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2018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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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겨울호를 읽었다.

편집위원이 바뀌었고(그 분은 합당한 대가를 치루기를 바라고) 아직은 특별한 변화가 없지만 100호가 가까워지고 있으므로 새로운 활력을 모색할 듯하다.

김윤식 선생의 계간평은 이제 볼 수 없게 되었고, 최인훈, 황현산, 허수경에 대한 추모란이 있다.

기존의 문학동네 소설 공모를 모두 합친(대학소설상, 소설상, 작가상) ‘문학동네소설상’은 수상작을 내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논의되었던 작품은 심사평으로 미루어보건대 아마도 천명관의 <고래> 비슷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은데, 이제 이런 작품에서 ‘젠더적 고민’이 발견되지 않으면 선뜻 손을 내밀기가 어려워진 분위기가 된 것 같다.

당연한 변화라고 여겨지고, 심사위원의 판단도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제일 눈길에 갔던 것은 “표현할 수 있는 것과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특집>이었다.

문사 겨울호 하이픈의 주제도 ‘재현’인데 같이 놓고 읽으니 더욱 흥미로웠다.

이제 지금의 소설가들은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까.

강영숙 작가는 소설에서의 윤리는 창작의 단계가 아니라 “독자라는 타자가 텍스트를 읽는 순간”에 발생한다고 썼는데, ‘쌍용’에 관한 김성중 작가의 글, ‘친족 성폭력’에 관한 최은미 작가의 글을 읽으면 꼭 그런 것도 아닌 거 같다.

어떤 이야기는 결국 완성시키지 못한다는 것, 또 아주 개인적인 메모에조차 쓸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는 고백은 ‘나’의 소설 시대인 지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시 지면은 아직 시집을 내지 않는 신인들로 채웠는데, 그래서인지 대체로 좋았다.

어느 것 하나 빼 놓기가 힘들 정도로 각각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소설은 총 여섯 편이 실려 있다.

 

1. 박상영, 늦은 우기의 바캉스  ★★★★

이번 호 작가 <조명>은 박상영이고, 따라서 ‘나의 이력서’라는 이름으로 작품이 실려 있다.

박상영의 소설은 이미 ‘나’를 겹쳐 읽는 방식이 익숙하기 때문에 ‘나의 이력서’라는 지면이 줄 수 있는 색다른 즐거움은 크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어떤 부분들은 작가로 하여금 ‘무엇이 글을 쓰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 같아서 여러 번 곱씹을 지점이 있었다.

‘규호’와 헤어지고 난 후 데이팅 앱을 통해 매칭된 ‘하비비’를 만나며 여전히 ‘규호’의 흔적을 더듬는 이야기이다.

이 ‘규호’라는 인물은 박상영 소설에서 좀 특별하다고 느껴지는데, 그것이 단지 ‘나’가 ‘규호’를 여러 방식으로 소설의 인물로 등장시킨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거의 최초로 만남과 헤어짐에 관해 별다른 설명이 없는, ‘하비비’나 이전 박상영 소설의 인물들이 서로를 애정하되 스스로를 착취하고 소모해가던 방식과 달리 ‘순수한’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박상영의 소설이 그간 삶과 사랑의 희비극적 버무림에 가까웠다면, 이 소설은 말 그대로 퀴어 로맨스로 느껴진다.

물론 이 로맨스는 헤어짐 이후이므로 무척 슬프고, 또 소설가인 ‘나’는 ‘규호’를 쓰면 쓸수록 더 외로워지지만 ‘나’와 ‘규호’가 방콕의 강 위에서 폭우를 만나고 급기야 도로에 누워 쏟아지는 비를 맞는 장면은 ‘하비비’가 권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꽃놀이 따위와 비교될 것이 아니다.

다만 확실히 박상영의 매력은 어느 정도 볼륨이 있을 때 더 큰 것 같고, 이 구도, 그러니까 전 애인과의 추억이 있는 곳을 다른 사람과 다시 경험하고, 또 회상하는 방식은 아무래도 익숙하다.

‘규호’는 이름은 사랑, 존재, 소설 같은 것과 동의어로 여겨지는데, 어찌 되었든 쓴다는 것, 다른 모든 문장을 지우고 마지막에 남는 이름이 있다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특별하지는 않지만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덧붙여 이 작가는 본인의 ‘이름’에 대한 표지를 자주 심고, 여기에서는 “높은 곳에서 빛나다” 같은 뜻으로 암시하는데, 왠지 실제로는 전혀 다른 한자일 것 같다.

