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201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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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겨울호를 읽었다.

2010년대의 마지막 잡지여서 큰 특집이나 기획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평소와 다르지 않아서 좀 심심한 느낌이었다.

‘새로운 현실, 다른 리얼리즘’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4편의 비평 역시 다소 심심했다.

의미가 있고, 필요한 논의들이기는 한데 다른 잡지들이 비평의 담론이나 문제의식을 상당히 고심하고 예각화하는 것에 비해 창비는 좀 무심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촛불혁명기 한국문학에서 여성작가들의 맹활약과 페미니즘은 이제 대세가 되었다”라든지, 한국시의 모험이 “공동의 감각을 새롭게 창조하려는 노력”이 되어야 한다는 언급들은 특히 그렇다.

불평등과 불공정이 화두라는 말은 틀리지 않지만 ‘여성’을 포함하여 늘 사회 전체를 말하는 그 음험함이 계속 걸리고, 그 궁극적인 해결은 왜 항상 ‘커먼즈’로 향하는 것인지 여전히 납득이 잘 안 된다.

문학에서 공동체의 감각이나 연대의 순간만을 길어올릴 때 그 작품이 얼마나 협소해지는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두서없이 했다.

‘작가조명’에서는 은희경 작가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문동에서도 작가론 두 편에 작가초상까지 더해 특집을 실었고, 문사 하이픈에도 작가론과 에세이가 실려 있으니 ‘그랜드 슬램’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대단한 주목이다.

그런데 은희경이라는 작가가 아니라 <빛의 과거>에 대해서라면 나로서는 좀 유보적이다.

특히 여성-서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동의(공감과는 좀 다른)하기 어려운, 또 올드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적지 않았고, 기억의 재현에 너무 중점을 두어 서사적으로 좀 효율이 떨어진다는 생각도 했는데 그런 아쉬움들을 상쇄할 만큼 이 작품의 매력이 많았는지 잘 모르겠다.

<디디의 우산>으로 만해문학상을 받은 황정은 작가의 수상소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시상식 현장에서의 소감도 그랬지만 지면의 이 소감문은 황정은의 오랜 독자라면 한 문장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시의 경우 특별히 인상적인 작품은 없었고, 소설은 4편이 실려 있다.

 

 

1. 이승은, 공포가 우리를 지킨다  ★★★★

첫 소설집 <오늘 밤에 어울리는> 이후 첫 단편이 아닌가 싶은데, 좋게 읽었다.

이 작가가 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방식이기는 한데, 그것이 ‘장르적’ 긴장을 만나니 훨씬 풍성하게 읽히는 듯하다.

첫 소설집의 작품들에서 느꼈던 아쉬움도 다시 생각났고, 이렇게 과감하게 쓰는 편이 더 매력적이라는 생각도 했다.

아마 작가 자신은 좀 과하게 몰아붙인 소설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고, 실제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 같은 경우 그렇기도 해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도입부의 번잡한 인물, 사건들을 조금씩, 또 끈질기게 독자로 하여금 몰입할 수 있도록 구성하면서 이야기가 느슨해질 무렵 다시 긴장감을 확보하는 솜씨 같은 것이 무척 좋았다.

‘지영’과 ‘현우’ 커플 사이에는 ‘유민’과 ‘유석’이라는 두 아이가 있고, ‘윤주’와 영진’ 커플과는 ‘제시’라는 개로, ‘부동산 박실장’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두 가족이 우연히(사실은 그렇지 않았지만) ‘지영, 현우’의 집으로 향하게 되는 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조금씩 고조되는 긴장감은 결국 ‘윤주, 영진’이 이 집에 ‘갇혀버리는’ 것으로 치닫는데 그 과정에서 이 집에 얽힌 노부부의 사연, 서류상의 이혼, 아이들의 이상한 행동과 사고, ‘제시’의 상태와 ‘한이사’와의 관계 등 불안을 야기하고 공포를 암시하는 일들이 무수히 제시된다.

특히 ‘민석’이라는 인물의 존재와 ‘윤주, 영진’을 이 집으로 끌어들인 ‘지영, 현우’의 의도 같은 것들이 맞물리면서 소설은 절정으로 향하는데, 오래된 구식 전화기가 울리는 그 마지막 장면이 좀 아쉬웠다.

공포 서사의 클리셰 같기도 했고, 그다지 임팩트 있는 장면이라 보기도 좀 어렵지 않나 싶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가 이야기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고, 많은 이야기들이 누락되어 있지만 이 이야기 자체로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2. 장류진, 연수  ★★★★

역시나 첫 소설집 이후 첫 작품인 듯하다. (문동에도 작품이 실려 있다)

장류진의 소설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시대(세대)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는데 충분히 그렇고, 작가 자신도 그런 이야기를 써나가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전작이었던 <도움의 손길>과 여러모로 비교해가며 읽게 되는 작품이다.

“여성 연대의 곤경”(이지은)이 이 소설에서는 ‘가능성’쪽으로 조금 옮겨왔다고도 생각이 되는데, 나로서는 여전히 약간의 불만 같은 것이 있다.

