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2019년 여름호

창작과비평184호_웹사이트메인표지

 

계간지 여름호가 쏟아졌다.

유독 작품이 많아 보이는 건 그저 기분탓이려니 여기고, 우선은, 당연히 창비부터 읽었다.

신경숙 작가의 복귀 얘기부터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4년이라는 침묵의 시간이 길지도 짧지도 않다고 생각하고, 언제가 되었든 이 작가의 작품을 다시 읽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었다.

여러 맥락과는 별개로, 신경숙이라서, 베스트셀러 작가여서, 또 그가 여성 작가라서 겪는 과도한 비난 같은 것도 있었다고 생각했고 적절한 방식으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도망치듯 떠밀려서, 그러나 화려하게 복귀할 줄은 몰랐다.

우선 표절에 대한 명확한 해명이 여전히 없다는 게 문제다.

이번 입장문에서도 “젊은 날의 중대한 실수”정도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런 애매한 인정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박민규 작가가 자신의 표절 의혹에 대해 분명한 경위와 나름의 해명을 했던 것에 비교하자면 더 그렇다.

언제 그 책을 봤었는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설사 절대로 읽었던 책이 아니라고 판단이 되더라도 그 정도의 일치라면 자신의 집필 과정을 상세히 밝히며 납득을 시켜야 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이를테면 ‘나는 보통 소설을 읽다가 인상적인 대목이 있으면 그걸 메모해 두는 버릇이 있는데 굳이 출처를 명기하지는 않는 경우도 있고, 시간이 흘러 아마도 그 메모가 나의 메모들과 섞여 들어갔던 것 같다’든지 하는 식의.

어떤 ‘실수’였는지를 말하지 않으면서 과오를 반성한다는 식의 논리는 그것이 ‘표절’에 관한 문제라면 실수가 아니라고 충분히 상상하게 만든다.

또 신경숙 작가는 작품을 발표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이 무척 고통스러웠다고 말하고 있고, 작품을 발표할 지면을 찾지 못하는 작가가 안쓰러워 기회를 주었다고 창비 측은 말하기도 했는데, 이거야 말로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누추해진 책상에서 상처투성이인 채로 소설을 쓰면서 문학의 땅에서 끝내 다시 일어서려고 하는 사람…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한국의 수많은 비(미)등단자들, 어찌어찌 문단이라는 곳으로 들어 왔지만 속수무책으로 사라져버린 작가들, 위계와 권력에 의해 밀려난 작가들, 소위 중앙문단이 아니라 지방에서 교정지나 고료 같은 것들은 상상할 수 없는 채로 작품을 쓰는 사람들이야말로 그런 작가가 아닌가.

신경숙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투고’해 볼 생각은 했을까? 지금 무수히 생겨나는 독립잡지와 출판의 형태로 작품을 발표해 볼 생각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독자의 펀딩을 받아 볼 생각은? 끝내 지면이 어려워서 블로그나 SNS에 게시할 생각은? 익명으로 혹은 이름을 바꾸어 아예 새롭게 시작할 생각은?

안 했을 가능성이 크고, 했더라도 창비에서 말렸겠지 싶다.

문학의 땅에서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내가 알던 사람들, 내가 잘 아는 시스템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게 아니다.

완전히 최초의 글쓰기로, 그러니까 정읍의 한 소녀가 서울의 구로 공단에 취직하고 영등포여고 야간반을 다니며 조세희와 김승옥을 필사하고 예대에 진학해 작가를 꿈꾸던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계속 신춘문예에 미끌어지다가 졸업하던 해에 본심에 오른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던 그때로 말이다.

물론 신경숙이라는 작가가 40여 년 전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리한 일이지만 지금의 복귀는 너무 고민이 없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아직도 내 책장에는 ‘신경숙 칸’이 있고, 대부분이 초판인 그 책들에는 작가의 사인이 다 들어가 있지만 언제쯤 그 책들을 다시 꺼내게 될지는 모르겠다.

