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2019년 가을호

 

문학과사회 가을호를 읽었다.

이제는 잡지를 받아보면 하이픈부터 들추게 되는데,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비평가들의 본격 평론(?)이 실려 있다.

적어도 이백 자 원고지 60매 이상에 해당하는 비평 글은 이제 문예지에서도 찾아 보기가 쉽지 않고, 공론장에서의 역할, 독자의 호응도 예전 같지 않은 듯한데, 이런 측면에서 문사의 하이픈은 비평의 독자들에게 큰 의미가 있는 지면이다.

다소 의아하거나 갸우뚱하게 만드는 글도 있었으나 실린 글들을 대체로 흥미롭게 읽었다.

아무래도 최근 담론의 핵심은 ‘1인칭’, ‘나’, ‘당사자성’ 같은 키워드인 것 같다.

페미니즘 퀴어 담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의 글쓰기가 단순히 작가와 작품을 분리하거나 일치시키는 문제를 넘어서 논의되어야 함은 이제 상식이 되었고, 도대체 지금 문학의 ‘새로움’이 무엇인지를 비평적 언어로 구축해나가는 것이 비평가 ‘나’의 역할처럼 보이는데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작가인 ‘나’와 화자인 ‘나’와 읽는 ‘나’와 읽고 쓰는 ‘나’ 사이에 무수하게 분화된 ‘나’들이 미묘하고 예리하게 포진해 있어서 그 차이를 발견하고 다시 그것을 어떤 현상이나 개념으로 포착하는 일은 아예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 ‘나’와 관계 맺는 ‘너’, 그리고 ‘우리’나 ‘공동체’의 문제까지 더해지면 현실이 아닌 ‘소설’을 어떻게 읽어내야 할지 막막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래서 지금 한국소설을 읽는 행위는 역동적이라는 사실이다.

추상적인 논의가 반복되고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식의 공허한 문학적 담론이 아니라 조금씩 변화하고 나아지고 있다는 감각, 새롭게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 등 갱신의 현장을 한국문학의 독자들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문학장이 일종의 암흑기처럼 느껴지기도 할 텐데 그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일은 결코 없다는 확신이 나에게도 있다.

리뷰 지면의 글도 좋았다.

작품 선정도 그렇고 필자들의 입장과 태도도 흥미롭게 읽히는 지점이 있었다.

시 지면은 시인들이 주는 무게감이나 기대치가 커서인지 다소 무난하게 읽혔다.

소설은 네 작품이 실려 있고, 정지돈 작가가 장편 연재를 시작했다.

늘 연재소설은 그냥 휘릭 훑어만 보는 정도인데 정지돈의 이 계열, 그러니까 ‘혁명’류 서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야기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단편소설들은 작품마다 너무도 결이 달랐지만 또 공교롭게도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동시에 고민하게 만들기도 했다.

 

 

1. 윤이형, 버킷  ★★★☆

대학 선후배 사이인 ‘류미’와 ‘태정’이 지속적으로 메일로 교류하면서 각자의 힘든 시기를 보내고 대전의 ‘태정’ 집에서 만나는 이야기.

충분히 공감되는 지점이 많았다.

그러니까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 잘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이고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스무살의 ‘류미’였다면 결코 가거나 사지 않았을 ‘성심당’의 빵을, ‘태정’은 대전에 살면서도 단 한 번도 먹어보지 않았던 그 빵을,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같이 나눠 먹는 것이 이 작품의 메시지로 보였다.

그것은 곧 소위 ‘정상적’이라거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것을 거부하기만 하던 “과잉된 자의식”의 변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또 우리는 서로가 너무나도 다르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해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그 방향은 같다는 장면처럼 보이기도 하고.

소설의 제목에서 언급되었듯 이 두 여성이 각자 일종의 ‘생존 버킷 리스트’를 만들고 이혼, 음악 활동 중단 같은 일들을 견뎌내면서 그 투쟁의 과정을 공유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간 윤이형이 자주 보여준 일종의 ‘여성 연대 서사’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일단 아쉬운 점은 이 이야기 자체, 또 인물 자체의 매력이 좀 떨어지는 것 같다는 점이다.

