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201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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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사 여름호를 읽었다.

우선 하이픈에는 ‘문학-연결’이라는 키워드가 제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쩌면 ‘문학-교육’이라는 주제어가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강의와 강좌, 그리고 여러 ‘만남’을 통해 연결되는 ‘독자’를 가늠하는 글이 대부분이었는데 대체로 흥미롭게 읽었다.

문지문학상은 정용준의 <다가오는 것들>이 선정됐다.

정용준의 베스트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축하를.

후보작 11편의 리스트를 보면서 내가 뽑는다면 어떤 작품을 뽑을까, 조금 고민해 봤는데 역시 결국 김봉곤이었고 그건 이번에 실린 소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에서는 신해욱의 두 작품이 엄청나게 좋았고, 황호덕의 문학사에 대한 메타비평, 최윤영과 다와다 요코의 인터뷰도 무척 재밌게 읽었다.

리뷰 지면은 두 권의 책을 나름대로 연결시켜 비평하던 방식을 포기(?)하고, 다시 일반적인 형태의 단행본 리뷰로 바꾼 것 같다.

생각해보면 문사는 한 2년 전부터 리뷰 지면에 대해 꽤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것저것 시도를 많이 했었는데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이 리뷰 지면이야말로 문예지의 ‘계륵’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은데, 계속, 함께 고민해 봤으면 한다.

신인상도 시, 소설 두 부문에서 수상자가 나왔다.

으레 그렇듯 평론은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소설에서 (리뷰와 함께) 역시나 최근까지 시도하던 짧은 소설도 포기한 것 같다.

여전히 40매 이하의 작품에 대해 나는 좀 애매하다는 생각이 있고, 그냥 일반적인 단편소설의 지면을 늘리기로 한 것이라면 개인적으로는 환영한다.

(그러나 이번 소설들이 대체로 긴 편이어서 어쩌면 그냥 한 차례 쉬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신인상을 포함하여 총 다섯 편이 실려 있는데, 아주 희귀하게도 전부 남성 소설가로 구성되어 있다.

당연히 의도한 것은 아니겠으나 내 기억으로는 최근에, 아니 2000년대 이후에 이런 적이 있었나 할 정도로 새삼스럽게 놀랐다.

 

 

1. 고종석, 아버지-의-이름  ★★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로 읽었기 때문인지 문동에 실린 작품에 비해 최악은 아니었다.

여전한 자의식 과잉과 엘리트 의식 같은 것은 오히려 이젠 익숙했는데, 이 소설에서는 이상하게 고종석의 기묘한 가족주의, 유아기적 퇴행 같은 것들이 ‘증상적’으로 읽혔다.

정신분석학적 표지를 한껏 머금은 제목과 고종석의 분신인 ‘소설가 K’가 중증 강박신경증 환자라는 설정 때문에 더 그랬던 것일지 모르겠다.

아무튼 예순이 넘은 ‘소설가 K’가 여전히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부모와의 화해를 도모한다는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특히 어머니의 ‘무학력’에 대한 집착, 거기에 성 노예 문제를 겹쳐 생각하는 발상, 성인이 된 K의 봉급을 퇴직할 때까지 어머니가 관리했다는 사실(거기에 대해 ‘K’도 ‘K’의 아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는 점까지) 같은 게 강박적 텍스트를 구성하는 요건으로 굳이 필요했을까.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 소설은 프로이트 이론의 서사적 현현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읽기에는 다소 옹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의 K’와 ‘이 소설을 쓰는 K’의 그 강박적, 유아적 캐릭터를 겹쳐 읽는 과정이 심심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지면이 아까운 것은 사실.

 

 

2. 박형서, 비탈에서  ★★☆

소설의 도입부가 다소 평범했는데, 점차 긴장감을 쌓아가는 방식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야기가 너무 많이 생략되어 있고, 좀 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과 무자비하고 막대한 권력을 가진 ‘손뼉 치는 자’가 공존하는 이 세계에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것에 저항하는 ‘거인’이라는 존재가 점차 사라져가고.

이 압도적인 권력 아래에 숨죽인 채 살아가는 ‘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 ‘현이’마저 더 큰 존재인 ‘손뼉 치며 웃는 자’에 희생되는 이야기인데, 너무 설명이 없다.

그런데 충분히 설명하고 좀 더 자세히 써 줬다면 나았을까, 생각하면 또 갸우뚱하게 된다.

일단 이 이야기의 구도가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다수의 평범한 민중, 압도적인 권력과 힘을 가진 자(세력), 그리고 거기에 대항하려는 존재들.

결정적으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거인’의 장례식(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결국 ‘울음’을 숨기지 못하고 애도를 공유하는 장면이, 그리고 아내를 비롯한 사람들이 무언가를 “결정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 여지없이 혁명과 투쟁의 서사를 떠올리게 한다.

