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미, 『디어 랄프 로렌』(문학동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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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믿는 소설

 

손보미의 첫 장편소설이 출간되었다. 그간 인상적인 단편들로 익히 주목을 받아 온 작가였고, 그래서 그가 써내는 장편은 어떤 모습일지 꽤 궁금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첫 장편소설은 손보미의 단편을 그대로 확장해 놓은 것 같고, 장편으로의 성공적인 안착으로 여겨진다. 『그들에게 린디합을』(문학동네, 2013)에서 잘 드러났던 손보미 특유의 이국적 감각, 소설의 인물이나 배경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소설의 서술과 구조가 ‘한국적’이지 않은 이 작가만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고 무엇보다도 왜 어떤 이야기는 ‘소설’이어야 하는지에 관해 이 소설은 매력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54년의 세계와 그 세계의 몇몇 기억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결국 “랄프 로렌과 조셉 프팽클이 만난 해”(12쪽)로 우리를 데려간다. 뉴욕대학교 물리학과 대학원 과정에 유학 중인 ‘종수’가 지도교수인 ‘미츠오 기쿠’로부터 다른 진로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사실상 연구실에서 쫓겨나는 장면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고통과 괴로움으로 신음하던 ‘종수’가 우연히 잠겨 있던 자신의 서랍 속에서 ‘수영’의 청첩장과 “디어 종수”(32쪽)로 시작하는 메모를 발견하면서 ‘종수’는 열여덟의 기억으로 속절없이 끌려간다. 그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잊고 있던 그 기억은 ‘랄프 로렌’의 마니아였던 ‘수영’의 부탁으로 미국의 디자이너 ‘랄프 로렌’에게 유일하게 그 브랜드에서 제작하지 않았던 ‘시계’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의 편지를 함께 작성해갔던 시간들이었다. 그 기억에서 출발해 ‘종수’는 랄프 로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추적하기 시작한다.

우선은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겠다. 왜 ‘종수’에게는 ‘랄프 로렌’이 그토록 중요한 사람이었을까. 사실상 현재 그의 처지와 상황에서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게다가 그런 일이 있었는지 새삼스러울 정도로 완전히 잊고 지냈던 수영과의 기억은 그가 갑자기 ‘랄프 로렌’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것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되지 못한다. 특히 이 관심이 ‘종수’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삶 전체를 지배할 정도로 영향을 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소설을 매력적으로 만드는데, 그것은 작품 속에서 ‘종수’의 목소리로도 계속 언급되고 있는 바 이 모든 것이 ‘우연’이기 때문이다. 삶은 대체로 이해할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일들로 진행된다는 것. 자신이 처한 상황과 무관하게 어떤 일들은 계속 일어나고 또 이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어떤 ‘기억’은 삶의 방향을 완전히 돌려놓기도 한다고,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종수’는 수영의 기억과 함께 ‘랄프 로렌’의 삶 속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그 행로를 따라가면서 여러 인물과 사건을 마주하고, 특히 ‘조셉 프랭클’을 만나게 된다. 유년의 랄프 로렌을 조셉 프랭클이 거두어 키웠기 때문에 이 만남은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조셉 프랭클이 ‘시계공’이었다는 사실은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었다. 시계라는 이 퍼즐의 조각은 수영과의 편지 작성, 랄프 로렌이라는 브랜드를 관통하면서 ‘종수’로 하여금 이 추적을 멈출 수 없게 한다.

자신의 삶이 너무도 명백하게 변화하는 순간을 마주했을 때, 그것도 상처를 안은 채 고통과 절망 속으로 빠져들 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는 왜 그렇게 되었을까, 어떻게 이런 상태가 되었을까 질문을 던지면서 끊임없이 이유와 원인을 찾게 된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 과정은 곧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도 같다. ‘나’의 경험과 기억이 다른 인물과 세계를 만나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과정만이 유일하게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것은 곧 ‘소설’의 과정이자 방식이 아닌가. ‘종수’가 ‘랄프 로렌’의 궤적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작가’라고 소개하는 여러 장면들을 떠올리면, 마치 작가에게는 누군가의 삶을 추적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이 소설은 결국 ‘종수’가 세계를 이해해가는 과정이고, 그것이 다시 소설이 된다. 이는 시간을 더듬는 추적의 과정으로서의 소설 텍스트가 늘 경험하는 일종의 역설이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에 대한 ‘믿음’으로 지탱된다.

