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3, 2019년 2호

문학3

 

<문학3> 2호를 읽었다, 통권으로는 벌써 8호째.

‘일×존엄을 상상하기’라는 기획으로 쓰인 다양한 산문들이 좋았다.

어떤 글들은 정말로 ‘통감’하며 읽었다.

소설은 여전히 짧은 40매 내외로 다섯 편을 싣고 있다.

좀 긴 호흡의 작품은 웹에서 연재되는 3×100에 있기도 하고, 이게 <문학3>만의 색깔이라고 생각하니 이제 조금 이 분량에 적응되는 거 같기도 하다.

 

 

1. 김미월, 선생님 저예요  ★★★

여고생이었던 ‘최은주’가 졸업한 지 20여 년이 지나 좋아했던 남 선생님에게 ‘어떤 일’로 편지를 보낸다면 대충 전개가 예상되지만, 서간체의 형식이 나름대로 흥미진진해서 초반에는 호기심을 갖고 읽어 나갔다.

자신이 짝사랑했던 수학선생에게 일종의 연애편지를 익명으로 써나가다가 돌연 그 편지의 주인공이 ‘미선’임을 밝히고 학교를 떠나버린 ‘은주’는, 지금 ‘미선’이 수학선생의 성폭력을 고발한 마당에 자신의 그 거짓 편지가 수학선생의 알리바이로 쓰임을 알게 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귀국한다.

짧은 소설에 잘 맞는 구성인 것 같다가도 결말이 좀 실망스럽다는 생각도 드는데, 이런 방식으로 ‘진실’을 밝히는 게 과연 적절한가 싶어서이다.

수학선생을 짝사랑했고, 거짓편지로 ‘은주’가 일종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하더라도 선생의 범죄는 그것과 별개로 일어난 것이고, 핵심은 그 폭력이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서사는 기존의 피해 여성의 ‘여지’를 따지는 구태의 반복 아닌가 싶다.

우리가 지금 미투 운동을 다시, 계속 사유할 때 이 소설이 더 나아간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조금 고민스럽고,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고 다시 곁가지, 가십거리 위주로 핀트를 돌리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만약 그 편지의 발신인이 정말 ‘황미선’이라고 해도 이 사태는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봐야 하고, 이 소설이 그렇게 동의하고 있다면(잘 모르겠지만), ‘은주’라는 인물을 다시 피해와 가해를 동시에 반복하는, 일종의 무지한 방관자 정도로 그린 것일 텐데, 그것도 이해하기는 좀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미선’이 어떤 식으로 고발을 했는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데 어느 쪽이 조금 더 적절하고 납득되는 방식이지는 나로서도 판단이 어렵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게 필요해 보였다.

 

 

2. 듀나, 왕의 넋  ★★★

짧은 소설들 중에서도 짧은 편인데, 정보값은 가장 많다.

여전히 조선의 이씨 왕조가 지배하는 한반도에서 혁명정부가 왕의 목을 치면서 들어섰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75년 지금, 역혁명의 조짐이 보이며, 그것은 왕의 넋을 나눠가진 99명의 ‘영통’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신주희 교수를 필두로 혁명정부의 ‘연구소’는 바티칸으로부터 신성과학 전문가를 초빙 받아 그들을 제거한다는, 다소 단촐한 이야기이다.

단편적인 에피소드, 소품 정도로 읽히는데 왕의 넋이 모두 ‘남자’에게로 전달된다는 것, 조선의 왕조, 영통, 이런 설정들이 이건 흡사 ‘한남 척결 서사’인가 싶기도 하지만 좀 과하게 읽는 것 같고.

분량의 문제도 있겠지만 아쉬운 것은 99명의 추종자들이 제거된 후 그냥 소설이 끝나버렸다는 것.

물론 ‘뒤크뢰 박사’의 정원사 운운하는 결말이 약간의 여운을 주기는 하지만, 이를테면 99명의 추종자들 외에 왕의 넋이 전달된 단 1명의 여자가 있었다면?

이 분량이 다소 어울리지 않았다는, 조금 더 큰 이야기였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3. 서장원, 주례  ★★★★

그러니까 이게 다 ‘경목’의 착각인가? 하고 흥미롭게 반추하게 되는 잘 짜여진 소설.

고교 시절 제자 ‘용주’의 주례를 부탁 받은 ‘경목’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결혼식장으로 향하다가 지각을 해버리는, 그런데 결혼식은 아무렇지 않게 잘 진행이 되더라는 이야기.

이 타이트한 분량에, 이 하나의 에피소드에 ‘경목’이라는 인물의 삶이 잘 드러나 있다.

어디까지가 이 이야기의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잘 가라 꼰대여’의 방식으로, 지나간 세대에 산뜻하게 작별을 고하는 작품처럼 읽혔다.

더욱 놀라운 것은 (확실치는 않지만) 이 작가의 첫 작품 같다는 점인데, 형식과 지면과 소재를 아주 잘 만난 것 같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닌데, 소설의 서두와 말미를 견인하는 ‘수지침’이라는 소재.

이 세대를 상징하는 물건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강조될 만큼인지는 잘 모르겠고, 만약 단지 그런 목적이었다면 좀 단순해 보이기도 한다.

‘주례’라는 제목이 주는 풍성함과 비교하면 더욱.