‘류미’도 그랬지만 개인적으로는 ‘태정’이 그렇게 매력적인 선배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메일로만 소통하던 그들이 실제로 12년 만에 처음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 그 흥분과 설렘 혹은 모종의 긴장과 불안이 나에게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또 이 두 사람이 만나서 나누는 대화가 사실상 각자의 입장 차이를 보여주는 일종의 논쟁으로 전개되는데 이 ‘말해주기’의 방식 역시 인물과 상황으로의 이입을 조금 방해했다는 생각도 든다.

결정적으로는 윤이형의 전작들이 보여주던 팽팽한 대립과 간극의 확인이 여전히 ‘모르겠다’의 차원에서 갈무리되고 있다는 느낌이어서 조금 심심했달까.

지금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이런저런 일들을 겪어가며 타인과 관계를 맺어가는 일이 얼마나 지난하고 힘든 것인지를 너무도 잘 보여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 작가는 딱 그곳에서 멈춘다.

그러니까 ‘류미’나 ‘태정’ 중에 결코 선택하지 않는데, 이 중립이 나로서는 좀 아쉽다.

어떤 입장이 충분히 반박될 수 있고, 비판에 직면할 수 있음이 분명하더라도 끝내 그것을 결심하고 선택하는 인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지점을 결코 양보할 생각이 없는 어떤 인물을 나는 보고 싶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미 이 소설의 인물들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작은마음동호회> 이후라면, 조금 더 뜨겁고 치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 이홍, 스토커  ★★

처음 읽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2007년에 <걸프렌즈>로 오늘의작가상을 받았고, <성탄피크닉> 같은 장면을 쓰기도 했는데 읽지 못했다.

2000년대 하나의 소설 풍경을 형성했던, 이제는 좀 낯설기까지 한 ‘칫릭’이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떠올렸고 아마도 그런 계열의 작품을 썼던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찾아 보니 2011년에 1회였던(지금은 개편된) <웹진문지문학상>에 <나의 메인스타디움>이라는 작품으로 후보작에 올랐던 이력이 있다.

그러고 보니 86년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참석해 외국 선수단 환영을 준비하던 한 여학생의 에피소드를 읽은 기억이 났다.

그 소설은 창비 2010년 여름호에 실렸었고, 이듬해 문지문학상 후보로도 올랐는데 그 이후 별다른 활동이 없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칙릿 소설에 대한 문단의 관심이랄까 주목이 급속도로 식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봤는데, 아무튼 이런 이력을 굳이 찾아보고 쓰는 이유는 이 소설에 대해 할 말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작가여서 기대감이 있었고, 소설 도입부는 어쨌든 흥미로웠는데 얼마 못 가 그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다.

일단은 뭐라고 명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로맨스를 기반으로 한 스릴러? 혹은 추리물에 가까운데 그런 장르적 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게 ‘스토커’가 누구인지, ‘스토킹’의 에피소드가 얼마나 클리셰적인지를 떠나서 이 작가가 이야기를 장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인물이나 상황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생기지 않은 상태에서 자극적인 사건들만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러니 사건의 결말이 나름대로 밝혀지는 부분에서조차 무언가가 ‘해소’되었다는 느낌이 없다.

선정적이고 불편한 시선으로 여성 인물을 형상화하는 것을 얼마간 장르적 관습으로 치부한다고 해도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많았고 몇몇 디테일도 썩 효과적이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3. 허희정, 실패한 여름휴가  ★★★★

이제 거의 첫 소설집 분량의 작품이 모이지 않았나 싶다.

그간 써 왔던 작품들이 대체로 이야기 자체는 희미하고 모호하지만 아주 인상적인 이미지가 꽤 오래 남는데 이 작품 역시 그랬다.

이 소설은 “도무지 온점을 쓸 수 없는 나날이 반복”되는 이야기인데, 아주 단순하게 말해 ‘나’가 ‘너’와 떠난 여름휴가지에서 버림받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여러 편견이 깨져나가는 경험을 했다.

그냥 자의식 과잉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나’의 사유로만 점철된 작품이겠거니 했는데, ‘너’와의 이별이라는 분명한 사건이 있었고.

