릿터, 2019.12-1 / 악스트, 2020.1-2

littor

 

악스트와 릿터를 읽었다.

릿터는 이미 22호도 나왔고, 크릿터 2호에, <한편>까지 있어서 뭔가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아무튼 읽은 기록을 좀 남기기로.

릿터야 뭐 늘 재밌는 글이 많은데, 21호에는 유독 실린 시들이 다 좋았다.

말 그대로 ‘젊은’ 시인들이어서 그런지 확실히 신선했다.

소설은 3편이 실려 있다.

 

1. 김희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1969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한 K의 실종을 다루며 시작할 때만 해도 상당히 기대감이 컸다.

<공의 기원> 같은 작품도 생각나고.

하지만 이야기가 좀 단순하고 익숙하게 전개되어서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맨인블랙>의 기억 지우기 모티프를 이토록 진지하게, 중점적으로 다루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고, 어떤 거대조직 혹은 음모에 의해 타인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설정-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는-도 너무 익숙했다.

당장 최인호의 말년작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가 떠오르는데, 거기에도 K라는 남자가 등장하며 기억의 단절과 분열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이 소설의 제목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기 때문인 것도 있다.

잘 알려져 있듯 최인훈 작 동명의 희곡 작품이 있고, 김환기 작 동명의 그림도 유명하다.

공교롭게도 1970년의 작품들이어서 이 소설의 시작이 되는 시기와 맞물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 상호텍스트성을 작가가 별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다(아니면 내가 눈치를 못 챘거나).

추리소설의 장르적 재미를 느끼기에도 다소 부족해 보여서 아쉬운 작품.

 

 

2. 민병훈, 재구성  ★★★★

‘재구성’이라는 제목에 충실한 작품.

분명한 건 공원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뿐, ‘너’에 관한 이야기, 내리는 비, 이국의 장소와 풍경들 같은 것은 계속 ‘재구성’된다.

여러모로 이 소설은 난망이라는 어휘를 떠올리게 한다.

잊기도 어렵고, 바라기도 어려운 이 기다림에는 외로움과 더불어 강박이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의사의 말”을 들어야 하는.

그 지점에 이르면 작품은 앞선 진술들을 뒤집는다.

이국의 강변 공원 벤치였던 그 풍경은 오두막과 구릉, 잔디밭이 있는 공원으로 바뀌고, “이런 생각의 흐름으로만 이곳에서 며칠을 보냈다”는 문장을 만난다.

이 마지막 문단에 도착하면 공원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 분명해 보였던 진술도 꽤 흔들리고, 소설을 재구성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즉 여러 번 읽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야말로 ‘재구성’의 과정이어서 흥미로웠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있다.

“공원 벤치에 앉아 비가 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등의 형식으로 시작되는 단락이 많은데, 그리고 그 문장들은 계속 변형되면서 상황과 시제를 바꾸는데 유기적이라는 느낌이 크게 들지는 않았다.

기다린다는 서사와 기다림을 하게 한 서사가 좀 더 매력적으로 연결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작품 전체로 보자면 이 소설은 이상우와 정영문이 겹쳐지는, 그러니까 민병훈만의 스타일은 좀 약한 편이기도 하다.

<자음과모음> 겨울호에 실린 <모두진술>이 더 민병훈스럽다고 나는 느꼈다.

 

 

3. 윤이형, 고스트  ★★★★☆

당혹스럽게도 문예지에 발표한 마지막 단편이지 않을까 싶다.

윤이형 작가야 다양한 경향의 작품을 쓰기도 하지만, 이런 작품, 그러니까 지금의 페미니즘을 대하는 기성 여성(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지만)의 복잡다단하게 폭발하는 내면을 당분간 볼 수 없다니 너무 아쉽다(물론 <붕대 감기> 쪽이 그 아쉬움을 많이 달래주기는 하지만).

이 소설은 현재의 ‘나(정애령)’가 과거의 ‘나’와 마주하는 이야기이다.

왜 ‘나’는 이렇게 강박적으로 강한 여성이 되려고 했을까, “가정이라는 굴레에 영원히 묶여 버리는 여자들”을 견디지 못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것을 ‘아버지’에 대한 상처에서 찾는다.

고스트 테라피(GT)라는 치료법을 통해 ‘아버지’가 강한 트라우마를 남겼던 ‘엄마’의 맹장 수술 날로 현재의 ‘나’가 들어가면서 그 병원에 있던 과거의 ‘나’를 만나는데, 그 대면이 세 차례 정도 반복되면서 ‘나’는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지점이 꽤 탁월하다고 느껴졌다. (‘다람쥐’의 역할도 컸다)

그러니까 자신이 ‘유사-남성’으로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깨달음과 동시에 ‘엄마’의 삶을 ‘직접’ 듣고 “연결될 수 있는 힘”을 찾으려는 마지막 장면이 상당히 뭉클했다.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하여’가 <쿤의 여행>이었다면, 이 작품은 확실히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하여’에 가깝다.

