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문학 – ‘너머’와 ‘이후’의 일

(이 글은 계간 <학산문학> 2016년 겨울호에 실려 있습니다)

 

#문단__성폭력

 

이 이야기를 모른 체 하고 지나갈 수는 없겠다. 몇몇 문인들의 상습적이고도 관습적인 성폭력이 오로지 피해자들의 용기와 결단에 의지한 채 세상에 드러났다. 알았던 사람들에게도, 몰랐던 사람들에게도 놀랍고 충격적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일상적인 성폭력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다만 그것이 모종의 권력 관계 속에서 얼마나 은폐되고 얼마나 저열하게 이루어졌는지를 목도하니 소위 예술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비상식과 비윤리를 자행했던 그들의 작태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우리가 철저하게 깨달아야 할 것은 이러한 문제를 다룰 때 늘 피해자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점이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그 사건 자체를 언급하는 것부터가 대단히 힘든 일인데, 그 사건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 우리가 가해자를 단죄하고 법과 원칙을 앞세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는 옳지만 2차, 3차 가해의 우려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용기를 지지하고, 피해와 상처가 회복될 수 있도록 옆에서 함께하겠다는 다짐만으로도 충분하다. 현재 이 문제에 관해 연대하고 있는 “페미라이터(femi-writers)”의 ‘문학출판계 성폭력 · 위계 폭력 재발을 막기 위한 작가 서약’ 여섯 번째 항목은 이렇다.

 

가해자와 암묵적 방조자가 되지 않는 것을 넘어서, 눈뜨고 있는 목격자이자 증언자가 되겠습니다. 문학출판계 성폭력 · 위계 폭력의 피해생존자들을 지지하며 함께 목소리를 내겠습니다.

<문학출판계 성폭력 · 위계 폭력 재발을 막기 위한 작가 서약> 일부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dnNSoK2etBkZT3l188klp9-e87zpphhymHv6OqrXdyjzbEww/viewform?c=0&w=1

 

불편하고 껄끄럽더라도 부당한 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되어온 차별의 구조에 균열을 내고, 고통받고 상처입은 약자의 편에 서는 것. 이것은 비단 성폭력이나 위계 폭력의 문제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입장뿐만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장르가 추구해야 할 기본적인 방향일 것이다. 그러니까 문학적 태도라는 것은 확고하게 옳다는 신념에 가득 찬 어떤 지향이 아니라 사건을 주시하고 그 속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끝까지 지켜보는 “목격자이자 증언자”의 눈빛이다. 그것은 곧 철저하게 관찰자의 위치에 있되 피해자 중심주의를 견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런 태도에서라면 이해나 화해, 용서나 구원 같은 말들은 결코 쉽게 통용될 수 없다.

 

 

힐링이라는 허상

 

문학작품이 주는 여러 효과들 중 이른바 치료(therapy)에 관한 것이 있다. 말 그대로 문학작품을 읽고 그것에 관해 말하거나 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증상’을 호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시나 소설을 읽고 정서적 감응을 경험한 일이 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심리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 변화가 삶의 중요한 계기나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어느 시대 어떤 체제에서나 개인은 상처를 입고 고통 받는다. 문학은 그 상처와 고통의 정체를 밝혀주고 그 치유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것이 값싼 화해나 손쉬운 결말이 아니라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생각하게 하는 모색일 때 문학은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다.

김치수, 『상처와 치유』, 문학과지성사, 2010, 7-8쪽.

 

문학이 치유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언제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가 다르고 상황이 다를지라도 어떤 인물의 고통이 정확히 나의 것과 일치할 수 있다는 환상에 가까운 일은 문학을 통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현실의 제약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 무수한 소설 속 인물들을 떠올려 보자. 불가능한 사랑으로 가슴을 앓는 누군가가 있다면 자신의 고통을 먼저 경험한 그 인물들을 통해, 정확히는 그 인물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그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작가에 의해 고통의 ‘공감’을 경험할 것이다. 그런데 문학이 그런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은 독자 중심의 수용 맥락을 전제했을 때의 일이다. 아무리 고통을 절절하게 묘사한 소설이어도 독자가 그것에 감응하지 않으면 ‘치유’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한때 힐링이라는 이름으로 무수한 담론이 생산되었던 몇 해 전을 생각해 보자. 특히 위로나 공감이라는 딱지를 달고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제공되었던 텍스트들은, 그것이 비록 문학 장르가 아닐지라도 금세 그 효용을 잃고 일종의 조롱거리로 전락해버렸다. 그것은 그 텍스트들이 무가치하다거나 그 텍스트들의 방향이나 목표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독자들이 힐링을 원하지 않을 때, 아무리 탁월한 치유의 서사라도 그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피해자 중심주의의 논리와 같다. ‘치유’라는 문학적 태도는 철저히 독자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어떤 텍스트가 그 자체로 치유의 기능을 담당할 수는 없다. 그저 독자의 판단을 지켜보며 치유가 될 수 있도록 “모색”할 따름이다. 위의 인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모색”이라는 어휘다. 문학은 답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설령 옳지 않은 길이라도 그 모색의 과정이 어떤 독자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트라우마