도입부의 공간 묘사가 고시원 같은 폐쇄적인 거주지를 연상케 했는데 이 곳이 여름휴가지의 숙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 공간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게 되기도 했다.

당초 수영장으로 가려고 했던 휴가가 어느 해변 마을의 허름하고 좁은 방으로 바뀌고, ‘너’는 ‘나’를 기만하고 방치할 때, ‘나’가 느끼는 온갖 종류의 감정들, 즉 분노와 좌절, 절망과 공포, 고통과 파괴, 자해와 가해의 욕망, 권태와 허무 같은 것들이 난만하게 이해되었다.

결국 모든 것은 실패한다.

여름휴가는 물론이고, ‘나’와 ‘너’의 관계, 그리고 ‘너’를 배신하고 죽이고 싶다는 생각, ‘나’를 불안과 고통의 극단으로 고문하겠다는 다짐 같은 것들이 모조리 실패하고, 이 소설 역시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이 “미완의 상태”가, 즉 욕조 속의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이 방에서 여전히 머무는 ‘나’가 충분히 설득력 있고 매력적이다.

첫 소설집으로 묶이면 더욱 분명하겠지만 자기 색깔이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4. 박선우, 그 가을의 열대야  ★★★

작년에 등단하고 거의 매 계절 주요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이게 다섯 번째 소설 정도 되는 거 같은데 역시 곧 첫 책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작가는 굉장히 특이한데, 거의 모든 작품에서 여성 화자를 내세운다.

또 퀴어 인물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번 작품은 아예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이다.

현재 한국 문학장에서 남성 작가가 여성 서사를 쓴다는 것은 여러 차원에서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이 작가는 별로 주저함이 없는 것 같고, 그 점에서 일단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한 편이다.

‘나(은수)’가 ‘너(J)’와 헤어진 뒤 5년이 지난 시점에 이른바 ‘느린 편지’ 한 통을 받게 되고, 그들이 연인이었던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물론 편지가 5년 만에 왔을 뿐이고 이들이 헤어진 시점은 알 수 없으나 그 계기가 ‘나’의 집안에서 벌인 숨바꼭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부모님이 집을 비운 사이 ‘옷 벗기 숨바꼭질’을 하다가 예정에 없이 부모가 들이닥치고 그 위기를 겨우 모면했던 그 날, ‘너’와 ‘나’의 갈등은 깊어지기 시작한다.

이 숨바꼭질 에피소드가, 또 ‘너’로부터의 편지가 암시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오픈리 퀴어가 될 것인가, 혹은 얼마나 오픈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

‘나’는 너무나도 평범하고 안온한 가정에서 자라 17세의 가출 경험만이 유일한 일탈처럼 여겨지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아무 근거도 없다고 하지만 질식사를 걱정해 꼭 선풍기 타이머를 30분으로 맞춰 놓고 잠드는 종류의 사람.

‘너’에 대해서는 그다지 정보가 없지만 ‘나’의 생일에 친구들에게 자신을 소개해달라고 말하는, 숨고 싶지 않은 어떤 사람.

그런데 이런 종류의 갈등은, 특히 레즈비언 서사에 있어서는 꽤 자주 형상화 되는 것이어서 이 소설의 전개가 약간 평범하게 느껴졌다.

김혜진의 최근 여러 작품이나 김지연의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같은 작품을 떠올리면 레즈비언 연인의 갈등은 그 기저에 각자가 처한 계급이나 세대 등의 차이가 있어서 단순히 ‘오픈’의 문제로만 귀결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최은영의 <그 여름>도 그렇고)

이 소설 역시 ‘나’에 관해서는 그런 지점을 꽤 드러내고 있지만, ‘너’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서 숨바꼭질하는 퀴어, 그리고 이별과 상실의 정서만이 남는 것 같다.

특히 숨바꼭질이라는 에피소드가 이들의 갈등을 너무도 직접적으로 드러내서, 즉 숨어 있는 자신을 반드시 찾아내기를 바라는 ‘너’와 숨은 채로 안전히 있기를 바라는 ‘나’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주어서 오히려 나이브하게 느껴진다는 점이 좀 아쉽다.

사족이지만 173쪽의 “삭발 투혼”은 “삭발 투쟁”으로 바꾸는 게 맞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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