이 소설을 쓴 것은 작가 손보미이지만, 소설 속에서는 엄연히 ‘나’, 즉 ‘종수’로 여겨진다. 또 랄프 로렌은 현존하는 디자이너(아직 생존해 있다)이자 브랜드이고 그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사실이기도, 아니기도 하다. 게다가 이 소설은 한국어로 씌어져 있지만 ‘종수’가 보고 들은 정보는 대부분이 영어로 이루어진 것이다. 전술했듯, 이 장편소설은 손보미의 단편이 확장된 형태이고 실제로 「디어 랄프 로렌」(『현대문학』, 2014년 9월호)이라는 제목으로 이미 발표된 바도 있다. 작가는 그 사실을 이렇게 활용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쓰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많다. (…) 다만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한 사람은 내가 알고 지낸 소설가 S이다. 그는 내가 이 이야기를 글로 남겨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고,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자신이 직접 ‘디어 랄프 로렌’이라는 제목으로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 소설을 읽는 내내 내 안의 어떤 것이 계속 나를 부추겼다. (14쪽)

 

재차 언급하건대 이 소설의 작가이자 서술자로 내세워져 있는 ‘나’는 손보미가 아니지만 손보미이고, 랄프 로렌 역시 실존 인물이지만 실존 인물과 다르다. 작가는 서술자를 설정해야만 하고 현실의 어떤 부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럴 때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딜레마에 대해 손보미는 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어 활용하는 전략을 취한다. 이것은 소설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만약, 이 소설에 나오는 어떤 내용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것과 일치하거나 혹은 반대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건 전적으로 우연에 근거한 것”(357쪽)이라는 작가의 말에 수긍할 수 있는 독자라야 이 소설과 제대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즉 이 소설의 형식과 내용이 작위적이고 편의적으로 느껴진다면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소설을 들여다보면 아쉬운 점도 있다. 손보미가 의도한 것이 명백히 소설임을 밝힘으로써 역설적으로 소설이라는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던 것이라면 진짜 작가인 손보미의 ‘작가의 말’을 생략하는 것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사실상 ‘종수’의 ‘작가의 말’이므로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소설가 S’는 그저 표지의 이름으로만 남았다면, 훨씬 매력적이지 않았을까. 요컨대 이 소설 전체는 사실상 소설에 관한 소설이고, 이 경우 메타픽션으로도 읽을 수 있게 된다. ‘종수’가 ‘랄프 로렌’을 찾아 나서고, 그에 관한 취재와 자료 조사를 면밀하고도 집요하게 진행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소설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읽지 않아도 좋다. 어쨌든 결국 인간의 삶은, 소설은 시간을 더듬는 추적의 과정이고, 그 추적은 ‘디어(dear)’로 시작하는 서로 간의 연결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 작가는 끝내 설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무척 세련된 방식으로, 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실타래를 풀어 나간다. 어떤 사람들은 결국 만나게 되어 있고, 어떤 일들은 결국 일어나게 되어 있다. 우리가 지금-여기에서 되돌아보는 모든 시간은 전부 그렇다.

 

그날, 카페 밖에서 섀넌은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기에 녹음했다. 그건 누군가에게 목소리로 편지를 쓴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으리라. 그리고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그 편지는 분명히 나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편지’를 대체 누구에게 보내고 싶었던 것일까? 보낼 마음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누구에게도 보내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녹음한 것이었을까? (323쪽)

 

모든 소설은 누군가에게 띄우는 편지이다. 또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이야기 속에서 누군가를 애틋하게 만나는 일은 소설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매력이다. 바로 그 매력을 손보미는 이 작품에서 매 순간 보여준다. ‘종수’가 마주하는 모든 인물들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서로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삶에는 가치가 부여된다. 서로가 만나야 한다는 그 믿음이 없다면 소설이라는 장르는 대체로 무의미해진다. 우리는 어떤 인물들을 만나 그 세계를 대면한다. 그것이 소설의 전부이고, 여기에 작가와 독자의 자리는 없다. 그저 누군가가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다. 『디어 랄프 로렌』은 바로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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