모두가 숨죽이고 있을 때, 한 ‘꼬마’가 연대의 불씨를 당긴다는 점도 너무 클리셰고.

내가 읽은 박형서는 원래 기복이 좀 있는 편이고, 이 소설은 명백히 실패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3. 양선형, 가면의 공방  ★★★★☆

굳이 줄거리를 생각해보면, 가면을 제작하는 공방의 주인 ‘인간문화재 옹’이 있고 그곳에서 일하게 된(대체로 청소) ‘그’가 있다.

‘그’를 포함한 공방의 ‘조수’들이 일종의 반항을 일으키고 결국 ‘인간문화재 옹’을 ‘형장의 이슬’로 만드는 이야기, 정도로 요약하자.

나는 이 소설을 지금 두 번째 읽었고, 어쩌면 이 작품이 양선형의 정점이 아닌가도 생각하고 있다.

슬쩍 이야기하고 지나가지만 이 작가가 가진 관심사는 들뢰즈 식의 ‘기관 없는 신체’인 것 같고, 들뢰즈가 그랬듯 이 작가 역시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업 같은, 절단되고 파편화된 신체 이미지를 통해 서사를 만들어나가는 것에 대해 일관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전작 <프록코트 혹은 꼭두각시 악몽> 역시 염두에 두고)

그리고 그는 “그러나 소설은 생각했다” 같은 문장을 갑자기, 군데군데 삽입해서 텍스트의 겹을 증폭시키는데, 소설의 결말이 도입부와 만나는 방식, 쏟아지는 비와 형장의 이슬, 그 물방울 속에 등장한 운동장의 야구부 감독, 소년, 그리고 ‘가면’ 같은 이미지들이 능수능란해졌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탁월한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양선형이 유머스러해졌다는 건데, 그건 드디어 이 작가가 강약 조절을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토와 토토”의 이야기, 그러니까 승합차 자루 속에 들어 있는 근육질의 남자 ‘오토’와 그의 연인 ‘토토’, 그리고 ‘설거지에 유용한 사람’의 희곡(극)적 대화는 서술의 거리와 형식을 가늠하는 이 작가의 실험을 흥미롭게 따라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 (물론 이 설정 자체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인데, ‘소설은 또, 항상 다시 써야 한다’는 식의 사유, “아무것도 아닐 지속과 정말 아무것도 아닌 소설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는 문장은, 아무리 ‘소설’이 서술자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해도, 보르헤스를 언급하는 소설의 마지막 단락이 다소 반복적이고 불필요한 진술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4. 김봉곤, 그런 생활  ★★★★★

어쩔 수 없이 또 같이 얘기하게 되는데, 마치 박상영이 <대도시의 사랑법>으로 두 번째 소설집을 완벽하게 마무리한 것처럼 김봉곤 역시 <그런 생활>로 자신이 가진 문학적 역량을 모조리 끄집어낸 것 같다.

이 소설의 달뜬 모든 문장이 좋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 각자의 이유로 사랑스럽다.

김봉곤 특유의 디테일과 섬세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야기의 완급 조절, 알맞게 등장하는 서사적 포인트, 어김없는 단단함과 여지없는 흔들림 같은 게 하나도 빼놓지 않고 좋다.

소설 속 ‘봉곤’이 ‘형’의 라인 알림 소리를 듣고 시작되는 갈등 장면은 내가 더 전전긍긍하며 읽었고, ‘C 누나’의 알찬 상담에 감탄하면서, 결국 ‘동거’를 선택하는 ‘봉곤’도 참 어쩔 수 없는 사람이네, 하면서 내내 소설 속에 빠져들어 있었다.

그리고, ‘엄마.’

일전에 <라스트 러브 송>도 그렇고 김봉곤 소설에서 경상도 엄마가 등장하면 내가 좀 정신을 못 차리나 싶기도 한데, “니 진짜로 그 애랑 그런 생활을 했나?”라던 엄마가 “기죽지 말고. 어디 가서 기죽을 필요 없고, 미우나 고우나 내 아들이니까. 내 새끼다.”라고 말할 때 어떻게 눈물 찔끔 안 차오르겠나.

물론 그 감동 뒤에 “일단 저축을 해라 저축. 메이카 사 입지 말고.”와 같은 포인트 역시 놓치지 않았고. (예, 어머니…)

‘그런 생활’이라는 말은 결국 소설이 제목이 되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를 곱씹게 하는데, ‘엄마’의 입에서 나온 그 표현은 이를테면 ‘그 짓거리’, ‘그따위로’ 같은 말이 아니라 ‘그런’이라는 수식어로 나름의 중립적 태도를 유지하려는 애씀 같은 게 느껴지고, ‘생활’이라는 말 역시 고르고 골라 무수한 함의를 띤 표현 중 하나를 ‘엄마’는 겨우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 속 ‘나’가 고민하는 바, “여름의 춤”이라는 그럴 듯한 제목이 아니라 “그런 생활”을 택한 것은, 김봉곤이 늘 그렇듯, 이것이 문학이기 이전에 자신의 삶이라는 선언이자 다짐이다.

