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문학, 201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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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문학> 봄호를 읽었다.

제일 첫 페이지에 실린 김이강의 <기우>라는 시가 너무 좋아서 다른 시들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특집란에서 ‘질병’과 ‘정신분석’을 키워드로 잡아 쓰인 글들은 대체로 공부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지금껏 읽은 봄호의 소설이 거의 실망스러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21세기문학>에 실린 소설들은 신구의 조화(?)나 작품의 수준에서 무척 만족스러웠다.

 

1. 김봉곤, 시절과 기분  ★★★★☆

뭐 별로 다른 말이 필요없을 것 같다.

이런 청춘소설의 전형이랄까, 로맨스는 지금 김봉곤이 가장 잘 쓴다.

첫 소설집을 출간한 게이 작가가 그 책을 서점에서 발견한 옛 ‘이성’ 연인을 만나러 가는 이야기.

실제로 첫 책을 앞두고 있는 작가의 입장에서 이런 설정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상상의 자리가 있었을 것 같다.

말 그대로 그 ‘시절’과 그 ‘기분’ 사이에서 여전히 흔들리고 서성이는 ‘나’를 너무도 매력적으로 그리고 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이 소설은 인물의 형상화나 사건의 전개 등 소설의 형식적인 차원에서 무척 성공적이라고 여겨지는데, ‘해준’ 같이 그 불안함마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도 물론이지만 역시 ‘혜인’이야말로 빼놓을 수가 없겠다.

“니 꼬치다 개자슥아”라고 말하면서 펑펑 울어버리는 어떤 경상도 여성의 전형을 나는 몇몇 알고 있는데, 이 소설은 그런 인물을 그야말로 극사실주의로 그려넣고 있다.

그런 혜인은 ‘나’를 재회한 지금,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혜인’이 서점에서 책을 들춰보지 않았을 리 없고 혹은 이미 다른 경로를 통해 ‘나’의 정체성을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지금 ‘혜인’은 ‘나’로부터의 고백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기다리면서, 또 동시에 자기 스스로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라 보이는데 설렘과 근심이 공존하는 이런 종류의 긴장감은 퀴어 서사만이 줄 수 있는 게 아닐까.

소설의 말미에서 다시금 ‘나’를 담담히 추스리고 천천히 지금의 ‘나’로 돌아가는 과정은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한데, 다시 ‘혜인’을 만나게 된다면 이제 ‘나’의 입으로 그 고백을 기다리고 있을 ‘혜인’에게 지금의 ‘나’를 말하고, ‘혜인’이 “우와, 니 장난 아이네. 딱 가까이 오지 마래이.”라면서 그 특유의 새침함과 타박 속으로 또 한 시절이 열리기를.

아마 ‘혜인’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2. 남궁지혜, 미쓰 미 미쓰 미  ★★★★

최근 등단한 작가 중 가장 주목을 받는 것 같다.

등단작을 읽었을 때도, 또 지금 이 작품을 읽었을 때도 여전히 황정은 이래의 계보에 위치한다는 생각은 같지만 1996년생 작가의 아직은 정확히 알 수 없는 새로운 감각이 있다.

제일의류공장에서 일하다가 훌쩍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난 ‘온영’과 ‘재선’의 이야기.

늘 까닭없이 눈물을 흘리던 ‘온영’이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그 옆을 지키던 ‘재선’이 누군가에게 메일을 보내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1999년 광화문에서 있었던 엄체(掩涕) 시위가 이 이야기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그때 그곳에서 양파를 눈에 비벼가며 눈물을 흘렸다던 시위는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지만 그 자체로, ‘단편적인 우울’이 생의 동력이자,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온영’ 같은 인물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기에는 무척 훌륭한 소재라고 생각된다.

우는 사람에게 왜 우냐고 묻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내버려두라고 말하는 나를 내버려두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게 공존하고 있다.

공장에서 열악하고 불합리한 현실을 마주했을 이 인물들은 그런 현실을 감내하고, 평범하게 보통의 하루를 숨죽여 살아가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보자는 ‘당신’에게 왜 그래야 되냐고 묻고 있다.

억지로 눈물을 짜내야 했던 1999년과 눈물이 이유없이 흘러대는 2018년을 대비시키는 일종의 세대론적 감각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 이야기를 일종의 노동소설로 읽고, ‘그때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라는 문장에서 후일담적 감각을 건져낸다면 정말로 촌스러운 독법이 될 것 같다.