 

한국사회는 그 어떤 곳보다 역동적이고, 한국문학은 그러한 현실과 늘 맞서 왔다. 한국 근대문학의 출발에는 봉건적 사회의 청산과 근대적 가치의 획득이, 일제시대에는 식민지 극복과 민족의 회복이, 해방 이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에는 좌우 이념의 대립이, 분단 이후에는 산업화에 따른 자본주의의 문제, 정치적 민주주의의 달성 등이 한국문학이 투쟁해야 했던 거대한 문제들이었다.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다다르면서 우리는 IMF시대를 거쳤고, 급속도로 신자유주의 체제로 접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나라도 망할 수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경제적으로 무너지는 것이 국가 단위가 될 수 있다는 실감은 개인을 무척 움츠러들게 만들었고, 각자의 몫을 보전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대의(大義)는 사라졌고, 문학은 더 이상 ‘큰 서사’에 구애받지 않고 ‘작은 서사’에 미시적으로 집중했다. 물론 이를 통해 개인의 가치를 확인하고, 일상을 다시 발견하는 성과는 적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지금 한국문학은 두 가지 문제를 맞닥뜨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하나는 페미니즘이라는 가치의 재발견과 이를 통한 근본적인 세계의 변혁이며 다른 하나는 세월호 참사에 의한 집단 트라우마의 형성이다. 여기에서는 당연히 후자에 관해 자세히 언급하고자 하는데, 2014년 4월 16일의 일은 한국현대사의 어떤 사건과 비교해도 그 외상(外傷)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는 사건의 형태로만 보면 그간 한국 사회가 겪어 왔던 여러 대형 재난 사고와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관리기관의 부실이 있었고, 원칙과 규제를 지키지 않았으며,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그러나 우리는 수학여행을 떠났던 아이들을 잃었고 그것은 곧 미래세대를 지켜줄 아무런 힘이 없다는 무기력의 처참한 증명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죽어가는 과정을, 국가와 언론 등 합리적이며 체계적인 시스템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전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며칠 동안 지켜 보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월호의 아이들을 죽이고 우리 사회의 문제를 비로소 확인했던 것이다.

흔히 자연재해가 아닌 보통의 참사라면 비행기의 추락이나 건물의 붕괴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된다. 이 경우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더라도 그 사람들 전체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다. 그냥 그 순간에 거기 있었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일 뿐이다. 그러한 사건을 접하면 우리는 대개 절망이나 안타까움 같은 감정을 갖게 될 것이다.

총기난사 같은 참사를 떠올리면 또 조금 다르다. 그것은 어떤 공동체가 소수의 광기에 의해 무참히 부서지는 사건이며, 비뚤어진 인간의 본성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인간에 대해 회의를 갖게 한다. 이를 지켜보는 우리는 참담함과 분노를 동시에 느낀다.

세월호 사건은 이 두 유형의 참사를 합쳐 놓은 최악의 형태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참사 당시 해외 언론에서 이 사건을 “전시 아닌 평시에 발생한 사고 중 최악”이라고 말한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어떤 집단이 순식간에 외부의 힘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그러니까 ‘학살’은 보통 전시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무기가 아닌 어떤 것에 의해, 하나의 공동체가 처참하게 부서지는 순간은 평시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같은 학교에 다니던 동급생 절반 이상이 세상을 떠났고 그들의 친구들은 일부 생존했으며, 부모들은 자식의 죽음을 견뎌야 하는 삶을 평생 살게 되었고, 우리는 스스로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절감했다. 어쩌면 세월호 참사는 그것을 경험한 세대에게는 전쟁보다 더 참혹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문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세월호를 다룬 텍스트들

 

세월호의 충격은 너무 커서 당시에는 그것을 당장 문학의 언어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웠다. 참사 직후 글을 쓰는 사람들이 겨우 내보이기 시작한 것은 사태를 전혀 수습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정부에 대한 분노와 수많은 죽음에 대한 애도의 말이었다. 『눈먼 자들의 국가』(문학동네, 2014)나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실천문학사, 2014) 등을 비롯해 당시 발표되었던 여러 작가들의 말은 사건의 문학화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 사건에 대한 최소한의 객관적 거리를 확보할 시간이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임철우의 「연대기, 괴물」(《실천문학》, 2015년 봄호)은 세월호 참사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첫 작품일 것이다. 이 작품은 서북청년단 사건으로부터 베트남 전쟁, 1980년 광주,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에 나타난 “괴물”들을 연결시키면서 국가라는 이름의 속박에 의해, 권력이라는 이름의 욕망에 의해, 이념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의해 괴물이 탄생함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세월호는 배가 기울어진 채 그 모습이 화면으로 방영되던 사건 당시의 충격으로 고스란히 묘사된다. 또한 당시 차츰 일부 극단적인 성향의 정부 지지자들이 드러내기 시작한 유가족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들도 여과없이 보여진다. 임철우는 그 괴물을 끝내 응시하면서 세계가 지옥으로 변하더라도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지막까지 지킬 수 있는 존엄성이 그래도 남아 있음을 간신히 증명하고 있다.

