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과 김훈

(이 글은 <문학과사회> 2017년 여름호에 실린 리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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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주의라는 매혹과 실패

– 장강명, 『우리의 소원은 전쟁』(예담, 2016)

 

이제 장강명에 관해서라면 어느 정도 합의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장르적 문법에 관심을 갖고 소설을 시작했고, 기자 생활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의 현실에 관해 구체적이고 생생한 눈을 가질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업 소설가로의 전환 이후 소설의 문제의식과 주제 설정에 탁월한 감각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장강명의 그런 장점들이 작가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패턴”이 되어버리면서 소재와 주제만 바뀔 뿐 형식적으로는 그저 반복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다.

장강명이라는 작가의 소설 작법이 꽤나 독특하다는 것은 작가 후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모든 책에서 자신이 소설을 쓰면서 참고한 2차 자료에 관해 지나칠 정도로 상세하게 밝혀놓고 있다. 그것은 곧 소설가가 어떤 문제에 관해 작품을 쓸 때 머릿속으로만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다룬 각종 텍스트를 깊이 참조한다는 것인데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의아한 것은 그것이 일종의 ‘강박’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초고를 꼼꼼하게 읽고 많은 조언을 주신 감수자 두 분께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중략) 두 분 덕에 초기 원고의 각종 고증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잘못된 서술이 남아 있다면 전적으로 작가인 저의 책임입니다.(「작가의 말」, 510쪽)

 

소설은 허구의 픽션이기 때문에 의의를 가질 수 있는 장르이다. 소설가에게는 소설에 관해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할 이유가 전혀 없다. 물론 불필요한 오해나 왜곡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어떤 부분에 관해 소설가가 그것이 ‘상상’의 소산임을 밝히는 경우는 더러 있고, 명백한 참조나 인용에 관해서 출처를 밝히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렇지만 “고증의 오류”나 “잘못된 서술”에 관해 작가가 책임을 운운하는 문장은 번역서에서나 등장하는 표현이고, 굳이 꼽자면 역사소설 혹은 실화소설에서나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장강명의 소설은 그쪽과는 오히려 정반대에 있는, 그야말로 ‘소설’에 가깝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그토록 자료 조사와 디테일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이에 대해 장강명이 오랜 기자 생활을 거쳤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쉬운 대답이다. 여기서 함께 다루고 있는 김훈의 사례만 보더라도 이것이 기자 출신 남성 작가의 특징적 글쓰기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요컨대 장강명식 글쓰기는 일종의 ‘소재주의’이다. 그는 문제적인 소재를 다루기 위해 그에 관한 조사를 시작하고 책, 논문, 인터넷 자료, 전문가의 조언 등을 광범위하게 섭렵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서사의 시공간을 마련하고 그 이후에 무슨 사건이 일어날지, 어떤 인물이 필요할지를 결정한다. 초기의 장강명은 이 과정을 아주 긴밀하게, 또 여러 고민을 거쳐 진행했고, 그의 소설은 그만큼 깊었다. 그런데 최근의 장강명에게는 서사의 밀도를 소재 그 자체의 파급력에만 의지하려는 경향이 감지되는데, 이를테면 이렇다. 『한국이 싫어서』는 소위 ‘헬조선’에 관한 청년세대의 절망적이고 자조적인 인식을 깊이 있게 보여줄 것 같았지만 결국은 행복을 찾아 ‘탈조선’한다는 식의 단순한 이야기밖에 되지 못했고, 『댓글부대』는 국정원 불법 선거 개입 문제를 깊숙이 파고 들어갈 듯할 인상을 주지만 여론 형성의 구조나 그 시스템에 대한 천착보다는 비뚤어진 욕망과 불분명한 음모의 선정성만 부각되고 말았다. 『우리의 소원은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남북통일을 이상적이고 막연한 희망으로서만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그것이 사실은 더 큰 혼란과 문제점을 가져올 수 있다는 통일의 역설에 관해 이야기하는 소설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저 배경일 뿐, 지역의 폭력 세력과 장사꾼들, 그리고 군부 세력이 결탁하여 벌이는 흔한 누아르에 가깝다.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온 최근 장강명의 소설들은 섭렵된 자료와 확보된 디테일이 서사에 긴밀히 복무하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소설이 제목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것은 반대로 제목을 아주 잘 지었다고도 볼 수 있을 텐데, 최근 장강명의 소설들이 흔하고 뻔한 이야기를 그 자체로 새롭게 ‘구상’하지 않고 한국의 현실에서 새로운 ‘소재’를 끌어와 그 익숙함을 상쇄하려는 시도는 문제적이다. 만약 장강명 소설의 중심이 ‘소재’로 향하고 있다면 『우리의 소원은 전쟁』은 그 지점에서도 실패에 가깝다. 이를테면 장리철로 대변되는 북한의 특수부대 출신에 대한 일종의 전형적 ‘환상’은 이 소설에서도 반복된다. 그가 혈혈단신으로 살상에 최적화된 인간 병기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까지 살아남아 최종적인 복수까지 다짐하는 과정은 누아르 장르의 문법 중 하나일 텐데, 사실 이 소설의 모든 인물과 사건이 그 문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이 소설의 인물들은 역할에 따른 목표가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밀도나 긴장감이 좀처럼 높아지지 않는 것은 “통일과도정부”가 들어선 북한의 “장풍군”이 충분히 설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저 설명만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남북이 통일의 시기에 접어든 이후의 혼란이 너무 단순하게 정리된 것은 아닐까, 특히 “유엔 평화유지군”의 무기력한 모습이나 남한 사회에 대한 너무 적은 묘사는 오히려 북한의 상황을 비현실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분명히 프롤로그에서 “몇 년 전까지 통일 전문가들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자, 아귀와 수라들의 축생도가 열렸다”(12쪽)고 했는데 이 소설이 그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두 가지 정도 구체적인 불만을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이 소설의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이다. 아무리 통일의 시기이고, 남한의 표준어가 나름대로 정착되는 과정이라 하더라도 북한 언어에 대한 감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인물들이 가진 목소리는 생생함이 떨어지고 입체적이지 못한데 그것은 디테일의 실패라고밖에 볼 수 없고, 이는 장강명이라는 작가에게 있어 치명적인 것이다. 또 하나는 여성 인물을 다루는 방식이다. 장리철과 함께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은명화’, 평화유지군 쪽에서 사건에 접근하는 말레이시아 대위 ‘미셸 롱’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면서도 끝내 그동안의 여성 인물이 그려져왔던 방식, 즉 긴박한 순간에 연민이나 동정 같은 ‘감정’을 발휘해 사건을 혼란에 빠뜨린다거나 소위 ‘미인계’의 전략을 사용한다든가 결국 동료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든가 하는 식의 설정은 장강명답지 않은, 너무 뒤떨어진 전략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댓글부대』에서 지나치게 강조된 성매매 문화에 대한 묘사나 최근 단편에서 발견되는 여성에 대한 시선이 조금 우려스러운데, 장강명에게라면 이런 기대나 요구를 해봐도 좋지 않을까. 그가 문단이라는 집단과 문학이라는 제도에 큰 관심이 있는 만큼, ‘문단 내 성폭력’이나 ‘권력으로서의 성차’ 같은 작금의 페미니즘 이슈에 도전해주기를. 장강명이 쓰는 페미니즘 소설이 기대되는 게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소재주의라면 벌써부터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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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함을 버릴 때 오는 것들

