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201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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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다시 가을호의 시즌이 시작되었고, 역시나 창비가 가장 먼저 나왔다.

아직 잡지 전체를 통독하지는 못했지만 일단은 한영인, 전기화 평론가의 글과 신인상을 받은 임정균 평론가의 글을 재미있게 읽었다.

다소간의 불만과 반박하고 싶은 지점 같은 것도 없지 않았는데, 그 자체로 2019년의 한국소설이 얼마나 흥미로운 판인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신인상을 포함해 총 4편이 실려 있다.

박솔뫼와 배수아의 작품이 같이 실렸다는 게 일단 눈에 들어오는데, 박솔뫼는 2010년, 2013년에 한 번씩 단편을 실었고, 배수아 작가는 2009년 가을호 이후 10년 만에 창비에 작품을 실었다.

(창비는 정말로 계간지 시스템에 있어서는 모범이다. 자체적으로 아카이빙이 너무나 잘 되어 있어서 누가 언제 작품을 실었는지 금방 찾을 수 있다.)

최대한 간단하게 평을 남기려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1. 박솔뫼, 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림  ★★★★★

박솔뫼에게 기대했던 바를 여지없이 충족 지켜준 작품이다.

<그럼 무얼 부르지>와 <겨울의 눈빛> 그리고 최근 <사랑하는 개>의 세계가 한 곳에 모여든 느낌이 들 정도로, 박솔뫼의 완성형 같기도 했다.

제목이 사실상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에 대한 자료조사 차 광주로 온 ‘영우’와 ‘상문’, 그리고 ‘일본이 아키비스트’의 며칠 간의 일들이 주를 이루지만 소설은 이들이 마주하는 여러 인물의 전사를 통해 꽤 확장된다.

‘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릴 수 있는’ 세대와 계급, ‘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리는 것’이 영화 그 자체보다 더 큰 의미를 띠게 되는 예술과 해석의 문제까지 이 짧은 소설은 다룬다.

‘이두현’의 영화와 ‘서명운’의 영화 사이에서 예술을 그 작가 개인과 얼마나 분리할 수 있는지에 대해 ‘현재’의 우리는 다시 고민할 수밖에 없고, ‘영화 투자자 조구택의 역할과 영향’이라는 논문이 그 ‘우수논문상’을 받는 ‘문화 연구’의 시대에 예술이란 무엇인지 역시나 고민할 수밖에 없다.

세대와 계급과 국가와 역사, 예술과 비평 같은 것들이 마구 얽혀 있는 이 텍스트는 탁월한 소설이 늘 그렇듯 부분을 떼어 이야기할 수 없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5.18 기념관 광주의 자료들(기억들)이 유일하게 이름이 없는 ‘일본인 아키비스트’를 통해 재구성된다는 점은, 박솔뫼의 전작이 보여주었듯 1980년 이후의 세대에게는 ‘아카이빙’을 통한 실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의 연구, 비평, 해석의 관점에서 소위 ‘아카이브로서의 예술’을 추구하는 정지돈이나 한정현 같은 작가들과도 상통하는 점이라고 생각되는데 그것이 얼마나 ‘유효’한지에 관해서는 쉽게 말하기가 어렵겠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박솔뫼의 문장, 그러니까 ‘비문의 소설’이라고 할 만한 스타일이 너무도 능숙하게 녹아 있고, 순간순간 보이는 디테일의 활용, 시공간적 감각도 감탄스러울 정도다.

결정적으로 이 소설의 마지막 문단이 놀랍도록 아름답고 탁월하다는 점이 망설임없이 베스트로 꼽게 만들었는데, 조금 과장하자면 마치 프루스트의 문장을 읽는 것 같았다.

보관실에 갇힌 사람은 죽지 않고 잘 살아가고 짝이 없는 사람은 벽에 대고 테니스를 치다 어느새 테니스장에서 가장 잘 치는 사람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쉬지 않습니다. 한복집에서 커피를 마시던 주인은 맞아 그래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은 영원하지 않지만 때때로 놀랄 정도로 반복되는 일이야. 그리고 그 사람은 여전히 한복을 입고 있지 않고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p.163)

 

 

2. 배수아, 우루의 딸 우루  ★★★★

왜 우루의 딸도 ‘우루’인지 결국 알게 되는 소설.