그리고 김초엽의 <관내분실>이나 천희란의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를 생각하면 여성 인물들이 치열하게 과거의 기억과, 특히 과거의 나 자신과 마주하려는 ‘복기’의 서사가 최근 각광받는 것 같다.

단순히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를 기억해내는 정도가 아니라 과거의 ‘나’에게 말을 걸고, 또 직접 대면하게까지 하는 설정 등을 통해 좀 가혹할 정도로 자기 반성을 하는데, 그것이 과거의 ‘나’를 비난하거나 바꿔보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점들은 긍정하면서 ‘나’들의 화해와 연대를 모색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런 이야기는 확실히 윤이형 소설에서 자주 느껴지는 감각이어서 더욱 절필이 아쉽다.

 

axty

 

악스트에 실린 작품도 연이어 읽는다.

특집 작가가 최진영이다.

옛날 생각이 좀 났는데,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행사였으니까 2010년 가을쯤이었던 것 같고.

홍대입구역 부근에 있는, 카페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3층인지 4층인지 작은 공간에서 작가와의 만남이 있었다.

당시 최진영에 완전히 매료되었었고 누가 그 행사에 당첨되어 같이 가자고 해줘서 가게 됐는데, 아마 그런 만남(?)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때 ‘왜 초판본 판권란에 수정 스티커가 붙어 있냐’는 질문 따위를 해서 작가님을 비롯해 참석한 관계자분까지 당황하게 만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GV빌런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드네…

어느덧 10년 전의 일이고 이제 최진영은 모객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작가가 되었으니 세월이 무상하다.

아무튼 이번 악스트에는 ‘여성-서사, 고딕-스릴러’라는 테마의 작품을 포함하여 총 5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1. 천희란, 카밀라 수녀원의 유산  ★★★★

첫 소설집 <영의 기원>이나 최근 <자동 피아노> 같이 ‘죽음’을 아주 깊숙이 다루는 작품이 천희란 소설의 본령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지만 장르적인 매력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고, 이 소설이 그 기대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었다.

최근 한국문학에서 여성-서사가 확장되는 가운데, 이렇게 다른 시공간에서 여성들의 이야기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신선했다.

물론 주제가 정해져 있다는 특성상 작품의 장르적인 색채가 짙고 이른바 클리셰라고 할 부분이 많긴 하지만 ‘사라지는 여성’ 혹은 ‘사라져야만 하는 여성’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써냈다고 생각한다.

‘카밀라’를 비롯해 ‘키티 부인’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이었고, 이들의 태도와 ‘수녀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여성 공동체 공간도 아주 ‘고딕적’이어서 좋았다.

‘젊은 남자와 눈이 맞아 딸을 버리고 도망간 여자’라는 소문과 낙인만으로도 한 여성은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는, 그리고 “이 저택의 안팎에서 살고 죽어간 여자들의 서로 다른 비극의 기록 또한 넘쳐난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서스펜스를 형성한다.

아쉬운 점은 소설 말미에야 등장하는 서술자 ‘나’가 밝히는 사건의 전모(?)이다.

“나도 아주 오래전에 내 엄마를 죽였단다.”라는 ‘카밀라’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사실이면서도) 것인데 그것이 곧 이 거대한 저택을 유지하는 대가이자 책임이라는 것이고 그 “상속”이 ‘카밀라’라는 이름으로 계속된다는 것.

이 결말이 결국 소설을 좀 좁게 읽히게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아니면 정말로 이 소설이 일종의 프롤로그여서 “이제야 겨우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참”이라면, 그래서 좀 더 볼륨 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면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2. 허희정, 숲속 작은 집 창가에  ★★★

여자들이 실종되는 숲이 있고, 그 실종을 지켜보는 ‘숲’이 화자로 등장할 때 나름대로 괜찮은 설정이라고 생각했는데, 테마에 좀 갇혀버린 작품이 된 것 같다.

이 실종을 조사하고 추적하는 탐사 보도 프로그램 작가(혹은 피디) ‘김현진’과 우연히 이 숲에 다다른 ‘그녀’가 등장하는데 ‘숲’을 포함한 이 세 인물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실종은 해결되지 못한 채 ‘그녀’는 힘겨운 이혼소송에서 패배한 뒤 숲이 있는 P시에 정착하게 되는데, 자신의 유류품을 숲에서 발견한다는 마지막 설정이 있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좀 밋밋했다.

제목에 등장하는 ‘숲속 작은 집 창가’라는 것도 작품 속에서 의미를 찾기가 어려웠고.