– 김훈, 『공터에서』(해냄, 2017)

 

여러 시선들이 있겠지만 김훈은 문제적이고 중요한 작가이다. 그는 자기만의 문장이 있으며, 쓰고 싶은 것이 늘 분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력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런 확신과 단언이 때로는 독자의 감각과 어긋나기도 하지만 김훈이 가진 작가 정신은 그의 소설이 결코 쉽게 씌어지지 않았음을 증명해왔고, 무엇보다도 그의 단단한 문장이 이를 지탱해주는 근간이었다. 단문으로 이토록 풍부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김훈을 풍경의 작가로 일컫게 했고, 그의 소설은 광활하고 웅장하면서도 섬세하고 날카로웠다. 그러한 김훈 문학의 ‘풍경’과 ‘묘사’ 속에서 자못 의아했던 것은, 김훈이 늘 가지고 있는 어떤 비장함이었다. 역사 속으로 달려갔을 때, 그것은 서사의 무게감과 깊이를 확보해주는 훌륭한 방편이었지만 지금의 현실을 그려낼 때 그 비장함은 부담스러운 외피밖에는 되지 않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작가를 이토록 비장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 문제는 일단 차치하더라도, 그의 비장함이 역사소설 쪽에서 특유의 성공을 거둔 것에 비해 현대사를 다루었던 몇몇 작품에서 실패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더군다나 에세이스트로서의 김훈의 탁월함을 떠올리면 소설가로서 김훈은 어딘가 ‘강박’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번 소설은 『흑산』(학고재, 2011) 이후로 6년 만의 단행본이긴 하지만 김훈이 그간 계속 침묵해왔던 것은 아니다. 2013년 겨울부터 김훈은 다시 단편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약 1년간 꾸준히 작품을 써 왔다. 현실의 사건을 바탕으로 취재와 조사를 거쳐 서사화하는 일종의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여전했고, 소설들은 사실 좀 들쭉날쭉했다. 그 일련의 단편들에서 감지되었던 것은 김훈의 글쓰기가 ‘산문’ 쪽으로, ‘자전적’인 방향으로 옮겨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20세기를 오래 살아온, 이제는 흔치 않은 작가만이 가질 수 있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감각이었다.

