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문학 / 문학들, 2019년 봄호

실천문학

 

<실천문학> 봄호를 읽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항상 맨 마지막에 발행된다.

이번에도 거의 4월 말이나 되어서야 나왔던 거 같은데, 특집이나 기획 쪽에서 젊은 평론가들이나 신인 작가들이 꽤 모습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올드하다는 느낌이 든다.

소설은 총 4편이 실려 있는데, 신춘 소설에 2명밖에 실리지 않은 것은 좀 아쉽다.

 

1. 류시은, 밤과 감의 시간  ★★★

경향신문으로 등단한 류시은 작가의 (아마도) 두 번째 소설.

등단작이었던 <나나>와는 꽤 분위기가 다르다.

‘길범’이 갑상선 항진증 증상으로 한 ‘노의사’를 만나고 그 ‘노의사’의 아버지 이야기를 듣는 일.

여순 사건 때 감나무로 뛰어 올라가 목숨을 건진 아버지의 사연과(그게 밤나무였다면 어땠을까를 포함해) ‘길범’의 아내 ‘민정’의 사연이 만난다.

‘민정’은 같이 탔던 친구 세 명이 모두 죽고 자신만 살아남은 교통사고를 겪었는데, “광주의 한 동네에서 태어난 80년생 동갑내기들”이라는 표현이 평범하게 읽히지 않는다.

아무튼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 운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그 트라우마와 상처, 뭐 이런 이야기라고 봐야 할 텐데, 작위적인 측면이 크다는 건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무등산’으로부터 연결되는 이들의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무리하게 역사적 사건과 ‘우연히’ 만난다는 느낌이다. 태극기 부대, 의대 68학번 단톡방 같은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길범’의 역할이 좀 모호하기도 하고, 납득이 잘 안 가는 부분(인형을 망가뜨리는)도 있다.

다음 작품은 어떤 분위기일지 잘 짐작이 되지 않는데 기다려 봐야겠다.

 

 

2. 이한슬, 나쁜 날  ★★★☆

계간평에 원고를 써 둔 게 있으므로 그냥 그걸 옮긴다.

유치원 하교 후 아이를 제때 픽업하지 못해 혼자 있던 아이가 트럭에 치이는 사건―실제로는 트럭은 아이를 피했고 아이 역시 놀라 넘어지다가 철근더미에 머리를 부딪친 것이지만―이 발생한다. 장인·장모가 육아를 돕고 ‘돌보미’까지 고용했지만 늘 격무에 시달리는 ‘그’와 ‘아내’에게 다섯 살 ‘준이’를 돌보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반 년 전, 이사와 동시에 복직을 한 이후로 아내는 아이의 일이라면 매사에 지나치리만큼 예민하게 굴었다. 감정도 쉽게 격해졌다. 그럴 때면 그가 알던 평소의 침착한 아내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아내는 누군가 자신을 대신해서 아이를 세심하게 지켜봐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단 일 초도 아이를 혼자 두려고 하지 않았다. 저녁까지 아이 옆을 지켜 줄 수 있는 풀타임 돌보미를 구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71쪽)

아이가 태어난 이후 가족들이 겪는 생활 패턴의 혼란은 돌보미를 구하고 나서야 균형을 되찾는다. 그러나 단 몇 시간의 일정이 어그러지면서 아이는 혼자 집으로 향하는 선택을 하고 사고가 생긴다. 이 소설이 독특한 것은 남편인 ‘그’의 시점에서 사건이 전개된다는 점일 텐데, ‘그’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 즉 아내와 장인·장모, 돌보미, 트럭 운전기사와 수술한 담당한 의사까지 이들은 모두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아이도 수술이 잘 끝나고 무난하게 회복해 일상으로 돌아간 상황에서도 오로지 남편인 ‘그’만이 무척 불안해하고, 그날 아이의 행적에 대해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그’가 유년기에 겪었던 아버지와의 경험 때문인데, “탄광 매몰 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 나온” 아버지에게 삶은 늘 누구의 잘못도 아닌 채로 “일어난 일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는 죽은 아버지와의 기억을 계속 떠올리며 이 사건을 이해해보려 하지만 자신의 선택에 따른 죄책감을 끝내 해결하지 못한다. 이 작가는 등단작에서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핵심적인 모티프로 기능한 바 있는데, 자신이 알려준 적도 없는 길을 혼자 걸어간 아이의 행동처럼 끝내 부모는 자신의 아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조금씩 멀어지게 되는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3. 권현숙, 블랙에 바친다  ★★☆

투고작으로 실린 소설.

90년대에 등단해 나름대로 꾸준히 활동을 이어오셨는데, 그간 읽어보지는 못했다.

인생 말년에 병을 얻어 우연히 친구(라고 하기는 좀 어려운)의 전화를 받고 샌프란시스코로 향한 ‘나’의 이야기인데, ‘나’의 시선이 인종적으로나 젠더적으로나 너무 과잉이고 편견이다.

