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을 잊은 당신에게

(이 글은 격월간 <릿터> 1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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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의 독자로 당신을 끌어들이기에 지금보다 좋은 때가 있을까. 늘 열심히 챙겨 읽는 매니아들 말고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면 그제야 들여다보는, 이야기의 문화 생활은 영화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한국 소설은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당신 말이다. 당신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최근에 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읽었을까? 만약 읽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냥 솔직히 말하기로 하자. 그 책은 당신이 읽기에 조금 어렵다. 재미도 없었을 테다. 오해는 말았으면 좋겠다. 이건 당신의 지적 수준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다만 한국어로 씌어져 있고, 한국의 작가가, 한국의 이야기를 할 테니 못 읽을 이유가 없다고 당연히 생각했다면 오산이었을 것이다. 모든 예술 장르가 그러하듯 진입 장벽이라는 것이 있고, 향유의 단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행인 건 한국 소설은 우리에게 꽤 익숙한 편이어서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금방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한국 소설은 ‘단편’이 중심임을 기억해 두면 좋겠다. 당신이 교과서에서 보던 그런 소설들 맞다. ‘소설’이라고 했을 때 당신이 떠올릴 법한 두툼하고 방대한 이야기는 한국 소설에는 좀 드물다. 그렇지만 인생의 어떤 한순간을 아름답게 혹은 정반대에서 끔찍하게 건져 올리는 이야기 꾸러미는 꽤 있다. 소설집이라고 불리는 책 말이다. 그런데 당신의 서가에 한국 소설이 꽂혀 있다면 그것이 소설집일 가능성은 낮을 것 같다. 김훈의 『칼의 노래』나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같은 책, 혹시 좀 더 있다면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정도가 있지 않을까? 아마 당신의 한국 소설 리스트는 거기에서 멈췄을지 모른다. 그래서 장편소설 하나, 소설집 하나, 해서 두 권을 골랐다. 자, 이제 한번 업데이트를 해 봐도 좋지 않을까.

 

한국의 장편소설은 쓸데없이 어렵고 무게만 잡는다고 여기는 당신에게 딱히 할 말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정유정이 등장하기 전까지.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해 보자. 재미있는 한국 소설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열심히’ 쓴 소설은 드물었다. 열심히 썼으면 재미가 없었고, 재미가 있으면 성의가 없었다. 정유정은 좀 달랐는데, 진짜 열심히 썼고 아주 재밌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체질이 단편이 아니라 장편임을 정확히 알고, 충분한 자료 조사와 취재, 끊임없는 퇴고와 재구성으로 묵직한 이야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유정의 이야기가 완벽한 것은 물론 아니다. 때때로 좀 과도하다는 느낌을 주고, 익숙한 관계 설정이나 장르적 클리셰도 군데군데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유정은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이야기를 밀고 나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지금 한국의 그 어떤 작가도 정유정만큼 파워풀하지는 않은데, 그것은 정유정 특유의 ‘문장의 힘’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종의 기원』을 읽으면 흔히들 하는 말로 아예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읽다가 그만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그만둘 이유는 다분하다. 사건의 범인은 진작에 드러나고 진실은 대개 예상했던 방면으로 밝혀져 나가기 때문이다. 인간의 근본적 심성으로서의 악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탐구는 ‘한유진’이라는 인물을 낳았는데, 『7년의 밤』이나 『28』에서와는 달리 주인공의 행로와 내면에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긴박함이나 긴장감은 전작들에 비해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그렇지만 『종의 기원』은 그 어떤 작품보다 깊이 몰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데, 이야기가 온전히 ‘문장’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엄마의 “일기인지 메모인지 모를” 노트를 떠올리면 좋겠다. 이를테면 “유진의 심장을 뛰게 하려면 특별한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일지 몰라 겁이 난다”(250쪽)와 같은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마주하면 이 이야기에서 빠져나올 도리가 없다. 정유정은 소설 전체에서 내내 단문과 장문을 적절히 배치해 호흡과 리듬을 조절하고, 때때로 주어와 목적어를 삭제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특히 적재적소에 부사어를 사용하고 접속사의 활용을 최소화함으로써 의미가 단순하고 명확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니까 의외로 정유정 이야기의 힘은 소재 자체나 인물, 혹은 주제 의식이나 서사적 구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고쳐 쓴 문장에서 온다. 그렇게 고쳐 쓴 문장이 힘이 잔뜩 들어간 모습으로 독자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한 번에 썼다는 듯 굳이 뒤돌아보지 않게 만드는 그 능력이 정유정의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맥락 없이, 굳이 이걸 꼭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은데, 정유정 소설의 팔 할은 “프롤로그”가 아닐까. 언제나 짜릿하다.