허수경 시인의 죽음을 “곡진하게 돌아보는” 이번 복귀작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1.  김성중, 정상인  ★★★★

운동권 세대 혹은 사회과학 세미나 모임의 끝자락에 속했던 90년대 중후반 학번의 대학생들이 “맑스 탄생 200주년”인 2018년 5월 5일에 재회하는 이야기.

조금은 평범한 후일담 문학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초점화자인 ‘주영’을 1인칭으로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적절한 서술의 거리를 유지한 게 좋았다.

즉 ‘주영’의 자기 반성과 회고, 적당한 그리움과 어긋남 같은 것들이 ‘주영’의 내면에만 기대지는 않은 채로, 다양한 인물을 통해 전달되어서 뻔하게만 읽히지는 않았다.

최은영이나 김금희가 그려내는 2000년대를 전후한 대학가의 풍경과 흥미롭게 비교해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여전히 ‘이상주의’를 말하면서 어쩔 수 없이 애매하게 체념과 지속 사이에서 결론을 맺는 것이 이 소설의 약점이면서도 장점인 것 같다.

“그러자 두꺼운 책들이 읽고 싶어졌다. 두꺼운 책이 불러일으키는 감정들, 지식이 아닌 감정들. 그 감각을 느껴보고 싶었다. 두레, 풀잎, 동녘, 새날, 책갈피, 새물결, 이후…… 그런 출판사에서 펴냈던 오래전 책들을 넘겨보고 싶었다.”(p.133)

아마 이 대목이 핵심이지 싶고, 이론과 혁명, 우주와 미래 같은 것들이 ‘주영’에게로 다시 쏟아져 들어올 때, “대학로에 있는 사무실에서 종종 듣던” “시위대의 노래와 함성”이 들려오는데, 이 대목이 무심하게 지나가버린 것 같아 조금 아쉽다.

그때의 운동과 지금의 운동에 대해, 그러니까 사회과학 이론서를 읽고 혁명을 꿈꾸던 민중의 염원과 여성 주체를 통한 세계의 전복을 기획하는 일이 ‘주영’에게는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르다고 느껴지는 것일까.

이 작가는 어떤 글에서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쌍용”을 이야기했던 적이 있어, 이를테면 황정은이 <디디의 우산>에서 보여주었던 그 ‘연결’의 미학처럼, 조금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입장을 내가 바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3. 오선영, 우리들의 낙원  ★★☆

첫 소설집의 표제작인 <모두의 내력>은 ‘발굴팀’ 이야기였던 게 살짝 기억이 나는데, 다른 작품들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걸로 봐선 소설집을 챙겨 보지 못했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꽤 오랜만에 작품을 발표한 것 같다.

아마도 부산의 동래구 정도로 추측되는 지역을 배경으로 재개발의 문제와 그곳에서 보냈던 유년기의 기억을 병치시키고 있다.

이야기의 디테일이 꽤 갖추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디테일이 좀 부족해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이 소설의 다소 뻔한 구도때문인 것 같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의 여자아이가 맺는 관계의 양상과 그 갈등이 빈부 격차로 폭발한다는 설정은 그 갈등 자체도 그렇지만 그것이 서울과 지방의 격차, 재개발의 문제와 연결되기에는 조금 소박하고 단순해 보인다.

재개발 문제를 다루고 있는 소설의 제목이 ‘우리들의 낙원’이라면, 설령 그 소설에서 ‘낙원탕’, ‘낙원장’ 같은 이름이 등장한다고 해도 그 이야기가 어디로 흐를지는 너무 뻔하게 느껴진다.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 무리를 해서 지금의 ‘수빈’을 다시 만나는 게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4. 임국영, 헤드라이너  ★★★☆

등단작도 아마 장례식장에 간 밴드 멤버들 얘기였던 걸로 기억하고, 최근작인 <바크>도 뮤지션의 이야기였으므로 이 소설에 이르면 아마도 이 작가는 록밴드 정도는 경험했을 거라 짐작된다.

