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xt, 2018.11-12 / Littor, 2018.12-2019.1

<악스트>와 <릿터>의 소설을 읽었다.

단편의 경우 요즘은 대체로 두 편씩 실리는 것 같고, 또 대체로 좋은 작품일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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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이설, 미아 ★★★☆

우울증에 관한 디테일이 돋보이는 소설.

문진표를 제시한다든지, 각종 최신 우울증 관련 레퍼런스를 활용한 것은 나쁘지 않았는데 우울증이라는 것이 그냥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처방과 치료가 필요한 ‘질병’임을 보여주는 전개 자체는 특별히 새롭지는 않았다.

인용이 적절해 보이기는 하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혹은 실험적으로 해봤다면 어땠을까 싶고.

우울증을 의심해 봤거나 실제로 겪었던 사람이라면 꽤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을 것도 같다.

요컨대 ‘우울증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울증이란 무엇인가’라고 부제를 붙여도 좋을 정도.

그러나 소설 내적으로 보면 아내인 ‘근영’과 남편인 ‘도현’이 ‘우울증’이라는 소재를 위해 동원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근영’의 우울증은 누가 뭐래도 남편 ‘도현’과의 관계에서 오고, 경력이 단절되고 지방 도시(아마도 세종)에 고립된 본인의 처지 역시 남편과 대조된다는 면에서 강한 우울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 갈등을 별로 건드리지 않고 우울증이 ‘조절’되는 과정, 또 더 ‘큰’ 우울증을 암시하는 결말 등으로 점철된다.

소설의 결말이 상당히 괴이한데, 특히 남편 ‘도현’의 태도 변화가 그랬다.

섬뜩한 느낌을 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은데, 사실 잘 와 닿지가 않았다.

제목인 ‘미아’에 “비교적 가벼운 병”이라는 뜻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2. 백수린, 아주 잠깐 동안에  ★★★

제목과 달리 소설은 ‘그’와 아내인 ‘여주’가 처음 만났던 고교시절로부터 집들이를 하게 된 어느 저녁, 그리고 그 이후 다시 10년 정도가 지나 이제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는 현재에까지 이른다.

‘나’와 ‘여주’의 관계는 조금 낭만적이고 귀여운 구석이 있는데, 그건 그것대로 매력이 있다.

다만 이 소설의 전체적인 구도랄까, 메시지를 고려하면 조금 아쉬운데, 어떤 순진했던 시절과 속세에 찌들어버린 지금을 대비시키는 구도에 놓이는 순간, 낭만화와 단순함 같은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향 친구들을 불러 즐겁게 집들이를 하고 난 뒤에, 행복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다가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그 노인을 도와준 기억.

그렇지만 노인을 답답해하다가 사고가 나기도 하고, 생각보다 힘들고 시간이 걸려 ‘귀찮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그리고 이후 노인이 괜찮은지 들여다보지 못했던, 그리고 뒤늦게 노인의 집에 갔을 때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일.

그 ‘아주 잠깐 동안에’ 일어났던 일이 여전히 마음 한 켠에 남아 있다는 것.

그런데 결국 마지막 문장인 “이번에는 늦지 않게 노인에게 되돌아가기 위해서.”에 이르면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든다.

백수린 소설에서 아쉬움이 느껴지는 순간은 늘 비슷한데, 이를테면 <여름의 빌라> 같은 소설도 그랬지만, 인물들이 나름대로 고민을 하고 갈등을 빚지만 결국은 윤리적인 선택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선함이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인물의 선택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도 알고 있으나 어쩐지 이런 소설은 이미 시작부터 그 결론을 이미 예정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또 가족에 대한 긍정이랄까, 좋은 남편, 아내, 착한 아들, 딸, 자애로운 어머니, 할머니, 다정한 아버지 등 캐릭터와 관계 설정이 좀 반복되는 듯도 하다.

“그는 그녀를 꽤 좋아했지만,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롭던 첫 번째 여자친구의 철없던 해맑음이라든지, 격의 없음, 불행에 대해 골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유효해지는 낙관적인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하루하루 전력을 다해 살면서도 쫓기는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마음을 털어놓는 것 같지만 최후의, 최후의 순간에 이르면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던 두 번째 여자친구를 보면 쓸쓸해졌고, 자기 자신은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가 궁금해졌다.”

이런 문장이 많은, ‘노인’의 이야기는 빠진, ‘그’와 ‘여주’의 이야기였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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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화길, 오물자의 출현  ★★★★☆

거의 완벽에 가까운 소설.

사실 이 소설 때문에 이 포스팅을 올린다.

