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들 / 대산문화, 201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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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들>, <대산문화> 여름호에 실린 작품을 읽었다.

<문학들>은 늘 그렇듯 세 편의 소설을, 지역 작가, 신인 작가, 중견 작가로 구성하고 있고 <대산문화>는 항상 두 편의 소설이 실리는데 이번에는 권여선 작가의 작품만 있다.

지면의 변화는 아닌 것 같고, ‘펑크’일 가능성이 크지 않나 싶다.

아무튼 간단하게 평을 남겨 놓으려 한다.

 

1. 김해숙, 매달린 남자  ★★☆

아주 거칠고 단순하게 요약하면 아버지의 세계를 부수고자 하는 아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아들 ‘나’를 돕는 조력자들(물론 그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뿐, 의도치 않게 돕는).

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산만하고, 문학적 상징이 총동원된 나머지 결국 뭘 말하려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우연히 머물게 된 외국인 여행객들과 고시원 총무 일을 그만두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나’가 함께 ‘의자 돌리기 게임’을 하는 장면이 소설의 핵심 사건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그 의미를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전반적으로 과잉되었다는 느낌.

 

2. 안준원, 미래의 죽음  ★★☆

성공한 프로그래머였던 ‘나’는 이제 현업에서 물러나 지방 소도시에서 아내와 함께 살아가는 중이다.

어느 날 후배가 도저히 찾을 수 없는 프로그램의 오류를 한 번 검토해 달라고 부탁을 해오고, 그 와중에 ‘나’는 눈 앞에서 아내의 죽음을 목도하는 현상을 겪게 된다.

짧게 재생된 눈 앞의 영상에서는 아내의 장례식장 풍경이 보이는데, 그 후 ‘나’는 아내의 죽음을 막기 위해, 또 원인을 찾기 위해 강박적인 모습들을 보인다.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자기 경험을 이해하려던 ‘나’는 결국 “나라는 현상 자체를 멈추기로” 하고 그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기본적으로 장르적 모티프를 전제로 하는데 ‘장르적 재미’가 별로 없다는 게 일단 문제다.

그 말인즉슨 서사에 허점이 많다는 것인데, 이 소설이 이른바 타임리프물로 여겨지는 무수한 작품들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고개를 젓게 된다.

다시 이 소설을 로맨스로 읽기로 하면 어떨까.

나로서는 이게 제일 불만인데, 소설 속의 ‘나’가 아내를 잃게 되는 것에 대해 무척 두려워하는 장면들이 별로 공감되지 않았다.

왜 ‘나’는 그토록 아내의 죽음을 염려하는가, 왜 ‘나’는 아내를 그토록 사랑하는가에 대해 이 소설은 그저 ‘부부’라는 사실밖에 알려주지 않는다.

이 작가가 그동안 썼던 작품들이 ‘연인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을 때, 그 연장선상에서 같이 읽힐 수는 있지만 아내의 이름을 굳이 ‘미래’라고까지 설정하면서 그 작의를 드러내는 것은 아쉬운 판단이다.

아내의 죽음을 모니터의 영상처럼 잠깐 경험한 ‘나’의 이야기를 구상한 후 수습할 수 없는 지점으로 서사가 진행되어 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이 작가도 ‘어등이어’의 동인인데, 대충 ‘어쩌다 등단은 했는데 이제 어떡하지’라는 정도의 의미임을 어디서 주워 들었다.

 

3. 한유주, 구를 원하기 위하여  ★★★☆

누군가를 잃은 고통을 지속적으로 반복해오던(‘개의 짖음’ 시리즈) 한유주의 작업이 조금 방향을 튼 것 같다.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면 지구가 둥글다고 믿는 ‘나’와 평평하다고 믿는 ‘너’의 만남과 헤어짐을 그리는 소설.

즉 ‘구’와 ‘원’의 관계이고, 소설 말미에 기록되어 있듯 다른 지면에 발표될 <원을 구하기 위하여>까지 함께 읽어야 무언가 정확한 의미를 말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이 소설은 구체와 상상을 오가며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를 보여주면서, 또 서로가 얼마나 다른지를 끝내 확인해버리는 과정을 복기하면서 결국 그런 일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고 회의하고 체념하는 단계에 다다르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 어디서 봤지만(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개였던 것 같다) 실제로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여전히 지구의 끝이 어딘가에 있다고 확신하고,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함께 지구의 끝을 찾아가 보기로 한 ‘나’는 “시작에서 내가 너를 당겼으므로, 끝에서는 밀었어야 할까?”라고 계속 자문한다.

원심력과 구심력 사이에서, 지구의 중력 아래에서 ‘우리’는 어떻게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지 한유주는 다소간의 비약을 무릅쓰고 다시 계속 물을 작정인가 보다.

 

4. 권여선, 무구  ★★★☆

단편은 꽤 오랜만이라, 또 그간 권여선 작가의 단편이 보여준 임팩트를 생각하며 기대를 너무 했던 것 같다.

환갑을 맞이한 노부부의 안온한 노후생활을 보여주며 시작한 이 소설은 ‘소미’가 대학 동기 ‘현수’와의 만남을 떠올리면서 저간의 사정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전개된다.

‘현수’라는 이름 때문에 소설 중반에 이르기까지 ‘남성’으로 착각해서 미묘한 성적 긴장감을 갖고 읽었는데 아무래도 작가가 의도한 게 아닌가 싶고.

아무튼 부동산 중개업자로 변신한 ‘현수’를 만나 ‘소미’가 어떤 땅을 사게 되고, 그 땅에 문제가 생겨 ‘현수’는 잠적해 버리고, 난감하고 황망해 하던 ‘소미’는 결국 그 시간들을 견뎌 부유한 노후를 보내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 속으로 틈입하는 것들은 운동권이었던 그들의 대학 시절, ‘현수’는 학출인지 노동자인지를 만나 이혼과 갖은 고생을 겪고 현재에 이르렀다는 것, 그리고 식당에서 마주하는 ‘미쳐가는 가여운 부부(연인)들’이다.

즉 세대와 젠더 문제가 여기저기 깔려 있고, 권여선 특유의 날카로운 포착이 여전히 눈에 띄기는 하는데. (만둣국 식당에서의 장면 묘사는 정말 압도적이다)

이 소설이 겨냥하고 있는 지점을 잘 모르겠다.

최근 전작들에서 강렬하게 드러낸 그 ‘시선’들이 그냥 중년의 회한과 허무, 자기연민 같은 차원으로 희석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거기에 각자 골프장, 사우나, 뷰티숍, 헤어숍, 한의원, 중식당 룸 같은 곳에서 소일하는 인물들이 “소미는 외로웠고 앞으로 자신이 더 외로워질 것을 알았다”는 문장을 마지막으로 내뱉으면 좀 난감해진다.

세신사가 ‘소미’에게 “이렇게 때가 없는 분은 처음 봐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제목인 ‘무구’를 당연히 염두에 둔 것이고, 권여선의 최근 작품들에서 지속적으로 부각되는 ‘모른다’는 것, ‘순진하다’는 감각과도 연결되기는 하는데, 만약 이 소설이 일종의 세태 풍자가 목적이었다면 모를까, 전반적인 소설의 톤과는 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3 Responses

  1. 올초부터 새로 계간지 나올 때쯤이면 매일 블로그 방문하네요. 헤헤. 잘 읽었습니다. 가을호 리뷰 기대하고 있습니다.

  2. 올 초부터 계간지 나올때쯤이면 생각 날때마다 방문합니다 ^^. 글 잘 읽었습니다. 가을호 리뷰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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