외로움은 일상적이고 또 그래서 견딜 수 있지만 소외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 누군가가 나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에는 울면서 춤을 출 수밖에 없다는 것.

이 작가가 써낸 고통과 소외는 좀 막연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도무지 선명해지지 않는 이 절망과 허무를 이런 방식이 아니라면 어떻게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3. 심아진, 레슬링  ★★★

이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아마도 2014년쯤 <따귀를 낳았고>라는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따귀’가 서술자이자 주인공이었던 그 소설은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을 정도로 신선하게 읽혔는데, 이 소설은 그런 지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소재는 사실 얼마나 익숙한가.

이제는 유행이 지나가버린 스포츠 장르로서의 프로레슬링.

그리고 그 속에서 여전히 연기를 하고 있는 레슬러들.

마치 박민규가 10년 전쯤에 쓴 소설을 보는 것 같다.(무도인들의 현실적 무감각을 보여준 <절> 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테일이 꽤 살아 있는 편이고, 의외로 라운드가 진행될수록 뒷 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박진감 있는 전개와 반전도 그럭저럭 괜찮았고.

그런데 결국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사람이 뭣으로 사는지가 중하나? 뭣으로든 살기만 하믄 되지!”인 것은 올드하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사실 불분명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마치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된 것처럼, 그 세계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어떤 선택도 가능하다는 것일까? 아니면 결국 ‘돈’이라는 것일까.

 

4. 정찬, 양의 얼굴  ★★★

최근 발표한 일련의 작품들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 같다.

새의 이미지, 죽음, 대자연이나 신화적 모티프 등과 한국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연결시키는.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가 ‘킴’의 죽음으로 나타나고 있고, 이를 외국인 노동자의 시선에서 지켜보면서 한국의 열악한 노동 현실을 드러낸다.

‘킴’의 죽음으로 시작해 다시 ‘킴’의 장례식장으로 이야기가 열고 닫히는 것은 나쁘지 않았고, 몇몇 장면들에서 특유의 깊이가 느껴지는 것은 좋았으나.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즉 한국의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몽골 초원의 게르에서부터 이 인물의 가족을 모두 희생시켜가면서 끝내 이토록 전락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노동자 개개인을 그저 ‘양’이라는, 순하고 착한 이미지이면서 또 동시에 희생양으로 제시하는 것도 썩 좋은 방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도식적이고 작위적이라는 생각도 떨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최근작들이 나름의 일관성이 있고 어떤 순간에는 서사적 밀도가 무척 높아지는 순간이 있어서 이 단편들이 모인다면 하나의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5. 최은영, 아치디에서  ★★★☆

최은영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중편 정도의 분량에 이미 지나가버린 어떤 세월을 회상하면서 그 관계와 감정의 깊이를 차분하게 짚어나가는.

이 말은 즉 이런 방식의 이야기가 이제 좀 익숙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국이 배경이거나 외국인이 등장해 서로 이해의 간극을 좁혀나가는 방식이 거의 대부분이 최은영 소설에 등장하지 않나 싶은데,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설정인지 이제 잘 모르겠다.

최근작인 <손길>에서도 최은영은 재회한 두 인물의 화해와 이해의 가능성을 ‘터키’에서의 마술 장면으로 묘사하곤 했는데 그런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떻게 보면 좀 쉬운 방식으로 서사를 전개하는 것이 아닐까.

다만 이 소설은 아예 브라질 출신의 ‘랄도’가 서술자가 되어 이끌어가고 있으므로 조금 다른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일랜드의 ‘아치디’에서 몇 개월의 시간을 같이 보낸 ‘나(랄도)’와 ‘하민’의 이야기는 그간의 최은영 서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한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또 가족과의 관계에서 ‘나’를 잃어가던 ‘하민’이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탈조선’하여 아일랜드로 와 있다는 것도 썩 설득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돋보였던 것은 서두에서 보이는 젠더의 문제, ‘하민’을 통해 보여지는 인종의 문제 같은 것이었는데, 그런 여러 가지 문제들도 이 두 인물의 속절없이 출렁이는 감정에 그냥 묻혀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또 ‘랄도’라는 인물이 너무 ‘한국적’으로 읽히는 것도 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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