장류진의 인물들은, 이 소설에서 보면 ‘이주연’ 같은 인물들인데, 모두 ‘프로’가 되고 싶어 하거나 ‘프로’를 찾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관계나 거래의 신뢰를 보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전문성이라는 것이고, 그 전문성에는 당연히 응대나 대화의 스킬도 포함되어 있다.

‘이주연’은 자신의 삶, 회계사로서의 능력은 ‘프로’이지만 ‘운전’이라는 영역에 있어서는 젬병이다.

그는 그 부족함을 ‘프로의 손길’로 채우려 한다.

그리고 ‘맘카페’에 굳이 정회원 승급까지 받아가며 ‘프로’를 찾는다.

(여성 인물이 ‘맘카페’를 통해 신뢰할 만한 정보를 얻는다는 것, 그것을 위해 번잡스럽고 수고스러운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꽤 중요한 장면이다)

그런데 ‘프로’가 ‘프로’를 찾는다는 이런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프로’를 찾아내는 수고와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리하여 ‘프로페셔널’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장류진 소설 속 인물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싶어 한다.

물론 그 ‘잘’이라는 말 속에는 각자의 의미가 다르고 여러 가치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장류진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일종의 ‘자기 확신’을 산뜻하게, 또 깔끔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한데 아직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무튼 이 소설로 돌아오면, ‘운전’과 ‘비혼’을 교묘하게 겹쳐 읽게 만드는 방식이 좋았다.

이 소설의 제목이 ‘운전’이 아니라 ‘연수’인 것은, 다분히 그런 의도, 즉 그것이 ‘능숙’해지기 위해서는 연습과 도움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엄마’는 갑자기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해 깜빡이도 없이 훅 들어오기도 하고, 남편 밥은 차려줬냐는 이야기는 지겹도록 빵빵대고, 글로 배운 지식 같은 건 실전에서 아무 소용이 없고.

그럴 때, 누군가 내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면서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라고 다독여준다면 그건 단순한 위로로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장류진의 인물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프로’의 세계는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하다.

 

 

3. 전성태, 상봉  ★★★

말 그대로 ‘상봉’에 관한 이야기.

전성태가 남북이산가족 상봉에 관해 소설을 썼다면 믿고 읽을 수 있고, 또 이런 이야기 속에 들어가 본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아쉽게도 그냥 ‘상봉’의 현장을 따라가 보는 정도의 경험만을 준 것 같다.

물론 이 작가가 이야기의 겹을 쌓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알 수 있었다.

이를테면 여기 있는 모두가 한 세월을 격랑과 슬픔을 딛고 기쁨과 눈물의 상봉을 하는 와중에 음주운전 사고의 가해자를 마주한다든지, 예상과는 꽤 달랐던 북측 가족의 모습이라든지, 숨겨진 가족사라든지, 이들을 촬영하는 카메라의 시선이라든지.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부수적으로만 기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장시춘’과 ‘장시곤’ 형제의 해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평범하게 읽혔다.

 

 

4. 조해진, 하나의 숨  ★★★☆

아주 기다렸던 이야기이고, 또 조해진이라면 더 기대했어서 아쉬움이 컸다.

이제는 ‘김용균’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재해와 죽음에 관해 최근 한국소설이 다소 무관심했던 것은 사실이다.

제주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고교생이 죽은 사건도 있었고, 경향신문 1면을 사망한 노동자들의 이름으로 채운 일도 있었다.

(은유 작가가 쓴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돌베개, 2019)도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자음과모음> 겨울호에 실린 최진영 작가의 <일요일>도 그렇고.)

도대체 왜 이런 일은 계속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왜 또 역시 떠밀린 사람들이어야 하는지에 관해 이 작가는 쓰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소설이 다소 작위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 좀 아쉽고, ‘최선생’인 ‘나’의 시선이 아니라 거리를 둔 3인칭이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기현씨’와의 상견례를 앞둔 ‘나’가 비정규직 교사로 담임을 맡고 있는 반의 제자 ‘하나’가 현장실습을 나간 공장에서 사고를 당해(혹은 자살을 기도해) 의식을 잃고 그 이후의 절차들을 수습해나가는 이야기이다.

결국 “다들 쉬쉬하는” 가운데 ‘나’마저 ‘하나 어머니’에게 자신이 비정규직 교사인 것은 알고 있냐고, 내 삶을 감당하기에도 벅차다고 고백해버리는 장면이 어쩌면 이 소설의 핵심일 텐데, 그 ‘을들의 싸움’ 혹은 하청을 주듯 아래로, 다시 아래로 약자들을 갉아먹는 이 세계의 구도가 전면화되지 못하고 ‘나’의 감상(傷)으로 갈무리된 점이 특히 아쉬웠다.

‘하나의 숨’이라는 중의적인 제목에서, 그래서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다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앞서 장류진의 ‘이주연’과 조해진의 ‘최선생’을 함께 마주하게 되니 아득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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