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2020년 봄호(별점의 변을 포함하여)

오랜만에 블로그 글을 쓴다.

코로나로 한 서너 달 동안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닥친 일들을 하기는 했는데 성과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아무튼 좀 무의욕 상태가 지속되었다.

워드프레스는 또 문서 편집 툴을 대대적으로 바꾸는 바람에 지금도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상태로 글을 쓰고 있다.

사실 블로그에 이런 방식으로 단평을 남기는 일을 지속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좀 있었다. (하루이틀 일도 아니긴 하다)

문사 봄호 하이픈 좌담에도 그런 얘기들이 있지만 비평의 행위가 ‘취사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과연 옳은 방향인가에 대한 고민이 늘 있고, 나로서는 비평이 결국 작품에 대한 호오를 밝히는 일이라는 생각이 여전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비평이 단순히 작품을 읽고 그것에 대한 해석을 더하는 일을 넘어 그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는 논의가 많고 나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이 작품을 열심히 따라 읽는 일에 대한 회의, 줄세우기에 대한 반감, 나아가 그 자체의 무용성까지 주장한다면 따르기가 어렵다.

나는 비평가가 모든 작품(이 말은 좀 더 설명이 필요하지만)을 따라 읽는 일이 의무라고 생각해왔다.

문학비평가가 일종의 ‘전문가’라면 자기 필드의 ‘현황’을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그것이 비평가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다면 비평가의 일은 ‘노동’인가, 라는 질문을 최근 자주 던져보게 되었고 여전히 답하기가 힘들다.

발간되는 문예지를 모두 사보고, 모으고, 그 데이터를 정리하는 일은 말 그대로 자기만족인데 내가 그걸 비평의 일이라고 착각했던 것이 아닐까.

소설가가 소설을 쓰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당연히 계약이고 노동인데, 비평가에게 작품을 읽히게 만드는 일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평론에 ‘취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블로그를 고민했다.

우선 별점을 매기는 방식은 버리기로 했다.

‘별점’이라는 방식이 그다지 좋은 방식이 아니며 여러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예전에 정성일 평론가가 사람들이 예술 작품에 별점을 매기는 ‘짓’ 따위를 한다면서 영화에도 그렇고 음반에도 그렇지만, 문학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문학은 그게 왜 쓸모없는 짓인지 알고 있다는 식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문학을 신비화하거나 우상화하는 문학주의자들을 경멸한다.

그건 곧 내 스스로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이고 ‘왜 문학에는 별점을 매기지 못해?’라는 반감이 이 일을 시작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그리고 비평이 잘 하는 일, 그럴 듯한 언어로 휘감아 그 작품이 좋다는 것인지 싫다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행위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소간의 저열함을 무릅쓰고라도 정확하게 평가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야말로 얼마나 ‘문학주의’적인 것인지.

정확하게 평가한다는 것은 대체로 환상이고, 이미 기성 문단에 직간접적으로 깊숙이 몸을 담근 마당에 객관적이라는 태도도 허상이다.

결국 그저 내 개인의 취향일 뿐인데, 그걸 ‘공표’하는 일이 이제는 불필요해보인다.

모든 작품을 읽는다는 식으로 말하고, 그걸 티나게 내세우면서 결국 메이저 문예지만 읽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

결국은 그렇게 되어버렸다고 생각한다.

블로그에 작품에 대한 단평만 남기다가 자연스럽게 그 호의 잡지 전반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이 많아졌고, 사실상 지금은 문예지 리뷰에 가까워졌다.

그러다보니 군소잡지, 다양한 경로로 읽을 수 있는 작품들에 대해서는 별로 말을 얹지 못했다.

등단 후 초창기에는 사실 기성 문예지 외에는 신작 단편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독립잡지나 웹진 등을 통해 작품이 활발하게 발표되는 일은 아주 최근의 일이기도 하다.

대체로 미/비등단 신인 작가들의 작품이 많기 때문에 그 작품들에 별점을 매기고 평을 남기는 게 좀 저어되기도 했다.