 

 

2. 이승우, 하갈의 노래  ★★★☆

문학동네는 작품을 등단 순으로 싣기 때문에 앞자리에는 이렇게 중견 남성 작가가 보통 위치한다.

일전에 이승우 등의 작가는 청탁이 너무 자주 간다고 쓴 일이 있는데,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의 작업을 염두에 두면 당분간은 자주 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계속 이어지는 성경 다시 쓰기의 작업이고, 아마 내 기억으로는 첫 작품이 소돔과 고모라에 관한 것, 두 번째가 아브라함과 이삭에 관한 것이었으며, 이번 작품은 하갈과 이스마엘에 관한 것이다.

사실 개별적인 단편으로서의 가치는 그다지 높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승우가 아니라면 수행하기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해석학적 글쓰기 방식의 소설이 주는 나름의 쾌감이 분명히 있다.

‘신’이 아니라 ‘인간’의 텍스트로 다시 써보겠다는 의지도 충분히 알겠고.

그러나 이 작가가 마주하는 난감함이 작품에서 분명하게 느껴지는데, 그것은 여성 인물일 때 발생한다.

주인인 사라의 청에 의해 아브라함의 아이를 낳게 된 시녀 하갈이 신의 목소리를 듣기까지 경험하는 일련의 일들은 작가를 통해 사유의 진전과 깊이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별로 그렇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은 불필요한 문장의 연쇄로 드러나는데 이를테면,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있고, 애써도 안 되는 것이 있다. 어떤 결과는 다만 주어질 뿐이다. 어떤 능력은 그저 은혜로 베풀어질 뿐이다. (…) 행한 자는 내세울 것이 없고, 행하지 않은 자는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가 한 것도 그가 한 것이 아니고 그가 하지 않은 것도 그가 하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49쪽)와 같은 서술의 연속은 좀 답답하다.

그래도 다음 소설은 어떤 이야기를 다시 쓸지 궁금하기는 하다.

 

 

3. 윤성희, 어느 밤  ★★★★☆

이번에 실린 소설 중 가장 좋게 읽었다.

그리고 가장 짧은 소설이면서 가장 풍부한 소설이다.

최근에 읽은 윤성희의 몇몇 단편들은 사실 좀 심드렁했다. (중편 <첫 문장>을 제외하고)

그런데 이 소설은 그간 윤성희 작품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아 보인다.

늘 그렇듯 ‘나’라는 인간이 가족이라는 피붙이들에 둘러싸여 살아온 이야기이고, 주인공은 가족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중년 여성이다.

윤성희 작가의 인물은 다양한 성별과 세대를 아우르는 편인데, 이처럼 중년의 여성이, 윤성희 특유의 디테일과 리듬으로 형상화 된다면 설득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킥보드를 훔치는 장면으로 시작해 바로 남편의 작은아버지를 뵈러 가는 이야기로 옮겨가고, 다시 킥보드를 타는 장면으로 돌아오는 도입부 하루의 이야기는 그 전환의 이음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사실 이 소설의 모든 장면이 그렇다.

‘나’의 아버지와 엄마, 동생의 이야기와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딸을 키우며 살아온 이야기, 그리고 딸은 떠나버렸고, 남편은 증오하게 된 현재까지, 능수능란하게 모든 걸 보여준다.

아버지의 죽음(임)에 연루된 ‘나’, 다정한 남자에 대한 기묘한 집착을 보이는 ‘나’, 여학생이 성폭행을 당하고 자살한 곳의 경비원이었던 남편이 자신의 억울함만을 토로할 때 그 여학생의 납골당을 찾아가는 ‘나’, 이 모두는 남성으로부터 여성은 도대체 어떻게 삶은 견디는지, 그러니까 속에서 열불, 천불이 날 때 어떻게 식혀야 하는지를 묻게 한다.

‘나’가 킥보드를 훔쳐 동네를 도는 것은 그 때문인데, 그러다 넘어져 꼬꾸라져 소설의 말미에서 만나게 되는 ‘청년’은 좀 작위적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또 ‘얼음땡’ 이야기도 어디선가 본 듯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서는 ‘얼음’이 되고픈 순간이 있고, 또 언젠가는 누군가 ‘땡’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들이 오래 남아 있을 것 같다.

