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201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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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 겨울호를 읽었다.

특집란에 실린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글들이 공부가 많이 되었다.

뻔한 얘기 아닐까 했는데,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시는 좀 심드렁했고, 한강 작가의 뉴욕 타임즈 기고문 전문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도 문학동네소설상을 받은 황여정 작가의 <알제리의 유령들>이 궁금한데, 이래저래 아직 읽어보지 못해서 아쉽다.

문학동네는 작가상, 소설상, 대학소설상을 “소설상” 하나로 통일했는데, 장편 공모가 이제는 꽤 많아져서 지나친 수고로움이라고 판단한 게 아닌가 싶다.

‘대학생’만을 대상으로 한 공모는 늘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25세 이하’ 이런 것도 웃기고.

나이를 제한할 수 있다면 20세 미만 청소년 정도가 아닐까.

교내 문학상이 아니고서야 ‘대학생’ 대상의 문학상 공모는 어떤 의미도 찾기 힘들 것 같다.

‘대산대학문학상’ 같은 공모도 그냥 ‘대산문학상’으로 자유롭게 투고 받는 게 낫지 않을까.

아무튼 문학동네작가상/소설상도 별로 구분이 가지 않았으니 이런 통폐합은 잘 한 결정 같다.

소설을 읽자.

 

1. 박민정, 천사의 비밀  ★★★☆

‘나의 이력서’라는 형식을 고려하면 사실 좀 더 깊이 읽어낼 여지가 있는 작품인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딱지 떼고 한 편의 단편소설로 보자면 완성도가 좀 떨어지는 느낌도 든다.

폐쇄적인 집단으로부터 소문과 떠도는 말들로 끔찍하게 고통받는 ‘숙희 학생’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를 통해 혐오와 폭력, 관음과 호기심, 죄책감과 윤리 등 복잡한 문제들을 두루 고민하게 만드는데, 이런 건 이제 박민정의 세계라고 불러도 좋겠다.

어떤 사람에 대한 구체적이고 특징적인 실제 정보를 여럿 알고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의 페이스북 페이지나 트위터 계정을 들여다보지 못하면 그 내면을 추측하는 데 무척 난감함을 느끼는, 또 누구나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해 구글링이나 블로그를 참조하면서도 반대로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려고 자신의 SNS를 엿봤다면 마치 스토킹을 당한 듯한 공포와 분노를 느끼는 SNS 시대의 양가적인 감각을 잘 표현한 것 같다.

<바비의 분위기>의 전사 같다는 생각도 들고 이런 문제를 여전히 과감하고 자신 있게 써내는 것도 장점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아쉬운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우선 제목이다.

소설 속 성당 이야기 혹은 조카에 대한 생각 등으로 짐작하건대 천사의 비밀은 선의로 무장한 것 같지만 사실은 언제든 완벽하게 배제하고 외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속성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게 보면 그냥 단순하게 인간의 이중성 같은 것만 떠올라서 이 서사가 보여주는 복잡, 미묘, 혼란스러운 문제들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둘째로는 ‘나’가 소설가의 지위를 확실히 부여 받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비단 ‘나의 이력서’라는 타이틀 때문이 아니라 이 소설에서 ‘나’가 ‘숙희 학생’을 몰래 엿보고, 그에 관한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행위가 소설가의 소설 쓰기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고수정 심리학습상담센터’의 존재도 그렇고.

그러나 ‘나’를 소설가로 보고, 이걸 소설이라는 행위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로 보기에는 어느 정도의 자의식이 투영되었는지 섣불리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 확신만 가질 수 있다면 이 소설은, 아직은 거기까지 이야기하지 못하는 있는, “‘숙희 학생’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의 문제를 결국 고민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박민정은 지금, “내가 재구성한 ‘숙희’의 이야기를 다시 똑바로 바라보고 이제 나는 ‘숙희’의 이야기를 쓰겠다”고 다짐하는 중일 수도 있다.

 

2. 김희선, 웰컴 투 마이 월드  ★★★

‘꿈’과 ‘책’의 세계는 모든 소설가들의 근원이겠지만 김희선에게는 더욱 특별해 보인다.

<무한의 책>은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은데, ‘나의 이력서’로 실린 이 소설을 읽으면 김희선의 문학적 기원이 이것이구나,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일종의 문학적 입장문으로서의 의미를 제외한다면 서사의 완결성은 부족해 보인다.

물론 이 분량에서 이런 SF적 세계의 ‘구조’까지 해명하길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꿈이 사라진 세계, 비밀스러운 도서관의 존재 같은 소재는 좀 익숙한 편이어서 이 정도로는 새로운 감각을 주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1부와 2부를 또 나누기까지 해서 정보는 부족한 채로 방대해지기만 한 것도 같고.

딴 얘기지만 김솔이나 김희선의 경우를 보면, ‘낮’의 직장인 혹은 사회인의 현실에서 완전히 멀어지고 싶은 ‘밤’의 욕구가 상상력을 이렇게 밀고가는 힘이 아닐까 싶다(이공, 자연계열 전공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3. 공선옥, 염소 가족  ★★★☆

가을에 발표한 두 편의 소설과 약간은 질감이 달랐다.

