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음과모음, 201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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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모 겨울호를 읽었다.

겨울호 중 1등으로 나온 거 같은데, 복간 후 굉장히 의욕적인 것 같다.

장르문학과의 소통이야 원래 자모의 특징이었지만, 시에 이어 정치사회적 담론도 흡수해 종합 문예지로 몸집을 키우고 있다.

이 몸집을 감당하기에 기획이 좀 힘에 부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결국 작품들이 얼마나 좋으냐에 따라 성패가 갈릴 테니 지켜봐야겠다.

아무튼 처음에는 소설 전문지로 남았으면 했는데, 지금의 자모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아쉽게도 시는 특별히 인상적인 것이 없었고, 소설은 6편이 실려 있다.

앞의 세 편은 일반적인 단편 소설이자 순문학의 작가가, 뒤의 세 편은 미니 픽션이자 장르 소설의 작가가 포진해 있다.

 

 

1. 손보미, 정류장  ★★★☆

열다섯에 학교 폭력의 가해자였던 ‘그’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미국의 누나 내외를 찾는 이야기.

‘그’의 내면을 찬찬히 그린 소설인데, ‘나’의 1인칭으로 쓰였다면 가해자의 변명 정도로 읽혔을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앞두고 있던 같은 가해자 ‘김’이 피해자였던 ‘윤’을 찾아 용서받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가, 결국 그 가해의 사실이 다니던 직장에 폭로되고 강제 휴직을 맞는 상황은 사실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심지어 좀 익숙한 구도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누나의 조카를 자신과 견주면서 ‘악의’ 혹은 ‘미움’에 관하여 서술해나가는 측면이나 그 동일시에서 벗어나 결말에서 일종의 깨달음을 보이는 장면이 특히 그렇다.

‘폭력’이나 ‘미움’의 기원은 어디에서 오는지, 특히 그것이 유년기의 경험일 때 ‘순수’하거나 ‘무지’하다고 변호할 수 있는지, 여러 질문을 던지는데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듯하다.

기존의 손보미가 보여주던, 불안의 감각과 파국의 전조 같은 것들은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지만 일종의 ‘막막함’ 같은 것들이 표현되는 지점은 그런 대로 인상적이다.

하지만 미국의 그 황량하고 거대한 풍경이나 지하철에서의 기억, 무대에 서야 하는 조카의 두려움 등이 공히 결말의 그 막막한 ‘울음’과 이어진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 얼마나 긴밀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정류장’이라는 제목은 ‘그’가 거쳐야 할 삶의 어떤 지점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하고, 늘 잠시 머물 뿐인 어떤 시공간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그’가 학교폭력의 가해자였던 열다섯의 시간도, 지금 겪어야 할 이 시간도 언제고 지나갈 것인데, 머무르고 있는 이 정류장이 분명히 지나갈 것이고 다음 정류장에 도달할 것임을 알면서도 너무도 막막한 심정이 이해될 것도 같다.

혹은, 이 정류장이 마지막 역일 수도 있지 않을까 고민할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계속해서 ‘모르겠다’, ‘알 수 없다’, ‘막막하다’ 등의 내면을 드러내는 이 가해자의 현재가 얼마나 반성에 가까워지는지도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2. 최은영, 손길  ★★★

최은영식의 서사가 어떤 식으로 형성되는지 이제 좀 예측이 된다고 할까.

(아마도) 22년 만에 촛불집회에서 우연히 만난 고모(정희)와 조카(혜인)가 하룻밤을 같이 보내는 이야기.

거기에는 늘 그렇듯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그리고 정치적 혹은 사회적으로 희생된 개인, 그리고 차별과 폭력과 멸시에 노출되어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누군가가 있다.

최은영의 소설이 주는 어쩔 수 없는 감동이 속수무책으로 몇몇 장면에서 느껴지긴 한다.

이를테면 삼촌과 혜인이 했던 마술을 터키에서 누군가의 마술로 다시 보고, 또 그 순간 마술 같은 일이 일어나는 그런.

그런데 이 감동을 위해, 혹은 이 이야기를 위해 인물들이 너무 고통스럽게 희생되는 것은 아닐까.

삼촌은, 남편은 꼭 그렇게 트럭에 치였어야 했나.

그리고 정희는 그렇게까지 고통스럽게 살았어야 했나.

혜인은 그렇게 오래도록 멀어져서 힘겹게 삶을 살아가야 했나.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 ‘해후’가 하룻밤만에 이 정도로 이루어지고, ‘방방’의 추억으로 결말이 제시되는 게 조금 간편한 해결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은영이 그려내는 ‘혜인’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어떤 조급함, 그러니까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면 안된다는 강박 때문에 오히려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태도에 대한 묘사라든가, 제목이기도 한 ‘손길’에 대한 묘사(p.61)는 따뜻하면서도 날카롭다.

