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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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읽은 소설은 모두 단평을 올리기로 다짐했는데, 또 한참 버려 두고 있었다.

겨울호와 월간지 읽은 것들 다 업로드 하려면 또 한 세월이어서 포기하고, 봄부터 새롭게 또 각오를 다지며.

 

역시나 가장 먼저 나온 창비를 읽었다.

시는 대체로 좋았는데, 곽문영, 장혜령이 특히 좋았다.

그리고 최근 <자음과모음>에 실린 것도 그렇고 이소호의 시는 좀 난감하다는 생각도 했다.

‘대화’에서는 “새로운 작가들의 젠더 노동 세대 감각”이라는 주제로 최근 주목받은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전반적으로는 동의하지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대목도 있었고, 다룬 작가들이 좀 편향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데뷔 5년 이내 작가들의 최근 1~2년 내 발표작들을 중심”으로 했고, “빠진 작가와 작품도 많겠”다고 서두에 말해놓긴 했지만, 이 주제라면 이주란, 김멜라, 김남숙, 강화길 등의 작가가 들어가야 할 것 같고, 5년을 조금 넘기긴 했어도 최근 이상우의 작품은 꼭 언급되어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빼도 될 작가는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하고.

용산참사에 관해 이일란 감독이 글을 썼는데, 그냥 <두개의 문>과 <공동정범>을 무조건 보면 된다.

대산대학문학상의 시 부문 당선자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어 반가웠는데, 이런 시라면 영원히 쓸 수도 있겠다(긍정적인 의미에서)는 생각을 했다.

소설 부문은 일련의 사태로 수상이 취소되는 일이 있었고, 심사평에는 그냥 심사의 공정성 문제만 언급했던데, 만약 그 소설이 ‘공정’한 심사를 통과해 뽑혔다면 어땠을까.

내친 김에 이 얘기도 좀 해보자.

심상대의 <힘내라 돼지>에 추천사를 썼던 성석제, 하성란 작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기저기 보이는데 그래도 괜찮은 걸까.

하성란 작가는 창비에서 올해 상반기 문학초점 코너를 맡아 대담을 시작하고 있고, 거기에서 성석제 작가의 작품도 같이 언급하고 있다.

<학산문학>은 하성란 작가 특집 지면이 있고.

<문학동네>는 김금희 작가가 성석제 작가를 인터뷰 했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나눴을 거 같지는 않고.

이럴 때 엄청나게 고민스럽다.

소위 문단의 자정 능력이라는 게 없구나 싶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일에 대한 입장을 다른 자리에서 거론하는 게 당연히 이상하기도 하고.

나는 하성란, 성석제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냥 앞으로 개인적으로 보이콧 하면 되는 건가 생각도 들고, 저런 일에 대해 단죄하듯 따져 묻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

그렇지만 잡지의 온갖 지면이 여성 문제, 페미니즘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다시피 한데 이 작가들이 아무렇지 않게 어떤 역할과 조명을 부여 받는 게 말이 되나 싶어 욱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왜 그러셨어요?’ 하고 묻고 싶은데, 어디서? 어떻게?

아무튼 나로서는 그 일에 대한 입장정리 없이는 이 작가들은 손절이다.

 

소설은 총 4편이 실려 있다.

 

 

1. 김중혁, 휴가 중인 시체  ★★★

김중혁 작가는 대외 활동(?)으로 작품이 뜸하다가 요즘 다시 단편을 쓰기 시작한 것 같다.

이번 작품은 작년 <현대문학> 11월호에 실었던 <심심풀이로 앨버트로스>와 소설가의 ‘이야기 찾기’라는 플롯을 공유하고 있기는 한데, 인공지능이라는 나름의 반전이 있었던, 근미래 소설인 전작에 비하면 임팩트가 많이 떨어진다.

우선은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가 마치 ‘좀비’를 연상케 해서 언제 이 소설이 장르물로 바뀌나 지켜보고 있었는데, 전혀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한 차례 인생에서 좌절한 사람이 일종의 ‘휴가’를 갖고 두 번째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이야기.

소설은 한 버스 여행자(주원 씨)를 따라다니기 시작한 프리랜서 작가 ‘나’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서두에서 소위 ‘기인’이나 ‘광인’을 찾아나서는 이야기가 아님을 설명했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읽혔으므로 사실상 실패했다.

거칠게 요약하면 배우가 꿈이었지만 스쿨버스를 운전하는 일도 나름대로 즐거워 했던 사람이 한 순간의 실수(아이를 매단 채 달려버린, 게다가 그 아이는 따돌림을 당하던)를 저지르고 다시 속죄의 여정을 떠나는 이야기.

술에 대한 주원 씨의 단호한 거부, 스쿨버스나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사실 사연이 좀 예측되는 면이 있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희곡 대사 읊기를 주고받는 두 인물의 모습은 (이것이 무리라는 것을 안) 작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설득이 안됐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결국 ‘실수’로 벌어진 ‘비극’으로 보는 것도 좀 단순해 보이고.

아무튼 이 모든 이야기가 결국 ‘나’의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게 특히 좀 문제적이다.

중견 남성 작가의 남성 인물의 깨달음의 방식이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착취하는 형태가 그간 잦았다면, 이제 아예 여성을 삭제하는구나 싶어서.

김중혁이 과연 예전의 그 활력을 회복할 수 있을까?

조금 더 지켜 봐야 할 것 같다.

 

 

2. 백수린,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

요즘 거의 매 계절 작품을 쓰고 있다.

소재도 그때그때 다른 편이이서 어떻게 이 많은 이야기를 이렇게 계속 써내나 싶은데.

이번 소설은 ‘육아’에 관한 것이다.

둘째 아이를 낳아 다시 ‘새 육아’를 시작하게 된 ‘그녀(희주)’가 육아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또 벗어나지 못하는 순간 등을 그린다.