도입부가 알쏭달쏭해서 오히려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60년대 정도의 ‘염소’ 키우던 고향에서의 유년기를 떠올리는 이 가족 구성원들의 이야기는 몇 차례 더 반복될 거 같긴 한데, 올드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결국엔 어쩔 수 없이 ‘한국적 리얼리즘’에 설득되는 지점이 있다.

이제는 다들 각자의 자리로 사라져버린 가족들의 이야기이고, 어떻게 보면 ‘말년의 서사’로도 읽을 수 있겠다.

 

4. 전경린, 합  ★★☆

도입부는 나쁘지 않았다.

자전거 사고로 이어지는 그 순간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문제의 ‘합’이 나타나고부터 소설이 이상해졌다.

뭐, 주인공 ‘소연’의 내면일 수도 있고 환상일 수도 있는데 그 ‘합’의 존재가 너무 손쉽게 설정되었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인물의 고독과 외로움을 부각시키기 위해 모든 상황과 인물이 난삽하게 동원되고 있는 느낌이다.

얼핏 이런 구도는 무라카미 하루키식으로 생각되기도 하는데, 그렇게 보면 환상적 존재, 감수성으로 무장한 중년 등의 형상화가 한참 부족해 보인다.

‘인우’나 ‘B’라는 인물도 ‘소연’의 외로움과 상실감 등을 드러내는 역할일 뿐,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것 같다.

 

5. 김엄지, 파지(把指)  ★★★★

전혀 특별하지 않은, 오히려 너무도 평범한 사건을 이토록 낯설게 묘사하는 것은 지금 김엄지가 최고인 것 같다.

현대문학 2017년 1월호에 실렸던 <분무>로부터 이 이야기들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 같고, 비슷한 감각으로 쓰이긴 했지만(김엄지야 늘 그러니까) 릿터 12월호에 실린 <목격>보다 이 소설이 더 좋았다.

 

모든 이야기는 8년 전에 ‘나’가 썼다는 각서로 소환되는데, 여러 가지로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남자가 여자를 때렸거나, 외도를 했거나, 심지어 성 불구이거나.

아무튼 장인, 장모가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썼다면, 그리고 이 소설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성적 묘사를 참고하면 단순한 부부싸움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 일로 인해 이 부부는 기괴한 의심과 집착을 반복하는데, ‘나’의 아내에 대한 의심을 순간순간 비웃는 아내의 ‘웃음’이 실로 공포스럽다.

이 소설은 부부 관계에 대한 지독한 농담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제목인 파지를 흔히 “꽉 잡혀 산다”는 의미로 읽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사전을 찾아 보니 주로 심리학에서 자주 쓰는 용어 같고, 어떤 경험이나 정보를 기억하고 저장하는 일련의 과정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나’의 각서가 아무래도 파지의 대상이 아닌가 싶다.

소설을 함께 읽은 여러 사람들의 말처럼 ‘공포’라는 감각과 ‘아내’와 ‘나’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이상(李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 보이기도 한다.

 

6. 정영수, 더 인간적인 말  ★★★☆

안락사를 선택하겠다고 선언하고 스위스로 떠나는 이모와 이를 지켜보는 이혼에 다다른 부부 ‘나’와 ‘해원’의 이야기.

삶을 정리하기로 결심한 ‘이모’가 자살이 아니라 ‘안락사’의 방식을 택해 죽음을 알리고 준비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흥미로웠다.

또 ‘이모’의 결심에 대단한 근거나 특별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그저 그러고 싶다라거나 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선언만 반복하는 것도 이 이야기를 죽음을 선택한다는 문제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에 집중하게 만든 것 같아 좋은 전략으로 생각됐다.

늘 세상의 중요한 문제들로 토론하던, 그게 결국은 싸움으로 귀결되고 만 ‘나’와 ‘해원’의 말들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실체와 관념 사이에서 그저 공허하게 떠다녔을 뿐, 그들이 마주한 ‘이모’의 선택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모’를 보내주고 또 기다리는 그 마지막 장면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더 인간적인 말”이라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를 고민하면서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는 그들이 가장 인간적인 모습일지 모른다.

아쉬운 점은 이모의 스페인에서의 경험, ‘백개먼’이라는 게임 등이 이 선택을 깊이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주사위를 굴리는 일은 당연히 신의 영역을 떠올리게 하고 운명과 우연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렇게 보면 이 이야기는 이모가 내 운명을 우연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확고한 용기와 결심을 증명하는 정도일 텐데, 좀 단순한 게 아닐까.

또 결국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결혼도 하지 않고, 당연히 자식도 없고 혼자서 키우던 고양이가 얼마 전에 죽은, ‘엄마’나 ‘누나’가 아니라 ‘이모’일 수밖에 없을까.

이 거리의 확보가 죽음을 선택하는 문제를, 또 그것이 과연 인간적인 일인지를 묻기 위해 작위적으로 설정되었음을 어쩔 수 없이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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