 

3. 천희란, 피아노 룸  ★★★☆

‘죽음’에 대해 이토록 지속적으로 파고드는 작가가 새삼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곧 첫 소설집을 앞두고 있을 이 작가는 일관되게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아, 음악도)

사변적이거나 관념적으로 흐르지 않고, 서사의 전개와 밀접하게 이어지면서 이야기 자체의 매력을 잃지 않는 것이 이 작가의 장점인 것 같다.

한 사람의 삶 혹은 운명을 완전히 바꾸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인데, ‘고모’라는 인물과 ‘피아노 룸’으로 대표되는 그 공간이 무척 매력적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고모부의 죽음을 둘러싸고 오래도록 이어지는 ‘기억’의 문제, 끝에서야 밝혀지는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등은 긴장감을 잃지 않고 독자를 빨아들인다.

단 한 가지 불만은(한 가지이면서도 아주 큰 불만인데), 왜 이 이야기를 고모의 조카인 ‘나’에게 맡겼을까 하는 점이다.

고모와 나 사이에 형성된 일종의 유착 관계는 화자로서 충분한 자격이라 생각은 되지만 고모라는 인물이 겪었을 고통과 상처, 족쇄 같으면서도 결코 잡히지 않는 기억 등의 문제를 감당하기에는 ‘나’의 관찰이 좀 부족해 보인다.

다른 화자를 고려하거나 혹은 ‘나’가 조금 더 고모의 내면에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89쪽의 “내가 두려워하는 건 오직 나밖에 없단다. 그리고 내가 찾고자 하는 것도 내 자신일 뿐이야.”라는 문장은 좋았다.

이 문장에 다다라서야 나는 고모의 삶이 정말로 끔찍하게 느껴졌다.

 

4. 양원영, 혐오로봇  ★☆

이거 정말 심각한 소설인데,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인공지능의 로봇 이야기 뻔하지만 그렇다고 치고, 그 로봇이 인간을 학습해 ‘혐오’를 생존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학습했다고도 치자.

그런데 그 로봇의 혐오를 교정하기 위해 로봇 스스로가 혐오의 대상인 걸 주입시킨다니.

소설의 마지막에서 나는 아시아인이고 페미니스트이고 레즈비언이고 운운하는 것에서 정말 뜨악했다.

소수자를 혐오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소수자가 되어 봐야 한다는 식의 논리인데 이렇게 쓰시면서 아무렇지 않으셨습니까?

그나마 한 개 반의 별을 준 것은 이게 혹시 전략적으로 아이러니나 풍자의 기법인가 싶어서인데, 그럴 리가 있을까.

 

5. 지현상, 안녕, 내 사랑  ★★

장르 소설이 장르 문법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여전히 이런 ‘매트릭스’ 류의 가상현실 설정을 가지고 아무런 흥미도 주지 못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왜일까.

‘시뮬레이터’ 속의 연인과 현실의 연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이미 스스로도 시뮬레이터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됐을 때, 이 소설은 현실이라는 것이 언제든 가상이 될 수 있는 세계라는 SF의 ‘진리’ 말고 뭘 더 줄 수 있을까.

그 모든 것을 차치하더라도 일단 인물의 매력, 묘사의 깊이, 대화의 실감 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6. 곽재식, 녹조의 이끌림  ★★★☆

<문학3>에 실렸던 ‘멧돼지의 어깨 두드리기’와 비슷하게 읽었다.

기본적으로 위트 있는 글솜씨임은 분명한 것 같다.

‘녹조’라고 하면 당연히 4대강 운운 할 것 같았는데, 정말 ‘녹조’ 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여서 신선했다.

개인적으로 좋은 장르소설은 ‘이게 말이 돼?’하고 읽다가 ‘이럴 수도 있겠다’로 바뀌는데, 이 소설은 짧지만 그런 점에선 수긍이 갔다.

물론 훌륭한 장르소설은 그걸 넘어 ‘이게 핵심이고, 진실이다’의 차원까지 가겠지만, 그러기에 이 소설은 너무 짧다.

연구비 사용에 관해서 비목별로 제한을 겪는 장면의 디테일이나 녹조에 대한 오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모습이 생생해서 좋았다.

그리고 마무리에서 “2017년 선정릉에서”라고 써 놓는 바람에 굳이 왜 선정릉일까 이래저래 검색까지 하게 됐고, 그 능이 ‘시체 없는 무덤’이라는 걸 알게 됐다.

아 그렇게 상상할 수도 있겠구나, 녹조에 딸려 올라오는 그 유골들이 ‘역사’의 모습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하나의 에피소드 이상으로 여겨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조금 긴 호흡의 신작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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