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201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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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사 가을호를 읽었다.

최인훈 작가 부고에 따른 여러 글이 실려 있는데(이건 다른 문예지도 거의 마찬가지), 대체로 원로나 중견의 문인들의 작가, 작품론, 추도사 등이다.

최인훈이나 이청준 같은 작가는 훨씬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는데, 향후 젊은 독자, 작가, 비평가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조명해 보는 기획은 어떨까 싶다. 이청준 10주기에 실린 이소연의 글처럼. (이청준 10주기 특집은 <쓺>에서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소설 쪽 리뷰는 김금희, 정용준, 이기호의 작품을 다루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뚜렷한 ‘단점’ 혹은 ‘한계’를 느꼈던 작품들이라 긴 상찬이 좀 버거웠다.

하이픈에 실린 젊은 시인, 작가론은 두루두루 좋은 참고가 될 것 같다.

시에서는 김승일, 백은선이 좋았고, 특히 백은선의 <비천의 형식>은 최근 읽은 시들 중 가장 좋았다.

편집위원 중 황예인, 금정연 평론가가 빠지고, 김형중 평론가가 다시 합류했다.

이렇게 되면 또 다시 확고한 ‘문지’ 체제로 가는 게 아닌가 싶은데, 당장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소설은 4편이 실려 있다.

 

 

1. 윤대녕, 누가 고양이를 죽였나  ★★

윤대녕의 ‘감각’이 많이 떨어졌다는 것을 느낀다.

여성의 연대를 보여주는 서사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 자체는 작가 개인에게 무척 어려운 시도였으리라 생각되지만 확실히 여성 인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게 눈에 보인다.

‘희숙’과 ‘성희’라는 중년 여성 인물은 남편이나 가족(아버지)과의 관계에서 고통과 상처를 안고 있다.

범박하게 말하면 그들의 상처는 남성으로부터 온 것이며, 그 치유와 연대는 여성끼리만 가능하다는 방식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희숙’은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인물인데, 이 인물을 다시 한 번 성폭행을 겪게 만드는 것은 불필요한 장면이다.

두 인물이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결말에서 다소 이상한 낙관으로 마무리되는 것이(그것이 설령 비극의 전조라고 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누가 고양이를 죽였나’라는 질문은 사실 별로 의미가 없게 된다.

이 인물들의 이야기 안에 미스테리하고, 또 불안한 분위기를 동시에 풍기기 위한 장치였을 텐데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

이런 생각도 든다.

보통의 메이저 문예지에서는 약 4편 내외의 단편을 싣고, 세대별로 청탁을 안배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중년 작가(특히 남성)의 지분이 꼭 확보된다.

그 분들은 이제 문예지의 단편 지면 없이도 별로 걱정이 없어 보이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애매하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윤대녕, 성석제, 최수철, 정찬, 이승우 같은 작가들은 너무 자주 보인다. (동년배의 여성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소설을 못쓴다기보다 문예지의 단편 지면에서 마주했을 때 ‘기대’가 크지 않은 게 사실이다.

모르긴 모르지만 ‘생계’도 별로 걱정없을 테니, 이제 다른 작가들에게 자리를 좀 내줘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 작가들이 소설을 실어달라고 부탁할 리는 만무하고(그럴 수도… 있을까?), 결국은 ‘청탁’이 가기 때문일 텐데, 문예지 편집위원들이 좀 고민했으면 좋겠다.

중견의 작가답게, 각자의 작업에 몰두하는 모습이 필요할 것 같다.

만약 그렇게 작업된 결과물이 나온다면, 어느 정도 기대도 된다.

 

2. 조해진, 환한 나무 꼭대기  ★★★

조해진 특유의 정서가 깊이 배어 있고, 나름대로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기대에 비해 좀 실망스러웠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작위적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을, 우연성에 많이 기대고 있다는 느낌 때문인 것 같다.

특히 탈영병과의 조우가 이야기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느낌이다.

친하지는 않았던 대학동기 ‘혜원’과 ‘강희’의 이야기이고, ‘강희’가 ‘혜원’의 간병인으로 있으면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그 이후 ‘혜원’이 증여한 시골의 아파트로 이주하는 이야기까지를 담고 있다.

‘강희’가 삶에서 “깊은 허무”를 느끼고 출가한 일,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삶, 시골 아파트에서의 일상 같은 것들이 유려한 문장으로 그려지기는 하는데.

그 ‘출가’라는 모티프를 ‘탈영’과 연결시키는 것이 아무래도 좀 도식적으로 느껴진다.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방식과 목적의 ‘탈출’이라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힐 지점도 있긴 하다.

그러나 ‘혜원’의 아들의 이야기와 겹쳐지고, 탈영병의 실체조차 의심스러워질 때 동원된 소재로 여겨지는 부분이 크다.

절, 속세, 직장인, 간병인 등을 거쳐 ‘강희’가 이 삶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에 대한 집중이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버스 정류장’의 풍경, 즉 제목이기도 한 ‘환한 나무 꼭대기’가 보이는 그 장면이 눈에 보일 듯 아름다웠다.

 

3. 한정현, 괴수 아키코  ★★★☆

등단 후 활발하게 쓰지는 못했는데, 최근 다시 힘을 내는 것 같다.

이 소설은 1970-80년대로 논문과 소설을 쓰는 ‘나’가 그 시대의 문화사적 연구자 ‘그’를 인터뷰하면서 시작된 이야기이다.

거의 역순이라고 할 만한 시간적 진행에 서술자의 위치가 후반부에야 명확해져서 사실 좀 난삽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문장도 조금씩 거칠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단점으로 느껴지지 않고 묘한 매력으로 생각될 때가 많았다.

결국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 ‘김추자’와 관련된 1970년을 전후한 시대적 분위기 같은 것들은 ‘나’로부터 재구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결국 무척 애매하고 모호한 상태로 남는데, 확실한 것은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다.

‘사랑’이라고 말해도 될지는 여전히 고민이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그 ‘감정’임은 분명해 보인다(성별이나 나이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다).

이 텍스트 자체가 ‘개인’에서 ‘시대’로의 확장으로도 보이고, 그것이 곧 매력적인 소설의 형식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나’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고도 할 수 있지만, 정말 어쩔 수 없이 정지돈의 소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데, 최근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와 같은 작품에서처럼, 정지돈이 사용하는 ‘인용’의 방식과 서사의 구성이 좀 더 매력적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4. 한유주, 낯선 장소에 세 사람이  ★★★☆

최근 한유주의 행보의 열쇠가 되는 소설인 것 같다.

그 계속되는 ‘개의 짖음’에 ‘너’의 죽음이 있었다는 것.

이럴 때 소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또 어떤 방식의 소설이 가능한지 한유주는 여전히 썼다 지우고 있다.

실재이면서 환상이고, 환상이면서 실재인, 혹은 그 둘의 틈새 같은 곳을 찾아 한유주의 문장은 떠난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흥미롭게 읽었지만 결국 이 소설이 한 편의 구분된 (짧은)단편이라고 했을 때, 얼마나 자족적일 수 있을까, 생각하면 갸우뚱하게 된다.

마무리도 좀 갑작스러운 듯해서, 좀 더 길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고.

단행본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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