다만 숲을 산책하면서 실종된 여성들의 물건들을 주워 ‘수집품’으로 만드는 장면 같은 것은 좋았다(아마 이 작가가 <비유>에서 하고 있는 프로젝트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3. 김연수, 미억오리같이, 굴껍지처럼  ★★★

오랜만에 보는 김연수의 단편인데, 백석의 이야기일 거라 너무도 지레짐작되었으므로 신선하지는 않았다.

아마 백석 연작으로는 세 번째 작품이 아닌가 싶고, 앞선 두 작품에 비해서 특별히 흥미롭지 않았다.

지난 작품이 백석이 ‘삼지원 스키장’으로 파견을 출발하는 내용이었는데, 이 작품은 그 여정 속에서 ‘기행’이 자신의 시집 <사슴>을 펴내던 경성 시절, 또 통영 여정을 회상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구도가 단순해서일 수도 있지만 소설이 전반적으로 감상주의에 빠져 있다는 느낌을 주는데 그것은 통영의 ‘천희’를 그리워하는 감각과 문학의 ‘자유’라는 낭만이 섞여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북한의 시인 백기행에 비해 일제 식민지의 조선 시인 백석이 “그게 다야” 하면서 소박하게, 또 호젓하게 웃어가며 1935년을 지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해방 이후 북에 남아 더 이상 자신의 시를 쓰지 못했던 백석에게 너무 이입하여 균형 감각을 좀 잃은 게 아닐까.

김연수 특유의 ‘인용’과 과거의 환영에 사로잡혀 죽음을 맞는 중국인의 모습 같은 것도 예전만큼의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4. 김종옥, 스토킹  ★★

<개죽음>과 <농담>에 이어 역시나 충격적인 작품이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고 느끼긴 했지만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쓸까.

학과의 ‘행정조교’가 주인공인 것부터 김종옥의 시그니처를 풀풀 풍기지만 왜 이 남자에게 “여학생, 특히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주경 같은 학부생”을 연루시키는지 모르겠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작가들이 고발문만큼이나 반성문을 많이 써내는 것에 비해 정작 일부 남성 작가들은 변명에 가까운 퇴행을 일삼는데, 김종옥이 대표적이다.

김경욱이나 이기호의 작품에서도 느꼈지만 남성 작가들은 다들 ‘홀렸다’는 말을 하고 싶은가 보다.

나는 이걸 ‘무고에의 욕망’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런 일에 ‘연루’될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면서도 그것이 내 의도나 진심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았냐고 이야기를 짜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작가 자신을 갈아 넣는다.

이런 소설을 지금 왜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5. 서이제, 0%를 향하여  ★★★★

역시 자기 필드를 쓸 때 소설이 풍성해진다는 걸 느낀다.

이 작가의 등단작에서 느꼈던 그 ‘현장감’이 잘 발휘된 것 같다.

어줍잖은 시네필로 살아와서인지 21세기 한국의 영화판을 스케치할 때 그야말로 ‘내 얘기’ 같았고(물론 영화 현장의 감각은 모르지만), 이 열악하고도 처참한 상황은 문학판이라고 다를 것도 없었다.

한국영화가 100주년을 맞았다고, 봉준호 감독이 칸 영화제에서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아카데미까지 석권한 지금 보면 더욱 아득해진다.

“한 해 동안 천만관객 영화가 다섯 편”이나 나오는 이 시장에서는 동시에 “한국 독립예술영화 관객 점유율은 1% 미만”으로 떨어지고 있고, “나는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이하여, 영화를 그만두고 싶”어한다.

그렇게 소설은 100이라는 숫자로 시작해 0으로 달려가는데,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희망이 섞인 체념이랄까, 소설은 ‘그래, 그럼 정말로 아무도 보지 않을 때까지 0% 향해 가보자’는 식인데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이제 막 영화를 배워 첫 영화를 상영하는 ‘할머니’이다.

죽기 전에 한 번 영화를 찍어 봐야겠다고, 자기가 편집까지 다해서, 도무지 연출 의도를 알 수 없는 영화를 “감독, 최정희. <영화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이라는 타이틀로 작은 카페에서 빔 프로젝트를 동원해 상영하는 그 장면.

영화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그 빛과 어둠 속에서 ‘나’는 “아무래도 영화 같은 건,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다. 독립 같은 건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래가 없다고 계속 되뇌면서도 그저 “언제까지 이 생각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는 것은 ‘하겠다’, ‘그만두겠다’가 아니라 ‘그만두고 싶다’ 혹은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다’의 상태로만 남아 있을 수만 있어도 족하겠다는, 예술이라는 걸 해보겠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최저선 같아서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수나 기호를 동원해 서사적 실험을 해보는 서이제보다는 자기 이야기를 자신만의 리듬으로 써내는 이 편이 훨씬 매력적이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