메이저 문예지에 발표된 작품이라면 작가 입장에서 평단의 ‘평가’나 ‘선택’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나름 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었고.

아무튼 그래서 소위 메이저 문예지의 단편들을 주로 이야기하게 됐고, 그 자체를 변화시키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다.

‘1일 1단편’ 같은 방식으로 두서없이 꾸준히 리뷰를 해볼까 생각도 했는데 한 달이나 갈까 싶어서 바로 접었고.

한국 문단에서 발표되는 모든 신작 단편들을 읽는다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은 여전하고, 계속 그렇게 할 테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의 ‘비평’이어야 할지는 계속 고민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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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돌아 문학과사회 봄호의 작품들을 읽는다.

2020년대를 광범위하게 조명하는 하이픈의 특집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문학러’에게는 역시 뒤쪽 좌담이 가장 흥미로웠다.

앞서 썼던 고민들이 그 연장선상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한국문학에 관해 고민해야 할 것이 제도와 구조라는 말이 최근에는 좀 고민이다.

제도는 개인이 만들고 구조 뒤에는 늘 어떤 사람들이 있는데 그걸 분리한다는 게 가능할까.

가령 한국문학의 등단 제도에 관해 비판할 때 그 불합리한 구조적 문제는 지적하기 쉽다.

오히려 어려운 것은 이 제도의 변화를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아닐까.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배제하고 그 시스템에 관해 논의를 이어나가는 일이 다소 비효율적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구조나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라는 명분이 상처받는 개별자에 대한 알리바이로 작동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얘기는 이쯤하고 실린 소설을 일별한다.

여섯 편으로, 양적으로도 그렇지만 눈에 띄는 작가가 많다.

 

 

1. 이승우, 마음의 부력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큰 틀에서는 ‘성경 다시 쓰기’의 작업인 듯 하다.

형을 상실한 동생과 그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에 굳이 ‘야곱’이 들어서야 했는지는 좀 의문이지만 그것이 결국 ‘죄책감’의 문제라면 또 ‘죄’에 관한 것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가 교회를 다니기도 하니까)

다시 말해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사유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나 상실, 슬픔, 애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죄책감’임을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이야기라면 이승우만큼 잘 쓰기는 어렵겠지만 결말은 다소 아쉬웠다.

때때로 이승우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지점이기도 한데 굳이 말하자면 ‘극적’이라는 것.

자신을 형으로 착각하는 어머니에게 결국 기꺼이 형인 척 통화를 하는 장면은 이야기가 쌓아온 겹을 너무 단순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2. 최윤, 숨바꼭질

문동에도 소설을 발표해 두 편을 같이 읽게 되었는데, 나중에도 쓰게 되겠지만 의외로 색깔이 좀 다르다.

35세 ‘박세미’의 사나흘 정도를 따라가는 이 소설은 우선 다소 산만하다.

이건 인물의 경험, 처해 있는 상황을 볼 때 의도적으로 보이기는 하나 좀 뜬금없는 묘사(이를테면 갑작스러운 현대사회의 풍경 스케치라든가)가 많아 집중이 어려웠다.

어쨌든 그는 병원으로부터 모종의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고, 가벼운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결과 확인을 미루면서 그가 향하는 곳은 ‘보육원’이다.

밝혀지는 것은 ‘박세미’가 사실은 그곳 출신의 ‘박순복’이었다는 것인데, 그 자체가 썩 매력적이지도 않지만 거기서 마주하는 ‘박유복’ 같은 캐릭터는 좀 문제적이다.