『공터에서』가 김훈의 이력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작품이 말 그대로 자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김광주와 그 자신이 살아온 삶의 자취가 거의 그대로 소설에 녹아들어 있다. 김훈은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쓰는 작가였지, 스스로를 드러내는 편은 아니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그에게 소설은 산문적 글쓰기와는 구분되는 어떤 것이었다. 그런데 그 경계가 거의 최초로, 이 작품에서는 허물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마동수를 김광주로, 마차세 그리고 마장세의 일부를 김훈으로 읽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중국을 떠돌며 일제강점기를 견뎌냈지만 해방된 조국의 사회에 끝내 순응하지 못한 마동수의 행적은 김광주의 그것이고, 그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방황하고 헤매는 마장세와 마차세의 삶은 김훈 자신의 것이다.

이 소설은 김훈이 처음으로 비장하지 않게 쓴 소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 자신이 말했듯 “내 마음의 깊은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기억과 인상의 파편들을 엮은 글”(352쪽)이 『공터에서』이다. 이야기는 그저 펼쳐져 있고, 내가 알던 김훈이라면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중복되는 서술과 과감한 생략이 서슴지 않고 나타난다. 나는 이 작품이 퇴고를 별로 거치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김훈식으로 표현하자면, 내처 달리고 뒤돌아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생겨난 틈과 균열이 이 소설을 매력적으로 만든다. 소설의 각 장에 달린 제목은 너무나 건조하고 단순하며 분량도 제각각이다. 뚜벅뚜벅 마동수의 삶으로 걸어 들어가는 초반부가 압도적인 것에 반해 중후반부는 서사의 밀도가 급격히 떨어지며, 이야기는 갑자기 끝나버린다. 과연 김훈다운 문장도 많지만 동시에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도 적지 않고 잘 알려져 있듯 여성 인물에 대한 평면적인 이해와 설정, 묘사가 문제적이기도 하다. 요컨대 이 소설은 김훈의 작품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력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 될 것은 분명하다.

역설적이게도, 방금 언급했던 많은 단점들이 이 소설을 지지하는 이유가 되었다. 김훈은 이 소설에서 많은 것을 감당하면서, 또 동시에 포기하면서 글을 써나간 듯하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스스로의 기억을 되짚는 고통, 떠밀리고 쫓겨 다녀 결국은 무기력하게 남루해져버린 사람들의 슬픔 같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작가 자신에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생의 흔적들을 정직하게 밀고 나가려는 태도가 느껴진다. 그것은 결기에 싸인 비장함이 아니라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자유로움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산업화와 독재 정권의 현실을 그리면서 이 작품처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건조하게 처리하는 방식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김훈은 한국 현대사가 이념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먹고사는 문제였음을, 세상에 나왔으므로 살아야 하는 인간의 절대명제에 관한 것임을 무척 쓸쓸하게 그려낸다.

허기와 식욕에 관한 김훈의 집요한 시선은 잘 알려진 것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것이 혈연 혹은 피의 문제, 그리고 생식 또는 번식의 문제와 더욱 깊이 연결되어 있다. 아기가 맹렬하게 빨아대는 어미의 젖, 매질을 당한 후 경찰서 앞에서 먹던 선짓국, 조촐하게 차려진 식탁 위의 고추장찌개 같은 것들은 그것이 결국 생식(生殖/食)임을, 그 빗금 속에 수많은 먹음과 먹임을 통해 떼려야 뗄 수 없는 것들이 다시 생겨남을 끈덕지게 보여준다. “제 한 몸뿐이지. 누구의 자식도 아니야.”(295쪽)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고, 혼자라는 적막감과 쓸쓸함은 영원히 견뎌야 하는 실존의 문제이다. 동시에 혈연이라는 사슬은 스스로를 옥죄어오고 “사슬을 끊어야 하는데, 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343쪽)에 결박되어 있는 것은 김훈만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종국에는 자신의 근원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얼굴은 내가 아니라 나를 만든 사람의 것이다.

김훈은 자신의 아버지 김광주와 스스로를 소설에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도 그들이 ‘작가’였음은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김훈은 왜 소멸되기를 바라는 자신의 기억과 인상에 글쓰기의 자리는 마련하지 않은 것일까. 소설가는 소설로 연을 끊고 기억을 떠나보내므로, 아직 김훈에게는 할 말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이런 흔한 문장으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김훈의 다음 소설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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