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201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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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사 여름호를 읽었다.

하이픈의 ‘시-인’이 무척 풍성하게 느껴진 반면, 본권은 약간 단조로운 느낌이었다.

리뷰나 페미니즘 기획은 좋은 시도고 방향이라 여겨지지만 사실 새롭지는 않고, 본격적인 ‘비평’이나 ‘담론’의 자리가 부족한 듯 하다.

무엇보다도 신인문학상을 시 부문밖에 선정하지 못해 단출해 보였다.

평론 부문이야 수상자 없음이 익숙하지만 소설 부문을 끝내 뽑지 못했다는 건 여전히 ‘문지’형 작가를 찾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신작시들에서도 인상적인 게 별로 없었고, 소설도 좀 그런 편이었다.

 

1. 정찬, 카일라스를 찾아서  ★★★☆

아내가 투병하다 죽고 곧이어 아들마저 사고로 잃게 된 남자의 이야기.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고통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가, 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방식은 티베트의 오체투지.

그리고 그것을 권유한 사람은 아들 현수가 죽은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친구 기훈의 아버지 하영우.

그 하영우는 뒤늦게 생모의 존재를 알고 방황하다 인도 갠지스 강으로 떠났던 인물이다.

디테일도 좋고 절창임에도 확실한데, 어쩔 수 없이 작위적이다.

고통과 치유의 과정이 꼭 이런 식으로 또 그려져야 하나 싶다가도 이렇게밖에 쓸 수 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의아했던 것은 그토록 ‘어머니’의 거대한 자리를 느끼는 하영우에게 ‘아내’, 즉 기훈의 엄마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현수와 기훈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힌트를 주고, 여지를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2. 배명훈, 춤추는 사신(使臣)  ★★★☆

어떤 작은 세계가 있고 하늘에서 돌덩이가 쏟아지기 시작해 그곳은 점점 멸망해간다.

그리고 그 와중에 ‘사신’이 당도한다.

사신은 말이 없고, 기묘한 춤을 추는데 그 의미를 파악해가는 과정이 소설에서 그려진다.

얼핏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설정인데, 핵심은 “본 내용물은 실재를 단순 반영하는 상징물이 아님. 실재를 재현하는 표현물임”(103쪽)이라는 문장에 있는 것 같다.

그간 배명훈의 일련의 작업들을 떠올려보면 세계와 존재에 관한 이야기가 꾸준했고, 특히 세계’와’ 존재, 그러니까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와의 관련성 속에서 이를 사유해 보려는 시도가 계속됐던 것 같다.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세계, 혹은 세계로부터의 존재가 ‘우리’라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사신과의 극적인 교섭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보내진’ ‘나’를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혹시 누군가에 의해 이 세계로 보내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사신이 돌로 변해가는 듯한 장면을 보면 우리가 지금 눈으로 확인하는 고대의 석상 같은 흔적들이 사실은 나와 손바닥을 마주했던 누군가이지 않을까, 흥미롭게 상상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다만 이 소설에서 또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언어’나 ‘문자’에 관한 문제가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 사신이 나의 ‘고전’이고 ‘서기’였다는 결말의 서술로 짐작건대 언어 이전의 세계, 혹은 언어가 세계를 표상하기 시작한 세계의 모습이 이 작가가 포착하려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불가해한 세계에서 다시 또 불가해한 존재를 이해하려는 이야기가 되어버려서, 또 지금 우리가 가진 언어 인식과 관념을 모두 무너뜨리고 이 소설로 진입해야 하는데 감당하기가 버겁긴 했다.

‘사신’이나 ‘나’의 경우 분명하게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굳이 그렇게 써서 또 굳이 그렇게 읽히도록 했어야 했나, 생각도 든다.

 

 

3. 박민정, 바비의 분위기  ★★★★

문지 문학상을 받은 작가.

소위 손이 풀린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요즘 발표하는 소설들마다 쉽게 넘겨버리지 못하고 있다.

기묘한 혹은 미묘한 혐오와 명백하고 분명한 폭력 사이를 날카롭게 짚고 있다.

‘시커멓게 혼자 다니는 남자들’의 기원과 ‘새로운 매체에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는 명제가 유미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사촌 오빠의 ‘보물섬’은 ‘오타쿠’, ‘너드’ 같은 새로운 언어로 ‘이해되지’만, 그것은 명백하게 ‘범죄’와 ‘폭력’을 낳았는데, 그렇다면 오빠는 나쁜 사람인가, 혹은 지금 자신을 따라다니는 남자는 나쁜 사람인가.

유미는 왜 그(들)을 이해해야 할까, 아니 왜 이해해줘야 하는 걸까.

새로운 매체에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이런 물음들이 유미를 괴롭히고 있고, 매우 흥미롭게 읽혔다.

또한 1970년 일본의 로봇 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주장한 “불쾌한 골짜기”의 단계는 이 소설의 핵심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

로봇이 인간을 닮아가면 이에 대한 인간의 호감은 계속 상승하다가 어느 순간, 로봇이 인간을 ‘너무’ 닮으면 언캐니해진다는 이론.

그러니까 일본 여배우의 사진을 도착적으로 무수히 검색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도촬하고 따라다니고 스토킹하는 남자들에게는 ‘바비’가 아니라 ‘바비의 분위기’가 필요하다는 것.

그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대상은 그럴 만한 상대, 즉 내가 원하는 외형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으면서 접근 가능한 여성이라는 섬뜩한 결론에 이 소설은 다다른다.

그것이 다시 유미의 논문으로 돌아오고, 사촌 오빠에 대한 기억으로 돌아가고.

일견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 어려운 이 소설의 장면들이 사실은 여성 혐오와 폭력의 문제로 아주 미묘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이어져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건 진짜 사족인데, 유미도 나오고 바비도 나오니 ‘유미의 세포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관련성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지만.

 

 

4. 윤고은, 물의 터널  ★★★

남은 두 편은 다 짧은 소설이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은 유년의 기억에 관한 소품 정도로 읽혔다.

오래 전에, 잊고 있었던 어떤 기억이 ‘퉁’하고 떨어지는 순간에 관한 소설이다.

“선영은 내 얘기를 듣더니 어떤 순간들은 잔열을 갖고 있어서, 물리적 시간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를 움직이는 건 의외로 아주 큰 에너지가 아니라, 그런 잔열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156쪽)

“그런데”라는 단어가 좀 어색하긴 하지만, 이 대목이 핵심일 것 같다.

2층에는 누가 있었던 것일까, 누가 있긴 했던 것일까.

 

 

5. 황정은, MANNING TREE  ★★★☆

황정은 특유의 ‘시그니처'(이 표현이 왠지 입에 붙는다)는 없는 소설.

그러나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같은 작품을 생각하면 이 작품도 황정은스러운 소설.

시력을 점차 잃어가는 인물(남녀 표지가 없다)이 “본래 여정”이 아닌, “반대 방향”에 가까운 여행을 가게 되는 이야기이다.

전체적으로는 일종의 ‘악몽’으로 읽힌다.

이제 35퍼센트의 시력만이 남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 ‘제임스 조이스’로의 여행이 일종의 예행연습이 아니었을까.

모든 것이 예측할 수 없게 되고, 우연이고,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삶이 될 테니까 그런 방식에 몸을 맡겨보는.

불확실해지는 감각에 대한 악몽으로 읽었는데, 짧아서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자명하게 나는 그것을 알았다”(172쪽)라는 마지막 문장이 주는 울림이 커서,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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