그것은 다시 “여름, 스피드”라는 첫 소설집의 제목을 떠올리게 하는데 두 번째 소설집의 제목이 “그런 생활”이 된다면, 김봉곤의 소설 세계가 낭만적 퀴어 로맨스에서 일상적 퀴어 생활물로 이동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편집자’의 일상 같은 게 부각되는)

그리고 그 이동은 ‘사랑’을 결코 버리지 않은, 더하기의 차원이므로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고.

게다가 이 소설은 ‘소설가’로서의 김봉곤의 ‘소설론’도 엿볼 수 있는데, 그가 등단작에서부터 예민하게 인식해 오던 것이긴 하지만 이 소설이 보여주는 잡식 산문의 형태야말로 ‘소설’이 주는 자유라고 작가는 믿는 것 같다.

흔히 소설은 ‘작가-서술자-인물’의 전달 구도를 형성하고, 그것이 텍스트를 통해 다시 ‘독자’에게로 가 닿는데, 이 ‘겹’에 대해(앞서 양선형 소설의 ‘가면’이 그렇듯) 날카롭게 인식하는 작가만이 ‘현대 작가’라고 나는 믿고 있다.

김봉곤의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 심지어 소설이라는 장르는 커밍아웃에 최적화되어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다소 무리하고 단순한 생각까지 해보았는데, ‘김봉곤이 김봉곤을 통해 김봉곤은 게이입니다’라고 말할 때 생겨나는 그 여러 층위와 겹, 그리고 그것을 통해 확정할 수 없는 정체성의 차원들 같은 게, 혹시 소설이 가진 근본적인 속성 중 하나가 ‘퀴어’한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럼 점에서 김봉곤과 박상영, 이 두 작가에게는 개인적으로 정말 고맙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고.

아무튼 이 완벽한 소설에서 한 장면의 킬링 포인트를 발견했는데, 데이트를 하러 나가는 ‘나’가 신발을 바꿔 신을 작정으로 “밑창 닳지 않게 사뿐사뿐!” 걷는 장면이다.

아, 동성의 데이트는 이런 방식의 이벤트도 가능하겠구나(물론 사이즈가 어느 정도 맞아야 하겠지만) 싶어서, 그저 좋았다.

 

 

5. 이원석, 없는 사람  ★★★☆

신인상 수상작.

꽤 오랜만에 만나는 젊은 남성 작가가 아닌가 싶은데.

우선 확실히 매끄럽고 안정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조직하고 끌고나가는 힘이 있는.

그런데 그것은 곧 전반적으로 좀 낯이 익다는 말이기도 하고, 소설의 설정, 인물, 목소리 같은 게 기성 작가의 느낌과 겹쳐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는 ‘임현’)

소설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가 병렬되면서 진행되는데, 도입부가 너무 충격적이어서인지 흥미가 조금씩 반감되는 느낌이었다.

소설의 서두는 아마도 최근 읽었던 무수한 단편 중 가장 압도적인 수준이라고 해야 할 텐데, 차를 빼 달라는 전화의 목소리에서 “제가 지금 여기서 그 자리로 뛰어내리려고 하는데 그러면 그쪽 차가 많이 파손될 것 같아서요.”라는 말이 들리는 순간 순식간에 몰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들, ‘미소’와의 갈등, ‘그 사람’과의 통화 같은 것들이 좀 에너지가 부족하다 느껴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떤 태도를 보여야 더 합리적인지, 어떻게 생각해야 더 윤리적인지를 고민하느라 이야기를 놓쳐버린 느낌.

그랬을 때 결국 이 임팩트 있는 이야기가 ‘도망가는 나’에 대한, “없는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었다고밖에 판단되지 않고.

심사평에서 이 소설을 두고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감각을 운운하는 걸 읽었는데, 아마도 ‘너(미소)’가 여성으로서 직장에서 당하는 차별과 멸시가 표면화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건 정말 PC함을 표면적으로만 읽은 것이고, 이 소설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감각을 인상적으로 보여주려 했다면 자살하려는 사람을 막기 위해 ‘신고’부터 했어야 한다.

갑자기 여행지를 바꾸자는 ‘너(미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오해’들을 바로잡을 노력을 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튼 탄탄하게 쓰인 소설은 맞고,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의 수준도 검증되었으니 앞으로 쓸 작품을 기대하면서 행보를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4 Responses

  1. 김태민

    올려주시는 글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참 그런데 혹시 정용준의 이 아니라 이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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