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음과모음, 201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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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이 여름호를 시작으로 복간됐다.

전통 문예지들이 속속 사라지는 와중에 어쨌든 내홍을 딛고 다시 펴내게 된 점은 축하할 일이다.

기존의 ‘자모’는 장르문학까지를 폭넓게 다루는 소설 잡지로서 정체성을 유지했다고 할 수 있는데 리셋한 자모는 시를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지면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소설만 다루는 메이저 잡지가 하나 정도 있었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지만, 이제 ‘악스트’ 같은 잡지도 있고 하니 종합 문예지로서 기반을 다지는 일도 새로운 출발로서는 괜찮아 보인다.

물론 그 많은 것들을 두루 감당하면서 의미 있는 지면이 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의욕적인 새 출발에 여러 아쉬운 점들이 눈에 띄지만, 특히 좀 의아한 것은 소설 지면의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휴간 직전 장르 문학 작가들을 대거 동원해 열 편 넘게 소설을 싣던 그때의 자모를 생각하면 힘을 좀 줬어도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런데 그건 아마도 이번에 실린 작품들이 대체로 실망스러워서일지도 모르겠다.

 

1. 안보윤, 여진  ★★★★

‘미니 픽션’이라는 이름의 짧은 소설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자모에 실린 작품 중 그마나 기억될 만한 유일한 소설.

지금 한국사회가, 한국의 작가들이 어떤 문제에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이를 둘러싼 피해와 가해의 관계가 형성될 때 그것과 연루되어 있는, 그 사이에 서 있는 사람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를 잘 들여다보면 이 세계의 단면이 보인다.

(정용준의 <눈구름>을 같이 읽을 만하다.)

그것이 꼭 2차 가해나 피해의 양상이 아니더라도, 특히 노인, 청소년, 여성 등 약자들이 마주하는 현실의 뿌리 깊은 혐오와 냉대는 끔찍하고 암담하다.

층간 소음으로 인해 위층의 노부부를 칼로 찔러 살해하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범인의 모습은 이제 전혀 놀랍지 않다.

여기는 아파트에 페인트칠을 하던 인부가 시끄럽게 한다고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 줄을 끊어버린 사람도 있는 곳이니까.

우리는 이런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얼마나 분노하고, 어떤 방식으로 관여해야 할까.

층간 소음, 분노 조절 장애, 아이들에 대한 시선(맘충), 맞벌이 부부의 육아, 치매와 고독과 싸우는 노년의 삶 등 한국 사회의 심각한 ‘지금’의 문제들이 소설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장점은 그런 시의성이나 현실의 반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겪은 소년과 소년의 누나를 그려내는 데 있다.

소년과 소년의 누나를 둘러싼 ‘어른들’과 ‘도도두두’ 놀이.

“여진”이라는 제목은 사건 이후의 여전히 남은 흔들림이라는 뜻도, 층간 소음에 대한 은유로도 읽히지만 무엇보다도 소년의 누나 이름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소년의 마음, 특히 누나를 바라보는 마음을 그리고 있다.

이제 완전히 삶의 다른 단계로 진입해버린 소년의 시선이 담담하게 슬퍼서 소설이 빛난다.

 

2. 금희, 이원혼(二元婚)  ★★☆

근미래에 변화한 사회에 관해 말하는 소설이다.

특히 일부일처제의 ‘일대일 결혼’이 거의 사라진 시대를 설정해 혼인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미래 사회라는 게 자동주행이나 로봇 등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이어서 전혀 신선하지가 않고, 전통적인 개념의 혼인이 사라진 시대에 여전히 일종의 ‘일대일’ 로맨스를 꿈꾸는 이 주인공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아마도 이 작가는 이제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을 떠나서 이야기를 구성해보고자 하는 듯 한데, 아쉽게도 자신이 가진 유일한 장점마저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3. 김은, 깃털  ★★☆

소설의 모든 설정이 너무 익숙하다.

물에 잠기는 재난, 버려진 공원의 관리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하는 격리된 곳, 깃털로 변한 아버지, 무기력한 인물들 등.

깃털과 더불어 이 소설이 그나마 인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소재가 비문증인데, 그마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것 같다.

불필요한 설명이나 묘사가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밖에 볼 수 없을 것 같다.

 

4. 임현, 유실  ★★★

누구도 연루되지 않은, 그저 쓸쓸하게 어서 사라져야 할 죽음을 처리하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

사체처리사? 무연고자살수습자? 죽음청소부?

시신과 온갖 생활폐기물들로 엉망이 된 고시원을 하룻밤 사이 말끔하게 청소해야 하는 이 남자가 그 ‘냄새’로 인해 끝내 아내와 아들을 잃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남자의 직업과 그가 가진 ‘관계’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가 어렵고, 무엇보다도 그가 ‘유실’한 것은 무엇인지 혹은 ‘유실’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모호하다.

짧은 소설이기는 하지만 임현 특유의 박력이나 날카로움도 찾기 어려웠다.

 

5. 민병훈, 서울-남작  ★★★☆

민병훈의 작품치고, 그나마 이해 가능한 수준인데다 의외로 유쾌하기까지 해서 재미있게 읽었다.

‘나’는 누구일까 혹은 무엇일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롭게 읽을 수는 있다.

서울이라는 공간과 남작이라는 인물의 행상이 만나 시공간의 겹침 같은 것을 자연스럽게 그려내는데, 모든 게 상상 같기도 하고, 핍진한 현실 같기도 하고, 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명하기 난감한 부분이 많고 역시나 ‘짧아서’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6. 김남숙, 여름의 무게  ★★★★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하고 있는 작가.

황정은과 김사과, 최진영의 뒤를 잇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데, 이번 소설은 조금 아쉽다.

이 작가 특유의 문장과 이미지가 곳곳에서 잠시 멈추게 만들기는 하는데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여자”의 출퇴근 길을, 이 짧은 소설에서 너무 많은 소재를 동원해 그려낸 게 아닌가 싶다.

아마도 이 작가는 장수하늘소, 짜장면 같은 새까만 이미지와 여름의 공원 같은 푸르른 밝음을 대비시켜 이 인물의 ‘무게’를 보여주려고 했던 거 같은데 그러기에 이 분량은 너무 짧다.

이 여자가 치과에서 입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쓰는 작은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비춰지자 화들짝 놀라 얼굴을 긁어대려다 그만두는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부디 계속 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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