 

이제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로 넘어가 보자. 앞서 잠깐 언급했듯 한국 소설은 단편 중심이고, 그것은 문예지가 제공하는 지면과 단편 소설에 부여되는 스포트라이트에 기반한다. 권여선은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주목을 받아 왔고, 이 소설집은 한국 단편소설의 어느 정점을 보여 준다고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다. 나는 문예지에 권여선의 작품이 실릴 때마다 따라 읽어 왔는데, 단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비단 나뿐 만은 아니었는데, 권여선을 함께 따라 읽은 사람들이 베스트로 꼽는 작품이 다 달랐다는 점은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겠다.

흔히 표제작을 선정해 소설집의 제목으로 내세우는 관행은 요즘 상당히 희석되었고, 이 소설집 역시 “안녕 주정뱅이”라는 제목을 따로 붙여 놓았다. 공교롭다고 해야 할지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이 소설집의 작품들은 ‘술’이라는 소재를 깊이 공유한다. 작가의 말에서 직접 밝혀 놓았듯이 권여선은 술과 떨어질 수 없는 삶을 살았는데, 각 작품들이 보여 주는 술과 사람에 관한 디테일이 과연 그러해 보인다. 마치 홍상수의 영화를 보듯 술자리에 관한 한 권여선은 거침없고 현란하다. 진솔한 대화와 실없는 농담, 숨어 있던 애정과 의미 없는 싸움 같은 것들을 능숙하게 묘사하는데, 특정 작품을 언급할 필요 없이 이 소설집의 모든 작품이 그렇다(그래도 하나 꼽자면 역시 「삼인행」이지 싶다).

또 하나, 권여선의 최근 소설들은 삶의 골이 깊은 사람을 주로 다루는데, 당신이 아주 젊은 독자라고 하더라도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에 절절히 공감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장담하건대 「봄밤」을 읽고 무덤덤할 수는 없으리라. 이 작품이 발표될 당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봄’과 ‘밤’을 앓았는지, ‘수환’과 ‘영경’의 이야기에 아파했는지, 여전히 생생하다. 몇 번을 읽어도 「봄밤」은 슬프고, 아름답다.

「봄밤」으로 시작해 「층」으로 끝나는 이 소설집을 관통하면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단어가 ‘사랑’이다. 어쩌면, 아니 당연히 권여선에게는 술이 아니라 사랑이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안녕 주정뱅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술에 취한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누군가’의 다정한 목소리가 아닐까. 그러니까 혹시 권여선은 돌고 돌아 2008년에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사랑을 믿다」의 자리로 다시 와 있는 건 아닐까. 「카메라」가 보여주는 비극적 “필연”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 나에게 베스트는 「층」이다. ‘인태’와 ‘예연’의 엇갈림, 그리고 여전히 계속되는 이어짐은 “층”이라는 제목과 밀착한다. 신형철이 해설에서 지적했듯 이 이야기는 “문화적 계급 격차가 큰 남녀의 연애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층”이 달랐기 때문에 결국은 엇갈려 버린 남녀의 이야기, 하지만 사실은 늘 같은 건물에 있었다는 탁월한 이야기다. 모든 장면과 모든 인물을 연결해 놓고야 마는 권여선의 솜씨는 먹먹한 여운을 너무도 길게 남겨서 어떤 이야기가 온몸으로 흡수된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기어코 알게 만든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구도 읽지 않은 책에 관해 말할 수는 없다. 읽은 책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말할 수 있다. 되도록이면 소설의 줄거리를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함께 읽고, 같이 얘기 나눌 수 있기를, 진심으로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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