 

 

4. 홍희정, 모든 아이들은 괜찮다 ★★★☆

생명을 낳고 엄마가 되어 아이를 기른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일인지, 그것이 얼마나 막막하고 두렵고 고통스러운 시간인지 보여주는 소설.

독일인 남편과 이혼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아들 ‘남준’을 홀로 키우는 ‘세이’와 이제 막 ‘하임’이라는 딸을 키우기 시작한 ‘나(테이)’의 이야기.

여러 디테일이 좋은 편인데, ‘세이’의 아버지이자 ‘나’의 ‘외삼촌’이 정확히 어떤 문제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단순히 출산과 육아에 대한 딸과의 갈등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아무튼 전체적으로 보면 왜 괜찮던 모든 아이들은 안 괜찮은 어른이 되는 걸까라는 주제로 읽히기도 했다.

특히 ‘할머니’가 “아직 자식이 니 아빠 하나였을 때” 강가로 나가 아이를 나무에 묶어 놓고 수영을 하는 장면은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그때 나무에 묶여 엄마에게 “도딤해, 도딤해”하고 소리치며 울던 그 아이는 왜 “인간이란 종은 보살펴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 그러니까 애들한테 아이를 더 낳아라고 해야 돼”라는 말을 하는 어른이 되었을까.

이 소설도 마지막 장면은 윤성희의 ‘청년’처럼, ‘남준’이라는 조카의 등장으로 마무리되는데 역시나 조금 손쉬운 봉합 같았다.

소설의 메시지를 수렴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의 결말을 고려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5. 정용준, 사라지는 것들 ★★★

이제 그만 살기로 했다는 ‘엄마’의 선언 이후 터져나오는 묵은 갈등 속에 휘말리는 아들인 ‘나’의 이야기.

왜 ‘엄마’가 삶의 의지를 놓아버리는지는 천천히 설명되는데, 핵심은 ‘나’의 둘째딸 ‘지인’의 죽음이다.

세 살의 나이에 아파트 어린이집 차에 치어 죽은, 할머니가 돌보고 있던 그 아이.

사건 이후로 ‘엄마’는 자살을 시도하고, ‘나’는 아내와 이혼하였으며, 첫째딸 ‘해인’과도 꽤 멀어진 상태이다.

이 비극적 사건의 몇 년 이후를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아쉽게도 인물들의 고통을 적실하게 드러내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 같다.

‘나’가 현재 처한 직업적 상황을 보여주는 도입부나 ‘엄마’와의 강화도행 같은 것들이 별로 서사적 긴장감을 주지 못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다 읽고나면 결과적으로 ‘나’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남는다.

그것은 ‘나’의 고통과 상처가 깊이 있게 다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고, 소설의 서술자이자 관찰자의 역할만 수행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엄마’가 둘째 아들 ‘진수’가 사는 일본을 방문한 이야기를 ‘그녀’로 시작하는 상상의 한 단락으로 채우고 있는데, 그것이 ‘나’의 역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지 않을까.

언니네이발관의 가사, “두려워하는 건 반드시 찾아와. 이제야 모든 걸 알겠냐고 묻곤 하지”를 인용한 부분은 좋았다.

 

 

6. 최정나, 말 좀 끊지 말아줄래?  ★★★★

누구와도 같이 않은 독특한 소설을 쓴다, 정말로.

젊은작가상을 받았던 <한밤의 손님들>도 그랬지만 약간 부조리극이나 블랙코미디 같은 서사가 인상적이다.

제한된 공간에서 인물들 간의 대화로 이루어지는 전개는 확실히 연극적이다.

또 일상적인 공간과 상황을 아주 살짝 비틀어, 그러니까 이름을 바꾼다든가, 대화의 양상을 기묘하게 쓴다든가, 이상한 순간을 재현하는 등의 방식으로 무척 소설을 낯설게 만든다.

장례식장에서 조문을 하는 장면, 화환을 놓은 장면, 신발을 정리하는 장면, 식사를 하는 장면, 담배를 태우는 장면 같은 것들이 하나같이 요상한 방식으로 재현된다.

이상한 별의별 대화들이 마구잡이로 이어지는데 일견 단순한 듯하지만, 아주 효과적으로 비튼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 소설은 결국 이씨, 우씨, 조씨 등이 장례식장에 갇혀버린 이야기 같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아주 이상한 일상을 영위하는 우리의 세계가 거대한 장례식장이라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 작가가 다음 소설은 또 어떻게 쓸지 무척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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