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문학, 2018년 겨울호

K662534825_f

 

<실천문학> 겨울호를 읽었다.

잡지가 꽤 내홍이 있었는데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이 된 느낌이다.

(늘 발간이 가장 늦긴 하지만)

여전히 좀 전체적으로는 올드하지만 젊은 편집위원들이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고, 라인업도 나쁘지 않다.

한연희의 시를 오랜만에 본 거 같은데, 색깔이 좀 달라졌다.

좀 어두워졌달까. 하지만 그것대로 좋았다.

소설은 총 4편이 실려 있고, 실망스러운 작품도 좀 있었다.

장편 연재를 없애면서 편 수가 좀 늘어난(날) 것 같다.

 

 

1. 김하율, 판다가 부러워  ★★★

2013년 등단 이후 거의 작품을 못 본 거 같다.

그냥 무난하게 읽혔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지 않아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하는 ‘나’와 남편의 석 달을 그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필치가 가볍고 날렵해서 막히지 않고 읽어가긴 했으나 특별한 지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름대로 지금 이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현실적으로, 또 세태를 잘 반영하여 쓰기는 했는데 너무 두루 다루려고 했던 것이 문제였을까.

부동산 문제(집 구하기), 출산(육아) 문제, 여성의 경력 단절 문제, 반려동물(고양이)을 둘러싼 이야기들.

이런 것들이 그냥 다 뒤섞여 있고, 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설득력이 썩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작위적인 장면들도 좀 있는 것 같고, 결말도 소설의 표현대로 ‘아침드라마 클리셰’ 같았다.

 

 

2. 우다영, 창모  ★★

최근 작품들이 꽤 괜찮았는데, 이 소설은 소설집 <밤의 징조와 연인들>에서 단점으로 느껴지던 지점이 도드라져 보였다.

뭐라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려운데, 소설의 인물들, 관계들, 감정들이 청소년 소설 같은?

물론 청소년들이 자주 등장하기도 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리얼리티가 떨어지고 그냥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대화들이 이입을 방해하는 것 같다.

유치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이 ‘날 것’을 왜, 어디까지 이해해 줘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이 소설의 ‘창모’라는 인물은(물론 그 ‘창모’일 리는 없겠지만 연상은 된다) 공격성과 분노를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남고교생이고 그를 이해하는, 또 그가 이해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로 동창이고 여성인 ‘나’가 설정되어 있다.

이 둘이 어떻게 서로 관계 맺어가는지, 또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창모’가 ‘나’를 ‘단 한 번도 공격한 적이 없기 때문’임은 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극심한 분노를 표출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도 하게 되고.

이 얼마나 간편한 방식인가.

버스에서 임산부에게 온갖 폭언을 쏟아내는 행각을 지켜보면서도 ‘나’는 차분하게 ‘창모’를 달랜다.

‘창모’는 ‘나’를 통해 그런 자신을 이해받는다고 느끼고.

그런 세월이 지나 성인이 된 지금 ‘나’는 합리적이고 품위가 있으며 예의바른 남편을 만나 안온함을 느끼며 가끔 ‘창모’를 떠올릴 뿐이다.

‘나’를 너무도 수동적인 인물로 그렸고,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 여성’이 ‘비정상적 남성’을 보듬고 품어주는 이야기라고밖에는 생각이 안 된다.

 

 

3. 임승훈, 초여름  ★★★☆

어쩌다 보니 이 작가의 소설은 대체로 읽었고, 등단이 2011년인데 아직까지 첫 책을 내지 못한 것이 좀 의아하다.

이 소설이 그런 얘기를 하고 있기도 하고, 또 임승훈이 등장하리라 예상했고, 그래서 결국 분노와 절망 속에서 스스로를 웃으면서 칼로 찌르는 이야기일 줄 알았다.

이 자조와 자괴의 서사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아마 호불호가 갈리지 싶다.

‘자기’ 이야기를 아주 직접적으로 깊이 파고드는 요즘 소설의 경향에 비추어 볼 때, 임승훈의 소설은 좀 허술하고 가벼워 보인다.

이 장난 같은 소설이 재미있게 읽힌다면 다행인데, 좀 애매한 지점은 분명히 있다.

그러니까 김봉곤, 박상영, 이주란 같은 색깔이 없고, 오한기 같은 작가와도 다르고, 소위 남성 재담꾼 계열(최민석 등)에도 끼기 어렵다.

작가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고, 그러니까 자신을 ‘자살’시켜가면서 “역겨운 지구문학”이 아니라 “므스느그흠 행성”의 외계인들만 그 탁월함을 알아볼 수 있는 소설이 자신의 작품임을 역설하는 것이고.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쓸데없는’ 서사를 여기저기에서 끌어오는데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었다.

 

 

4. 임회숙, 쓸모 있다는 것  ★★

장기매매가 합법적인 기관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설정을 일단 해놓고, 엄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어떤 장기를 팔 것인지 고민하면서 가난한 생활을 견뎌내는 대학생 딸인 ‘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엄마를 대신해 핫도그 장사를 하는 것이라든지 도저히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늘 돈에 쪼들리는 것, 거기에 또 임대료(젠트리피케이션) 문제까지.

작위적인 지점이 너무 많고 특히 장기매매 설정은, 결국 수술 날짜가 잡히고 병원비를 마련할 수 있겠다는 기대로 수술대에 ‘나’가 누워 있던 그 순간 엄마가 돌아가시는 소설의 결말을 위해 마련되었을 뿐인 것 같다.

그러니 결국 소설의 디테일은 훅 날아가버리고 너무도 식상한 서사와 억지 비극만 남는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거의 없다.

 

2 Responses

  1. wlskrksms tkfka

    우다영 작가의 읽고서,
    대체 무슨 소설인지 아무래도 감이 잡히지 않아서 이것저것 찾아보다 들어오게 되었어요ㅠ
    저도 이 포스팅에 적힌 대로 “리얼리티가 떨어지고 그냥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대화들이 이입을 방해하는 것 같다” “유치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이 ‘날 것’을 왜, 어디까지 이해해 줘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부분에 공감합니다.
    에서 ‘창모’의 폭력성으로 선악 이야기를 하려던 거라거나 ‘사회적인 이해’를 바라는 거라면 정말 단순한 이야기 같고,
    작가 분이 의도하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인공 ‘나’와 ‘창모’의 관계야말로 적당히 거리두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나’는 ‘창모’를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바로 곁에서 ‘창모’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는 ‘소호 언니’나 ‘어머니’나 ‘현도’ 등이고,
    ‘나’가 ‘창모’에게 폭력을 당하지 않은 것은 그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알아서 잘 피했기(기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나’는 ‘창모’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아니, 제대로 경험해본 적도 없으면서), ‘나’ 역시 ‘창모’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창모의 행위 결과만 보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선민의식에 빠져서, 멀리서 지켜보는 ‘관찰자’ 중의 ‘관찰자’가 아니였나 싶기도 합니다.
    왜 폭력적인 사람을,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이해해줘야 하는지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하는 ‘착한 사람’ 놀이에 빠진 곱게 자란 ‘나’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았고, 모든 것에 인과가 있다고들 하지만, 정말 아무 이유 없는 일에까지 이유를 붙여줘서까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반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