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음과모음, 201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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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모 봄호를 읽었다.

복간 후 이제 ‘종합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는 것 같다.

매 계절 키워드를 정하고 그에 대해 ‘비평’적 글을 싣는 일은 보통의 노고가 아닐 텐데 꾸준히 진행되고 있으며, 이번 호 ‘크리티카’에 실린 글들이 많은 공부가 되었다.

머리말로 미루어보건대 이 의욕적인 편집위원들은 또 새로운 지면의 형식을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여름호에는 그간 오래 쉬었던 공모 결과가 발표되기도 하니, 다음 호가 기대된다.

소설은 총 6편이 실려 있고, 뒤의 세 편은 ‘미니픽션’이며 장르소설가들의 작품이다.

이 방식은 자모가 꾸준히 밀고 있는 소설 지면의 형태인데 재고가 좀 필요하지 않나 싶다.

특히 짧은 소설의 지면을 장르소설에 할당하는 것은 어느 쪽도 득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아무튼 봄호 앞쪽에 실린 세 편의 소설들은 대체로 각각의 작가들이 가장 ‘잘 쓰는’ 서사를 택했는데,  모두 실망스러웠다.

 

1. 정용준, 나무들  ★★★

딱 정용준스러운 소설.

이 작가가 가진 문제의식은 정말로 꾸준하게 시종일관이구나 싶다.

몸과 육체성에 대한 관심이 폭력이나 죽음으로, 또 장애나 불구라는 형태로 자주 등장했었는데 이 소설에서는 ‘생동성 실험’이나 ‘731부대’ 같은 생체 실험의 문제와 함께 ‘나무’의 ‘동물성’을 강조하면서 몸에 일어나는 이상 증세 등으로 서사화 되고 있다.

또 이른바 피해자의 ‘연대’라고 할 수 있을 화해의 서사도 전개된다.

생동성 실험으로 동생을 잃은 신우정 피디와 눈물을 짜내는 다큐를 만드는 것에 회의를 느낀 카메라 감독 유진수, 그리고 나무의 소리를 듣게 된 ‘나’ 서이서 작가.

세 인물 모두가 고통과 상처를 안고 있고, 다큐 촬영을 위해 캘리포니아로 떠난 이후 서로의 다름은 늘 삐걱거린다.

그런데 이 인물들의 이해와 공감이 너무 쉽게 또 순식간에 일어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결말의 화해로 가기 위해 필요한 단계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아주 막막하게, 이를테면 상대방의 표정이나 분위기, 혹은 ‘나’의 잠깐의 사유와 깨달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문제이다.

최근에 정용준이 피해나 가해의 ‘입장’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르고, 그 간극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 의아하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작중 유진수의 말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뭔지 아세요? 생생하게. 삶을 두 개 붙이면 더 삶처럼 보이나? 사실은 꾸미지 않아도 사실인데. 사실을 더 사실처럼 보이게 노력해야 한다니. 과장하고…… 연출하고…… 진절머리 나요.(34쪽)”

그런데 바로 이 소설이 그런 방식으로 쓰인 것이 아닐까?

신피디가 다큐를 찍으러 떠나는 서사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여주는 서사적 방식이 일종의 ‘연출’에 가깝다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레드우드 숲을 묘사하는 것, 그 큰 나무들이 내려다보고 있는 장면은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그것이 ‘아름다움’이라는 말로 수렴되어 버리고, 그게 풀이 움직이는 ‘나’의 몸에 대한 감각으로 돌아올 때 ‘히페리온’의 부끄러움은 독자의 몫이 된다.

다음 소설인 박민정의 경우도 그렇지만 약간의 속도 조절 같은 게 필요하지 않나 싶다.

 

2. 박민정, 천국과 지옥은 사실이야  ★★★

젊은 선배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으로 향할 때만 해도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가 될 줄 몰랐다가, 다 읽고나면 이 이야기를 왜 이렇게 복잡하게 썼을까 싶은 소설.

이야기들이 조금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고, 장면 전환이 갑작스러운 편이어서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퍼즐이 맞춰지는데, 그 결과가 큰 의미를 갖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제는 박민정 특유의 서사 혹은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을, 민족(국가)-계급-젠더 겹쳐 놓기가 이 소설에서도 여전히 발휘된다.

필리핀 유학생인 레니와 그의 ‘크루들’, 그리고 레니와 연인인 유진과 나의 이야기이다.

여성에 대한 명백한 성적 폭력과 또 추행과 친밀감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듯한 기묘한 행동과 관계들에 대한 시선, 또 “청춘뽕”에 대한 것, 즉 (비유적으로) 스무살 대학생들의 치기 어린 열띤 ‘담론’이 서른살 이후의 ‘현실’을 마주할 때의 괴리가 곳곳에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결국 하려는 이야기가 “면 단위 출신은 이해 못 할” 자유롭고 과감한 관계나 행위에 대한 것이라면, 또 그래서 유진의 ‘질투’를 증명하기 위해, 즉 속되게 말해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한지에 대한 것이라면 이를 위해 ‘필중 선배’를 저런 식으로 죽이고 죄책감으로 유진의 내면을 귀결시켜도 되는 것일까.

이전의 박민정 소설에서 이런 복잡미묘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나’는 출판사 편집자이거나 대학원생이었는데, 이제는 소설가라는 직업을 달고 나온다.