진정한 록 음악, 록 스피릿을 갈구하는 10대 후반의 밴드 ‘우드스톡’은 한 페스티벌에서 ‘폭거’를 일으키기로 기획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해체한다는 내용이다.

마치 김성중 소설에서의 맑시즘처럼, 록앤롤은 지나간 혁명이고, 또 그래서 시대착오적으로 그려진다.

동시에 지금 그 신념을 가진 이들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고, 이 소설의 서술자는 “이들을 쪼다처럼 보이도록 만들기 위한 연출”을 했지만 결국은 실패한 것 같다.

쪼다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쪼다처럼 보이지 않게 ‘나’는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이 보여주는 흥미 중 하나는 도대체 ‘나’는 누굴까, 라는 것인데 소설의 중간에 한 번,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먼저 합주실을 박차고 나온 ‘나’는 누구인 것일까.

사실은 브릿팝과 모던록을 좋아하는 ‘존’? 로맨스를 꿈꾸던 ‘빌리’? 여전히 알 수 없는 ‘씨드’? 설마 ‘로니’?

이 궁금증이 소설을 계속 되새기게 하긴 하는데, 결국은 소재적으로 ‘록’이 사용되었을 뿐이라는 느낌, 만화 <BECK>에 너무 기대고 있다는 느낌 같은 게 아쉬운 점으로 생각됐다.

박민규 같은 작가를 떠올리면 한참 늦었다는 생각도 들고.

 

 

5. 천운영, 금연캠프  ★★★☆

사실 복귀의 스포트라이트는 천운영이 받아야 한다.

2015년에 발표했던 <반에 반의 반>이 마지막 단편이지 않나 싶은데, 잘 알려져 있듯 ‘돈키호테의 식탁’이라는 스페인 식당을 차려 영업을 했었고 그간 작품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영화를 하겠다는 내용의 인터뷰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무튼 소설가로 돌아와 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천운영의 단편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었어서 이번에 연재를 시작하는 장편보다는 앞으로 발표할 단편들이 더 기대가 된다.

이 소설은 말 그대로 정부에서 운영하는 4박 5일의 금연캠프에 관한 이야기이다.

실제로 금연지원센터에서는 ‘전문치료형’이라는 유형으로 “4박 5일간 지역금연지원센터 병원등에서 의료인이 제공하는 전문 금연프로그램 제공 및 6개월 간 사후관리”를 전국 17개 지역금연지원센터에서 실시하고 있다. (https://nosmk.khealth.or.kr/nsk/user/extra/ntcc/67/services/nosmokeCamp/jsp/LayOutPage.do)

소설은 이 프로그램의 4박 5일을 8명의 입소자의 사연을 통해 하루하루 따라간다.

작가가 실제로 경험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디테일과 각 인물들의 사연, 목소리가 생생해서 읽는 맛이 있다.

아쉬운 점은 역시 주인공이라고 부를 만한 ‘윤다영’이라는 인물.

일단 이 인물의 나이가 35세라는 점은 이해하기가 좀 힘들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할아버지 담배를 훔쳐피우고, 그마저도 불가능해지자 담배를 구걸하던 “쓰레기년”, 그래도 “뽄드 빠는 것보다는 낫잖”냐는 말과 “편의점 알바 한번” 한 것이 취업의 전부인 이 인물은 너그럽게 봐도 25세 정도가 적당해 보인다.

35살의 여성 인물이 가진 사연이라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게다가 “아직 담배 맛을 몰랐다”는 마지막 문장을 책임질 인물이라면 한참 부족하다.

대체로 중년, 노년의 여성들 사이에서 아직 인생의 ‘맛’이라는 걸 느껴보지도 못한 세대의 인물로 ‘윤다영’을 내세웠다면 그것도 너무 단순해 보이고, 그 인물을 굳이 되바라지고 대책 없는 캐릭터로 설정한 것도 조금 뻔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감각은 다음 작품을 계속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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