“화가란 마치 개처럼 사물을 보아야 한다. 가만히, 그리고 동시에 거의 외면하면서”라는 세잔의 말을 빌어 세계를 바라보는, 또 그려내는 방식에 대해 여성 서사로 말하는 작품이다.

찰나의 순간이 왜 영원의 반복이 되는지 소위 ‘미장아빔’의 기법으로 보여주는데, 홀린 듯 읽게 되는 ‘주술적 텍스트’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최초의 여인’을 찾아나서는, “어머니가 죽었다 내 기원의 징후가 사라졌다!”로 시작하는 이 서사가 다소 모호하면서도 단순해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기원으로의 회귀라기보다는 다시 생성되는 원형이나 신화에 가깝겠지만.

배수가가 좋아하는 키워드들이 많은 소설이지만 또 그만큼 익숙하기도 했다.

 

 

3. 성석제, 조정의 기술  ★★

이 작가에 관한 여러 이슈들을 다 떠나서 ‘이런 소설’조차도 재미있게 쓰지 못하면 성석제가 설 자리가 있을까 싶다.

대선 후보의 선거 캠페인을 준비하기 위해 미국에 있는 ‘코디네이터’, 즉 선거 전문가이자 킹메이커인 누군가를 비밀리에 만나러 가서 협상을 펼치는 이틀 정도의 이야기인데, 좀 심하게 재미가 없다.

정치 공학의 긴장감이나 정세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 같은 건 고사하고 최근 활발하게 창작된 각종 정치 스릴러의 흐름조차 전혀 못 따라가고 있다.

이런 장르야말로 소위 무협소설류의 남성 암투 서사이고, 어쩌면 성석제는 이 작품을 자신 있게 내놓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하건대 대부분의 독자는 중간도 못 가 덮어버릴 것이다.

심지어 분량마저 긴 편인데, 다시 강조하자면, 다른 말 필요 없이 정말이지 재미가 없다.

 

 

4. 정은우, 묘비 세우기  ★★★

청년 세대가 겪는 불합리와 불평등의 감각, 도처에 산재한 죽음의 위험, 그 안에서 어떻게든 애정을 형성하거나 혹은 ‘을’끼리 싸울 수밖에 없는 구조와 관계들.

이런 것들이 최근 주목받는 소설의 형태인가보다.

문지의 신인상 수상작도 그랬고, 이 작품도 그렇다.

(작품으로 보면 놀랍게도 이번 창비와 문지의 수상작은 사실상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일단 불만부터 얘기하자면 소설이 시작되고 이 다감한 인물 ‘재언’이 두 페이지만에 “점심시간쯤 연주는 재언이 사다리에서 떨어졌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는 병원으로 이송 도중 사망했다”라는 문장으로 생을 마감하는데, 너무 ‘쉬운’ 방식 아닌가?

이 소설의 핵심은 이른바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통칭할 수 있을 사회의 하층 노동자들이 벼랑 끝에 놓인 채로 삶을 힘겹게 영위하고 있으며, 다시 이 사회는 그들끼리 서로를 짓밟고 싸우도록 몰아간다는 것인데 이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재언’의 죽음이 반드시 필요했을까.

또한 ‘재언’의 죽음이 결국 자신의 처지와는 무관하게 다른 ‘을’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돕는 일종의 ‘헌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정은 너무 인물을 극단으로 몰고간 게 아닌가 생각도 들고.

또 아쉬웠던 점 하나는 연인을 떠나 보내고 혼자 남은 ‘연주’가 보이는 애도의 서사나 부재에 대한 감각 같은 것이 그다지 새롭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소설에서 너무도 자주, 꾸준히 봐 온 익숙한 이야기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이 소설은 어쨌든 ‘아이스크림 묘비’로 가득찬 싱크대의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잔상이 오래 가고, 중고교 수학 문제집을 출판하는 회사의 생리와 디테일, ‘최선생’과의 갈등 장면 등이 ‘안정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여느 신인상이 그렇듯, 이 작품 하나만으로 작가의 역량과 가능성을 평가할 수는 없다.

이 소설가 역시 함께 낸 다른 하나의 작품이 존재하고, 그 작품의 성취가 고려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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