방현석의 「세월」(《문학동네》, 2015년 가을호)은 여러모로 주목할 만한 작품이었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했는데 하나는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식, 즉 “잊지 않겠습니다”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린 학생들의 죽음에 가려진 일반인 희생자들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베트남의 어떤 가족 이야기로 시작되던 이 소설이 세월호를 다룰 것이라고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소설 중반부에 다다라서야 제주도로 향하던 어떤 배가 등장했고 그제야 이 소설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하면서 잊고 있었던 세월호의 이야기와 단원고 학생들의 죽음에 가려져 잊혀지던 ‘다른 사람들’을 동시에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중편의 분량으로 사건 이후까지를 찬찬히 다룬 이 소설은 여전히 세월호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김이설의 「갑사에서 울다」(《자음과모음》, 2016년 봄호)는 세월호 참사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고 아이를 잃은 엄마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여전히 죽은 아이로 고통 받는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정하고 무심한 남편을 함께 보여준다. 세월호 유가족을 암시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엄마의 고통은 무척이나 절절하게 묘사되고 남편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매정하다. 남편은 거의 ‘악’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정도로까지 묘사했어야 하는지가 의문이기는 해도, 또 그것이 ‘현실’이어서 아프고 답답한 작품이었다.

지금 세월호에 관해 가장 적극적인 작가는 김탁환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는 「찾고 있어요」(《황해문화》, 2016년 여름호)와 『거짓말이다』(북스피어, 2016)를 통해 세월호 잠수사의 이야기를 건져 올리고 있다. 세월호 사건의 당사자들이 더 이상의 상처를 받지 않도록 최대한의 윤리적 태도를 발휘하는 이 작가의 태도가 사실 소설적으로 썩 지지할 만하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김탁환 특유의 끈질긴 시선과 디테일의 장점이 고루 발휘되고 있어 인상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도 짐작하기 어려웠던, 잠수사들이 바닷속에서 견뎌야만 했던 시간들에 관해 이 소설은 너무도 핍진하게 보여준다. 『거짓말이다』의 추천사에서 정혜신은 “깊은 공감을 느끼며 같은 주파수를 공유한 사람들은 의도치 않아도 종내 서로에게 치유적 존재가 된다”라고 썼는데, 이 소설을 읽는다면 적어도 차가운 바다에서 죽음을 건지는 그 아득함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고통에서 빠져나오는 길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이 하나의 치유 과정이 될 수 있다면, 사건을 겪은 당사자들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창비, 2015)이나 『다시 봄이 올 거예요』(창비, 2016)는 그런 측면에서 쉬이 지나칠 수 없는 책들이다. 유가족이나 생존자의 증언이야말로 그 자체로 문학이거니와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볼 수 있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세월호 이후의 한국문학은 세월호라는 트라우마를 짙게 드리워 왔다. 특히 아이의 죽음이라는 소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등장했고, 그것은 명백히 세월호의 영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문학이 우리를 치유해 줄 수 있다는 말을 쉽게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문학을 통해 공감과 위로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명백하다. 그러니 어쩌면 치유나 치료라는 것은 문학 ‘너머’의 일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우리가 문학으로부터 받은 정서적 감응이 치유로 이어질지는 그 ‘이후’의 일이어서 문학을 대면하는 순간과는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쌍둥이 오빠를 잃은 동생의 마음을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마주하게 되면 대책없이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문학을 마주하는 그 순간에 나도 모르게 어딘가가 치유된다고.

 

사막에도 길이 있다.

오빠는 볼펜을 꺼내 손바닥에 메모를 해두었지. 손바닥에 손금이 꼭 사막의 길 같아. 손바닥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던 오빠가 그렇게 말했던가. 흘러내리는 모래를 쥐듯이 손바닥을 가만히 말아 쥐었다.

 

(만약 우리가 단지 조금 멀리 떨어진 사막의 길 위에 서 있는 거라면

만약 우리가 다만 조금 긴 시차 속에 살고 있는 거라면)

 

어둠보다 더, 별이 많아.

 

그 하늘에 압도돼서 겨우 중얼거렸던 이 말을 오빠는 기억할까.

 

그 밤에.

 

오빠,

내가 너를 조금 더 빨리 불렀더라면,

내가 오빠를 조금만 더 빨리 일으켜 세웠더라면.

 

내가 너보다 1분 15초 먼저 세상에 나왔더라면.

내가 너였더라면.

윤해서, 「우리의 눈이 마주친다면」, 《문예중앙》, 2016년 여름호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