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솔, 유럽식 독서법(2016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솔식 소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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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오래된 꿈 중 하나는 ‘경계’를 지우는 것이다. 작가와 독자 또는 허구와 현실을 구분 지을 필요 없이, 국적과 언어와 인종을 넘어서, 소설을 구성하는 그 모든 것의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소설 그 자체로만 남는, ‘무경계의 텍스트’를 만드는 것.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름을 달고, 혹은 메타픽션이라는 형식으로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보르헤스의 후예가 되고자 했나. 이제 우리는 그 끝자락에 김솔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어야 할 것 같다. 새겨 넣되 이 작가의 방식을 손쉽게 명명하려 시도하지는 말자. 그는 서사를 ‘해체’할 생각도 없고, ‘소설가 소설’을 쓸 생각도 없어 보이니까. 굳이 말하자면 ‘소설의 소설’을 쓴다고 해야 할까.

김솔은 확실히 알고 있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진 여러 경계를 허무는 방법은 오직 소설 내적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단순한 형식적 실험으로는 불가능하며, 결국 소설은 ‘이야기’라는 명제를 인정해야만 함을 말이다. 그러므로 “유럽식 독서법”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여러모로 김솔의 의도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은 꽤나 새로운 방식의 ‘소설’이면서 동시에 너무도 낯익은 종류의 ‘이야기’이다.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한 소녀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화자의 말을 빌리자면 소설의 목적은 “유럽에 대한 당신의 이해와 적응을 돕기 위함”이다.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또 여럿이면서 하나인, 언어와 인종, 불법과 합법이 마구 뒤섞이는 유럽이라는 시공간은 모호하고, 혼종적이다. 김솔은 이 공간을 교묘히 소설이라는 장르와 겹쳐 보이게 만드는데, 그것은 다시 ‘운전’이라는, 어떤 곳을 출발해 도착지까지 질주하는 모습과도 연결된다. 이때 독서는 인과를 해독해 낼 수 없는 차창 밖 풍경처럼, 믿을 수 없는, 그래서 차라리 기괴한 행위가 된다. 이 차에 올라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의 내부에 잠시 드러나는 인상과 감정”만을 따라 결말에 도달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언제든지 중간에 내릴 수 있고, 달리던 차가 방향을 잃고 곤두박질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야기에 적합한 속도와 방향을 유지”하는 일이며, 그것은 온전히 이야기 자체의 매력으로부터 온다.

이 소설을 설명해야 한다면 “발견”이라는 단어를 제시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오 년 전 벨기에로 이주해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던 한 태국인이 어떤 소녀에 관한 이야기를 “교양 있는 태국인들이 사용하는 표준어”로 옮겨 적었다. 그리고 “붓나팽 분셍”이라는 이름으로 작성된 이 태국어 원고를, 혹은 “벨몽 붓나팽”이라는 이름으로 쓰인 프랑스어 원고를 김솔이 “발견”했고, 그것을 다시 한국어로 옮겼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만약 이 소설이 ‘발견의 발견’이라면, 혹은 여러 차례의 발견을 거듭한 텍스트라면? 그렇더라도 당신은 능숙한 독자로서, 당황하지 않고 이 상황에 적응했을 것이다. 우리는 소설의 “발견”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으며, 이것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명백히 김솔이라는 작가의 창작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발견”을 용인하지 않고서는 소설 속으로 진입할 수 없다는 모순적인 사실도, 역시 잘 알고 있다. 결국 창작과 발견 사이에서, 허구와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능숙하게, 그 모호함을 그대로 안은 채 소설에 진입한다. 그 ‘모호함’이 바로 김솔이 건드리고자 하는 지점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드는 이야기들, 즉 아내와 아이가 사라져 버린 남자의 이야기와, 이 남자의 “몽상”과, 소녀가 들려주는 매력적인 이야기들을 우리는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가. 재차 강조하건대 이 이야기들에서 허구와 현실을 구분하려 한다든가, 유럽 불법체류자들의 삶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는 모두 부질없다. 목적지를 향해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처럼, 소설을 읽는 것은 그저 결말에 다다르기 위한 일일 뿐이다. “독서가 거듭될수록 소녀는 아내에서 아이로, 그 다음엔 거미로 변해 가더니 나중엔 검고 작은 돌멩이의 모습에 수렴되었다”는 문장은 이 소설이 흔히 말하는 시공간의 “재현”이나 인간에 대한 “이해”와는 별로 관련이 없음을 보여준다. 유럽에 관한 여러 정보들은 이 소설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로지 그것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데 필요할 경우에만 중요하다. 또 이 소설가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아니, 타인에 대한 이해라는 막연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저 소설이 달려가는 일, 그러니까 인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의 문제만이 그에게는 중요하다.

이런 질문들을 던져 보자. 이 소설은 사라진 아내와 아이, 강탈당한 자동차와 직업을 되찾기 위해 쓰인 것일까. 혹시 이 소설이 쓰이기 위해 그 모든 사건이 일어났던 것은 아닐까. 소녀가 “무슬림의 태교와 출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 직후, 구 년 동안 온갖 시도에도 실패했던 임신이 이루어지고, “거미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 침실에 거미가 나타나 아내의 공포증이 발발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마도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라 할 수 있을, 소녀가 들려준 자동차 숙박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일까. 자기도 모르게 고슴도치를 요리했다고 말하는 아내는 소녀의 이야기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아내와 아이는 왜 사라진 것일까. 소녀가 존재하기는 했었나.

이 물음들은 일견 무용해 보이지만 소설의 종착지를 위해서라면 유용하다. 결국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소녀라는 이야기의 신이 있고, 작가는 그저 하나의 화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 소녀는 보잘것없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전지전능한 거미여인이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속성에서 다시, 거미여인은 남자이기도 하고, 김솔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설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존재는 거미여인이 내뱉는 이야기를 받아쓰는 ‘서술자’뿐이다. 흔히 소설가의 것으로 여겨지는 특권적 “몽상”은 소설가가 아니라 서술자의 것이다. 서술자가 이야기를 전달할 때, 소설가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대체 소설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묻는 일밖에 없다. 김솔의 이 위태로운 운전은 오직 한 가지만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 소설이라는 장르는 마치 유럽처럼, 이렇게나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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