에” 있다는 인식과 이어지는데,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놓치고, 잃고, 사라진다. 영원히 자신의 활짝 펼쳐진 날개깃을 볼 수 없는 백공작의 모습을 시인은 “흰 것의 흰, 흰 것의 흰 국수를 펼치고 국수를 다 놓치듯 옳지 않은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니 백공작은 영원히 “내가 아닌 빛을 말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 시간이면 모든 그림자들이 뚜벅뚜벅 동쪽으로 걸어가 한꺼번에 떨어져 죽습니다. 아름다운 광경이죠. 그것을 보고 있으면, 우리 몸에서 끝없이 천사들이 달려나와 지상의 빛 아래서 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 나의 시선과 나의 목소리와 거리의 쇼윈도에도 끝없이 나타나는 그들 말입니다.

오랫동안 생각했죠. 깜빡일 때마다 눈에서 잘려나간 시선이 바람에 돌돌 말리며 풍경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거나, 검은 소떼를 끌고 돌아오는 내 그림자를 맞이하는 밤의 창가에서…… 목소리는 또 어떻구요. 투명한 나뭇잎처럼 바스라져 흩날리는 목소리에도 내세가 있을까? 아, 메아리라면, 그들에게도 구원이 있겠지요.

 

갑자기 쇼윈도에 불이 들어올 때,

 

마네킹은 꼭 언젠가 살아 있었을 것만 같습니다. 아니, 끝없이 살해되고 있는지도 모르죠. 밤새 사랑했지만,

 

아침이 오고 또 하루가 저뭅니다. 이 시간이면 서서히 어두워지다가 갑자기 환해지는 거리에서 태어났던 것들이 태어나고 죽었던 것들이 죽는 것을 보곤 합니다. 그러나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한꺼번에 깜깜해지는 거리처럼, 사랑하는 순간에 태어난 천사에게만 윤회가 허락될 리는 없으니까요.

 

신용목, 「지나가나, 지나가지 않는」, 《창작과비평》, 2016년 가을호

 

 

시를 읽어가면서 적재적소에 대체 불가능한 시어들이 쓰여 있다고 자주 느낀다면 그 시는 십중팔구 좋은 시일 텐데, 이 시가 딱 그렇다. 해질녘의 풍경과 아침이 밝아오는 순간의 거리 사이를 덤덤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시는 어떤 어휘도 허투루 쓰이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이 시간이면 모든 그림자들이 뚜벅뚜벅 동쪽으로 걸어가 한꺼번에 떨어져 죽습니다”라는 첫 구절은 단번에 시적 정조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고, “그것을 보고 있으면, 우리 몸에서 끝없이 천사들이 달려나와 지상의 빛 아래서 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로 이어지는 구절은 우리와 천사, 빛과 살해라는 이 시의 핵심을 그대로 품고 있다. 그리고 이 시어들은 마지막까지 시의 중심을 형성하면서 그것들이 단순하게 동원된 어휘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결국 이 시가 묻고 있는 것은 밤과 낮 혹은 일출과 일몰이 반복 되는 인간의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구원은 가능한가’일 것이다. 시인에 따르면 “나의 시선과 나의 목소리와 거리의 쇼윈도”에 끝없이 “천사”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천사들은 지상의 빛과 불 아래에서 끝없이 “살해”된다. 즉 ‘나’를 구성하는 것, ‘나’가 바라보는 것, ‘나’가 내보이는 것,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파편화되어 있고, 이곳은 “태어났던 것들이 태어나고 죽었던 것들이 죽는” 세계인 것이다. 그 세계에서 시인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이 영원은 아닐까.

 

 

 

 

 

1 Response

  1. 장히나

    정말 애독자입니다.그런데 9월이후로는 글이 오지않네요 ㅠ 에러인건지 글을안쓰신게맞는지 궁급하네요..트위터말고는 어디서 찾아읽을수있나요?블로그나 카페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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