강화길이 <화이트 호스> 같은 전작에서 얘기했던 것, 그러니까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겠다는 것.

또, <크릿터>에도 실려 있지만 길리언 플린 같은 작가에 대한 애정 등을 고루 떠올리면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고, 이게 그 결과물의 하나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플래시 픽션의 정세랑 작품에 소설 쓰기를 고민하는 여성 작가가 “아라가 잘하는 것은 달콤하고 달콤한 코팅. 그리고 폭력의 희미한 기운을 감지하는 것. 그렇다면 일단은 연애 소설처럼 보이는 스릴러 소설을 쓰면 어떨까?”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좀 다르긴 하지만 강화길의 고민도 비슷할 것이다.

너무 많은 장점이 있어 일일이 얘기하기도 힘든데, 우선 이야기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서술자의 태도, 이 자신감이 여성 작가의 소설에서는 좀 희귀하지 않았나 싶다.

마치 읽는 이를 밧줄로 묶어 소설의 마지막까지 끌고 가는 듯한 이 힘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아울러 결국은 ‘진실’이 없는, 아니 이야기의 진실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을 매우 흥미롭게 보여주는 다각도의 구성 자체도 무척 좋았다.

‘김미진’이라는 인물을 둘러싸고 그의 이력과 스캔들, 죽음 등을 파헤치는 여러 시선들이 얽히는데, 결과적으로는 ‘인간=텍스트’ 혹은 ‘삶=소설’이라는 도식의 변주이기는 하지만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여성’이 있고, 여성에 대한 폭력과 편견, 혐오, 차별 같은 것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되, 합리적 판단, 윤리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사태를 추적한다.

그러니까 어떤 ‘균형’을 찾으려는 이 작가의 힘겨운 노력처럼 보이고, 그것 자체가 이야기를 새롭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클리셰’나 ‘진부함’에 관한 고민도 흥미롭고, 그래서 이 소설은 결국 <오물자의 출현>이라는 책의 서평이라는 것, 또 이 이야기에 ‘그래서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가십’이라고 간단히 갈음할 수밖에 없다는 결말의 방식마저도 좋았다.

마치 이 소설에 대해 의아해 하거나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볼 누군가에게 미리 그 대답을 다 해주겠다는 듯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써 볼 테니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한, 이 자신감이 마음에 든다.

강화길이 결국 쓰고 싶었던 것은 3장의 이야기,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김미진’의 소설일 것 같다.

그러니까 ‘미친년’에 관한 것, 혹은 ‘미친 사랑의 이야기’, 웬만해서는 이해할 수 없고 스스로를 갉아먹으면서 누군가를 미치게 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끝까지 달려서 모든 것들을 소진시켜버리는 그 광기의 표출이 그것이다.

누가 이런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딱 한 가지 사소한 아쉬움은 왜 하필 ‘오물자’를 내세웠을까, 하는 점이다.

“전라도 말로 인형이라는 뜻”, 그리고 단어에서 느껴지는 부정적인 뉘앙스 같은 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렇게 효과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2. 김혜진, 자정 무렵  ★★★☆

이 소설에 관해서는 <우리는>(자음과모음, 2018년 겨울호)에서 조금 언급한 것도 있고, 이른바 ‘너’ 시리즈의 연속이어서 할 말이 많지는 않다.

결국 ‘너’는 모든 일들을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바로잡으려 했을 뿐”이고 ‘나’는 그로 인해 감당해야 할 일들이 훨씬 더 무겁고 피곤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 구도는 계속 반복되고 있어서, 또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다른 이슈의 정치성과 결합시키는 방식도 여전해서 조금 식상하다는 느낌도 있다.

남는 질문은 결국 하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계를 지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을 보면 끝내 이들은 헤어진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끝끝내 서로를 놓지 못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레즈비언이기 때문에?

혹시 그런 건 아닐까. 사실 이 소설의 ‘나’가 ‘너’이고, ‘너’가 ‘나’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서술자는 지금 ‘나’의 시선으로 ‘너’를 보고 있지만, 실제로 이 둘의 관계는 반대이기 때문에 ‘나’는 그토록 혹독하게 ‘너’를 비난할 수 있고, ‘너’는 그렇게 대책없이 행동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역전을 염두에 두고 썼다면 김혜진의 일련의 소설들이 좀 더 풍부하게 읽힐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2 Responses

  1. 최시온

    이번 현대문학 12월호에 실린 신인작가 4편의 소설들은 어떻게 읽으셨는지도 궁금해요!!

    그리고 매번 올려주시는 계간평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 악스트랑 릿터는 오랜만에 다뤄주셔서 더 재밌게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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