코피노를 소재적으로 썼다고 합평을 들은 에피소드를 첨부해 놓고, 거기에 이런저런 ‘항변’을 기록해 두면, 이 소설 자체는 그런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런 문제에 대해 작가인 ‘나’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전달하는데, 불필요해 보인다.

소설가라는 인물, 혹은 소설 쓰기라는 소재가 문제를 푸는 직접적인 열쇠로 기능한다면 그것은 곧 작가 자신의 태도를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예술을 논하고 자유와 해방의 가치를 토론하며 죽음을 꿈꾸는 당신들도 그것이 너의 현실이 되면 그럴 수 없다는, 그러니까 소위 ‘인실좆’의 서사인데, 이번 이야기는 좀 실패한 것 같다.

성공적일 때의 박민정은 어떻게 이 큰 이야기부터 이렇게 세세한 경험까지를 연결지을까 감탄하게 되는데, 실패할 때의 박민정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갖다 붙이나 싶을 정도로 감당하기에 너무 많은, 또 큰 소재를 펼쳐 둔다.

이를테면 이 소설에서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는 ‘카톨릭’에 대한 서술들이 그러한데, 그것이 필리핀이라는 나라의 역사적 현실과 그 구성원들이 처해 있는 상황, 결국 ‘대지진’을 경유해 유진과 나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까지로 이어질 때 유진의 오열과 고백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은 공감과 납득이 어렵다.

 

3. 김멜라, 적어도 두 번  ★★★☆

신선했고 흥미롭게 읽혔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선생님을 ‘유파고’, 아빠를 ‘줄파추’, 엄마를 ‘루피쇼’ 등으로 표현하고(‘이테'(제자)는 고유명사일 수도 있겠다), 섹스를 ㅅㅅ, 자위를 지위로, 클리토리스를 클리토리우스 혹은 콩알이라 쓰면서 자위 행위를 ‘악수’라고 얘기하는 것들이 이 이야기를 따라가는 큰 동력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여성의 자위에 대해 완전히 개방적인 태도를 가진 한 레즈비언이 미성년자이자 시각 장애인인 여성 청소년을 추행하고, 경찰 조사를 받는 와중에 뜬금없이 현대 건축사 교수에게 이 일에 대한 ‘고백’을 전개하는 내용이다.

이 고백을 받는 ‘유파고’는 남성(아마도 중년) 교수이고, ‘나’는 레즈비언이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말하는 “은밀한 신뢰 관계”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유파고의 죽음’이라는 ‘생각’을 맞닥뜨리고 이 장황한 변명을 시작한 소설은 여러모로 임현의 <고두>를 떠오르게 한다.

‘형식’적으로도 그렇고 이야기의 소재나 서술자의 태도도 비슷한 면이 있다.

나로서는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설정이었다.

미성년자인 것도, 좋아하는 남학생과 데이트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직후임에도 ‘나’가 동성강간을 시도하는 것도 그래, 뭐 그럴 수 있다 치는데.

왜 ‘이테’는 시각장애인이어야 했을까.

자위라는 행위, 몸의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행위를 이야기하려면 하나의 감각이 상실된 누군가가 그것을 보여주기에 가장 효과적일 거라 생각했을 가능성이 커 보이고, 그렇다면 ‘맹인’이라는 설정은 그저 소재적으로 동원되었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나’가 보여주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불쌍해서 그랬다’는 변명이 (마치 <고두>의 그것처럼) 역겹고 불쾌한 순간이 있는데 마지막 장면을 ‘유파고’의 죽음, 즉 ‘나’ 역시 ‘유파고’이기도 하니까 스스로 삶을 마감하려는 것으로 읽는다면 나름의 완결성을 평가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작가는 자모로 등단해 작품 활동이 그리 활발하지는 않은데, 몇 년 전 <호르몬을 춰줘요>라는 제목으로 “부신성기증후군”이라는 소재를 통해 <성별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한 “여자지만, 남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없”는 열셋의 아이가 로또 같은 자신의 운명을 찢어 버리는 과감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어쨌든 작가가 가진 관심사가 무척 분명해 보이고 나름의 독특한 시선과 매력이 있는 것 같다.

 

4. 이종호, 어떤 죽음  ★★

눈을 떠 보니 몸을 움직일 수 없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이미 이 소설은 끝났다고 봐야겠다.

나름의 반전과 해결이 당연히 있지만 식상하고, 기억과 죽음의 문제라면 조금 더 고민했어야 하지 않을까.

 

5. 김종일, 접촉  ★★

일단 문장이 난삽하다.

‘서영’, ‘그녀’로 혼동되다가 주어가 없다가 또 완전히 내면으로 들어갔다가 관찰했다가.

사고를 일으킨 ‘서영’이 부재중 전화나 문자를 확인하는 장면만이 인상적이었고, 극단적인 결말은 뜨악하다.

 

6. 조예은, 도롱뇽 키우기  ★★☆

미니픽션 쪽에서는 그마나 나았다.

아마도 악어(?)를 상정한 듯한 ‘토리’라는 존재가 나름의 흥미가 있었지만 한 번 쉬고 17년 뒤로 이동하는 순간, 그 버스 안의 광경에서 이미 결말은 예측되는 소품 정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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