서두에서 남편과 가상의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 몸과 골격에 대한 욕망과 환상이 현대무용, 발레리노, 노동자, 성형외과 전문의 등의 인물로 형상화되는 것이 다소 비약이고 또 일견 작위적이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인상적인 작품이다.

우선은 젖먹이 육아 단계의 여성이 겪는 일을 꽤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이 그러했고, 백수린 소설에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모호하고 덜 ‘교훈적’인 결말도 좋았다.

개인적으로 백수린 작가의 작품은 그때그때 호불호가 좀 갈리는데, ‘불호’의 경우가 서사가 결국 윤리적이고 안전한 결말로 이어지는 경우인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소설 자체의 단점이라기보다 덜 풍부하게 읽힌다는 측면에서 그러한데, 이 소설은 중국인 노동자를 마주보는 그 장면이, 또 그 이후 “이젠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희주’의 모습이, 또 둘째 아이의 울음이 터지는 마지막 문장이 오래 남았다.

백수린 소설이니까 당연히 이런 문장도 있다.

“그는 틀림없이 욕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어봤겠지? 불현듯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일찍 철이 든 척했지만 그녀의 삶은 그저 거대한 체념에 불과했음을.”

출산과 육아로 완전히 단절되는 여성의 삶에 관해서라면 아직 이야기할 것들이 많이 있고, 특히 출산과 육아 그 자체에 관해서도 한국 소설에는 다양한 레퍼런스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구병모, 윤이형 등의 작품, 또 이번 계절에 최은미, 김세희 등의 작품이 풍성하게 같이 읽힐 수 있겠다.

 

 

3. 황정은, 파묘  ★★★★

단편을 발표한 것은 대단히 오랜만인 듯하다.

<디디의 우산> 이후 첫 작품이고, 황정은 소설의 인장이 강하게 찍혀 있다.

말 그대로 파묘(墓)하는 이야기.

이야기가 조금 진행이 되어야 밝혀지기는 하지만 어쨌든 모녀가 모두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순일에게 할아버지였고 한세진에게는 외증조부”인, 1978년에 지경리에서 죽은 노인의 묘를 없애는 이야기다.

‘이순일’은 한국전쟁 통에 고아가 되어 할아버지 손에 거두어졌고, 열다섯이 되던 해 먼 친척이 있는 김포로 와 중매로 만난 ‘한중언’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순일’은 ‘한영진’, ‘한세진’, ‘한만수’를 낳았다.

이 인물들의 내력과 상황은 소설이 시작되고 곧 순식간에 설명되는데, 확실히 솜씨가 남다르다.

정확하게 사정을 이해시키면서 성까지 붙인 이름으로 인물을 지칭해 적당한 거리감까지 만든다.

그리고 그 인물들이 ‘엄마’나 ‘딸’, ‘누나’ 같은 호칭으로 서술될 때 당연히 조금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효과가 있다.

길지 않은 소설인데, 담겨 있는 이야기는 무척 풍부하다.

그냥 간단하게만 말하자면 ‘누가 위대한 사람인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시대나 성별, 정치와 현실, 가족과 개인 등 모든 문제는 이어져 있어서 어떤 하나를 따로 떼어내어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정도가 핵심이 아닐까.

어쩌면 이 소설은 ‘이순일-한중언’, ‘한영인-한세진-한만수’라는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쓰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당연하게도 빗금이 쳐져 있다.

이순일과 한중언의 사이의 장벽은 꽤 높고, 세 남매의 처지와 입장도 각자 다르다.

특히 초점은 아무래도 막내 아들인 ‘한만수’에게로 가는데, 멀찌감치 떨어져 한두마디 보태는 일을 할 수 있는 위치는 ‘젠더’에서 나온다는 걸 여실하게 보여준다.

효도하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말라고, 태극기 부대의 노인들도 본인들의 권리가 있는 거라고 적당히 윤리적인 말을 던지는 외부자의 스탠스는 어떻게 나오나.

그런데 그 속에서 산을 올라 땅을 파내고 뼈를 골라내 다시 태워 보내는 일은 누가 하나.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그러나 황정은 소설이라면 더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되고, 또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결정적인 한 장면이 없었다는 아쉬움이 있다.

 

 

4. 김유담, 이완의 자세  ★★★

창비는 이제 중편소설을 한 편씩 싣기로 한 모양이다.

지난 계절 박상영 작가 작품에 이어 중편 분량으로 김유담 작가의 작품이 실려 있다.

김유담 작가는 대체로 현실의 세태 묘사가 작품의 주를 이루고, <탬버린>이나 <가져도 되는>에서도 그랬듯 필치가 유쾌한 편이다.

목욕탕집(이제는 대형 불가마사우나가 된) 이야기를 그린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산전수전 겪고 여탕의 세신사로 자리잡은 ‘유라’의 엄마 ‘오혜자’의 이야기가 한 축이고, 또 그 밑에서 자라난 딸 ‘유라’의 성장기가 다른 축이다.

지루하지 않게 잘 읽히는 작품이고, 인물들도 꽤 매력적이다.

다만 결국 목욕탕이라는 공간이 주는 이야기의 패턴이 좀 뻔하고(박생강의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 같은 작품), ‘유라’가 ‘만수’와 연결되는 결말 부분이 썩 와 닿지가 않았다.

‘오혜자’의 이야기, ‘윤원장’ 같은 캐릭터를 좀 더 부각시키고, ‘유라’의 이야기를 조금 줄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리고 ‘몸’이라는 모티프, 즉 벌거벗은 몸, 춤추는 몸, 유혹하는 몸, 뻣뻣한 몸, 선을 그리는 몸 같은 여러 층위가 좀 더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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