어쨌든 인상적인 데뷔작이다.

 

 

4. 이승우, 소화전의 밸브를 돌리자 물이 쏟아졌다  ★★☆

이건 좀 난감한 소설이다.

어떤 여성 노인이 길가의 소화전 밸브를 열어 물을 양동이에 담고, 그 물을 도로 한 가운데로 쏟아 솔질을 반복한다.

경찰은 꽤 반복되는 노인의 행각에 넌더리를 내며 연행하려고 하는데 한 남자가 그것을 가로막는다.

설왕설래 중 소화전 밸브가 터져 버리고 물이 쏟아지는 가운데 남자는 마지막으로 중얼거린다.

“낯선 사람이 문득 어디서 왜 오는지, 왜 와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문득 되살아나 현재를 덮치는 과거에 아무 뜻도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어요? 그럴 때 현재가 어쩌겠어요?”

결국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서사가 동원된 것이나 다름 없는데,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 소설을 두고 ‘중계’ 지면에서는 세월호를 읽어내기도 했는데 그건 좀 과잉으로 보이고.

“물을 뿌리는 것은 지우기 위해서이지만, 반복적인 물 뿌리기는 지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우지 않기 위한 것”이라는 식의 문장들은 좋았는데, 이 ‘재고’의 방식은 너무도 이승우적이라 말 그대로 ‘반복적’으로만 읽혔다.

 

 

5. 이현석,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  ★★★★☆

아마도 <문학3>에서 읽었던 작품들 가운데서는 가장 인상적이지 않았나 싶은데.

이 작가는 2017년 중앙일보로 등단했고, 그 시상식 자리에서 상금의 절반을 ‘반올림’에 기부한(정확히는 아마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였을 거고, 공교롭게도 이번 <문학3>에 ‘반올림 활동 12년’을 정리한 공유정옥의 글이 있다) 적이 있는, 현직 의사이다.

“어등이어”라는 동인 집단에 속해 있는데,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으나(물어볼 기회는 많았는데 묻지 못했고, 아니면 물었는데 답을 못 들었거나, 답을 들었는데 기억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최유안, 조진주 같은 2017-18년 정도에 등단한 작가들이 같이 서로를 북돋우는 모임 정도인 듯하다.

아무튼 작년에 쓴 <라이파이>가 꽤 호응을 얻었고, <컨테이너>는 좀 아쉬웠으나, <부태복>이 괜찮았는데, 이번 작품은 앞선 작품 다 치우고 첫 자리에 올려 놔도 될 것 같다.

최근에 여러 번 담론화 되었지만 한국 소설에서 ‘나’라는 작가-인물 주체가 상당히 각광받고 있고, 이 작가도 ‘현직 의사이자 소설가’인 자신을 드러내면서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는 것 같다.

<부태복>이 의사로서의 경험과 디테일을 소재적으로 쏟아부은 역작 정도라고 보면 이번 소설은 거기에 ‘소설가’로서의 고민을 더하고 정체성의 문제를 어떻게 서사화 할 것인가를 매우 복합적으로 고민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소설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경험, 그리고 주변의 인물, 일들을 서사화하려는 욕망, 갈급함 같은 것에 시달리고, ‘의사’라면 그게 환자에 대한, 즉 직업 윤리와 연관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 게이-노인 커플의 생이별을 생활동반자법의 공론화를 위해 드라마틱하게 각색한 레즈비언 의사 ‘수연’은 ‘나’의 고민을 증폭시키는 기제가 되는데(조금 층위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런 방식의 ‘의사’ 글쓰기는 명백히 최근의 실제 사례를 지시하는 것으로 읽힌다), ‘나’가 노인정에서 만나 단짝이 된 두 노인 중 갑자기 사라진 한 명을 찾아나서는 노인의 이야기를 쓰려 하기 때문이다.

이 고민은 다시 지금 죽음을 앞둔 노인의 딸 ‘유나씨’와 연결되는데, 자신의 정체성을 뒤늦게 깨닫고 가정을 깨버린 아버지 ‘이시진’에 대한 ‘유나씨’의 복잡한 마음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영화 <보희와 녹양>도 비슷한 서사를 공유한다.)

아버지와 연인을 헤어지게 만든 것은 이 사회의 지독한 편견과 ‘유나씨’의 상처 같은 것들일 텐데, 소설은 왜 그 둘을 만나게 하지 못할까, 왜 ‘나’는 그렇게 쓰지 못할까, 하는 것이 고민의 요체다.

나는 이소설의 결말을 결국 ‘나’가 그 두 노인의 만남을 결심하지 못하는 것이 ‘유나씨’의 승인이나 허락 같은 것이 아니라 ‘나’의 문제임을 깨닫는 것으로 읽었고, 바로 그 결과물이 이 소설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로 읽었다.

하지만 이렇게만 읽고 넘어가기에는 이 소설이 간단하지 않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이 소설이 ‘수연’의 방식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여전히 ‘나’는 ‘대상’으로서 ‘그들’을 정원 저편에 남겨 둔 채로 있는데, ‘이시진’ 씨는 바로 다음 날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아무튼 그런 여러 고민들이 남는 것이 이 소설의 ‘소임’일 것이고, 매 문장들이 쉽게 쓰이지 않았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병원’, ‘정원’, ‘전원’ 같은 공간적 구도와 대비도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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