‘젖소 같은 처녀’, ‘이빨 빠진 창녀’, ‘아찔하게 보드를 타는 열네 살 소년’, ‘지식도 없고 문학도 모르며 사회에 기여할 능력도 없는, 구걸하는 인디오 청년’, ‘칼 든 멕시칸 강도’, 아무튼 뭐 더 얘기할 필요는 없겠고.

더 문제적인 건 이 인물들이 ‘나’가 간 이식을 위한 장기 기증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소설의 주제가 쓸모없는 건강과 무의미한 젊음을 ‘나’에게 달라는 것은 아니겠고, 오히려 그 반대였겠지만 ‘나’를 통해 바라보는 이 풍경들은 좀 역겹다.

그 역겨움이 혹시 의도한 것이라고 해도 성공적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4. 최승랑, 계절풍  ★★

여행을 떠나려다 태풍으로 비행기가 뜨지 못해 같은 호텔에 묵게 된 두 여자의 이야기.

‘그녀’가 털어놓는 사연을 듣는 ‘나’는 남편 몰래 ‘승완’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있는데, ‘그녀’를 통해 모종의 변화를 결심하게 된다는 결말.

우연히 만나 두 사람이 서로의 속내를 나누는 것도, 그 잠깐 동안의 만남이 인생을 바꾸는 것도, 헤어지면서 그제야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도 너무 뻔하다.

굳이 ‘바람’을 의미하는 제목을 썼어야 하는지도 의문.

 

 

 

문학들

 

<문학들> 봄호에는 3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1. 성보경, 떠밀어도 떠밀리는  ★★☆

시어머니의 죽음과 손자의 탄생을 동시에 경험하는 중년 여성의 이야기.

다분히 한국적 드라마이고, 특별할 게 없는 이야기이다.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겪는 차별, 고통, 상처, 불만 등을 결국 어떻게든 스스로 봉합하는 중년 여성 인물은 이제 좀 그만 봐도 될 것 같다.

그래도 나름의 디테일과 생생함은 있는 편이어서 끝까지 읽게는 된다.

‘떠밀어도 떠밀리는’이라는 제목은 좀 알쏭달쏭한데, 아무튼 어색하다.

 

 

2. 위수정, 마르께스를 잊어서  ★★★

등단작이 무척 좋았던 기억이라 늘 기대를 갖고 읽는데, 이번에도 좀 아쉬웠다.

‘준우’와 ‘홍’의 관계, 이들이 찾아간 ‘섬’이라는 공간, 그곳의 ‘택시 기사’와 ‘민박집 여자’ 등 설정과 구도는 꽤 매력적이었는데, 이걸 너무 ‘문학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던 게 패착 같다.

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이들의 관계, 그리고 너무 달라져버린, 하지만 둘만 아는 상처와 고통 같은 것이 그냥 이 섬에서의 단순한 일들과 같이 그려져도 무리가 없었을 텐데 굳이 레퍼런스를 동원해 설명하려는 것, 약간의 불안과 모호함을 암시하는 것 등이 오히려 집중도를 떨어트렸다.

하지만 좋은 장면은 꽤 있었고, 조금씩 이야기를 쌓아나가 폭발시키는 저력 같은 것은 여전히 느껴졌다.

 

 

3. 임현, 맹  ★★★

너무도 임현스러운 소설.

표면/이면, 확신/불신 이런 구도를 여전히 탐구하고 있다.

첫 소설집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목견>과 같이 읽을 만하다.

아무튼 새로 구한 집(동네)이 무척 조용해서 만족하며 소설을 쓰는 ‘나’가 어떤 여자의 기이한 메모를 받으며 사건은 시작된다.

자신은 전혀 듣지 못했던 ‘개’ 짖는 소리에 관한 것인데, 그 ‘사실’을 좇다가 여자가 사실은 개 ‘인형’을 안고 다니는 장면을 ‘나’는 목격하고, ‘개’를 잃어버렸다는 여자에게 그 인형을 찾아 가져다 주지만 황당하다는 반응을 접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표면적으로만 읽으면 어떤 ‘미친’ 여자를 대면한 ‘나’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 즉 ‘나’가, ‘나’만 미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게 핵심일 것이다.

그러니까 농구공을 주고받는 횟수를 세기 위해 집중하다 보면 거기에 나타난 고릴라를 전혀 보지 못하는 것처럼, ‘나’의 시선에만 골몰하는 우리가 다른 이야기들을 전혀 보지 못할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이 작가가 여러 차례 서사화 했던 것이라서 임팩트가 좀 덜한 게 사실이고, ‘미친 여자’, ‘거친 윗집 남자’, ‘이성적(이라고 믿는) 남성(나)’의 인물 구도도 약간 식상하고.

‘나’가 소설가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 봤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이 ‘거짓말’을 ‘믿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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