문동 <소유의 문법>에 ‘동아’도 그렇고 장애와 질환을 겪는 인물을 다소 대상화하여 소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3. 한강, 교토, 파사드

다음에 실린 박솔뫼 작가의 작품도 마찬가지고, 일본의 <문예>에 작년 발표했었던 작품을 한국어로 수록했다.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한강 특유의 깊이를 음미할 수 있는 작품이며 그렇기에 짧아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아’의 죽음에 관해, 그리고 ‘나’에 관해, 나아가 그 둘에 관해 너무 많이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좀 더 보여줬다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교토라는 배경과 파사드라는 소재가(이미 기획되었다는 생각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연스럽게 와 닿지는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웠던 것은 작품에 달린 ‘부기’였는데 한강은 “에세이로 이름 붙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선택의 순간이면 늘 그렇게 했듯 소설로 이름 붙였다”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장혜령은 <진주>에 관해 ‘에세이를 초과하는 것이 있어 소설로 내는 것이 좋겠다’라는 언급과 유사한데 이 감각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은 욕망이 좀 생긴다.

1인칭의 시대에, 자전적 에세이와 그다지 구분되지 않는 소설의 시대에 한강이 생각하는 ‘소설’이란 뭘까.

 

 

4. 박솔뫼, 수영하는 사람

역시나 <문예>에 발표했던 작품이며 부산이 배경이기는 하지만 “김해발 하네다행 ANA” 같은 소재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작가가 직접 밝히기도 했지만 <여름의 끝으로>라는 소설의 연작이기도 하고, 동면을 하는 인물과 그 동면의 가이드가 등장한다는 점, 그리고 부산, 호텔, 여행 등의 소재가 박솔뫼 작품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역시나 부기에서 흥미로운 포인트가 있는데 소설을 쓸 때 “이 소설을 계속해서 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속에 있었”고, “나는 그런 곳에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너무나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감각이 너무 매력적이면서 궁금하다.

먹고 마시고 걷고 잠을 자고 소설을 쓴다는 것.

박솔뫼는 어떻게 이 단계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5. 김세희, 외출

임신을 하고 입덧이 시작된 ‘사라’의 이야기.

단 한 번의 외출 감행이 감당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이 어떤 정도로 육박해 오는지, 어떻게 보면 입덧을 통한 임신 보고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다.

이런 변화에 대한 남편 ‘원상’의 무관심과 무공감은 뭐 당연한 것이고, 심지어 ‘사라’ 안에서도 과거의 젊은 ‘나’에게 ‘너라고 별 수 있겠냐’ 식으로 생각이 퍼져 나가는 게 흥미로웠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소설이지만 아무래도 어딘가 낯이 익다는 느낌도 드는데 그것은 ‘입덧’과 ‘임신’이라는 소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여성의 내면, 몸의 변화에 대한 당황스러움과 괴로움 같은 것들이 다소 익숙해진 탓인 것 같다.

아무튼 ‘사라’가 결국 과업이었던 은행 일을 보는 장면에서 ‘은행원’과 대화를 나누는 순간이 이 소설의 백미라는 생각도 했다.

 

 

6. 이원석, 무덤 밖으로

세 번째 작품인 것 같다.

확실히 소설에 몰입하게 만드는 도입부를 쓰는 능력이 있는 것 같고,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해야 리듬을 탈 수 있는지도 아는 것 같다.

문장웹진에 발표했던 <오늘의 시가>도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조금 더 자기 색깔을 만드는 게 필요해 보이지 않나 싶다.

읽어가는 도중에 여러 기성 작가들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데 작가가 어떤 순간 조금 주저하고 조심하는 게 아닌가 싶다.

신중함은 대체로 미덕이지만 신인 작가에게는 과감함과 미숙함이 더 필요할 때가 있고, 망해도 좋다는, 조금은 도전적인 감각도 확인해보고 싶다.

아무튼 이 소설은 식인종이라는 소문에 둘러싸였던 ‘이모’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 ‘이모’와 보냈던 유년의 시간들, 친구였던 ‘아이’의 죽음과 ‘이모’의 불가피한 연루, 그리고 지금 ‘이모’의 장례식장까지 이어진다.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는 것을 너무 쉽게 믿었다”는 문장이 이 소설을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에 대해 우리는 늘 확신할 수 없다고,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당연히’, ‘에이, 그럴 리가 없지’ 같은 말들 속에서 그렇게 된다고, “보여줘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아주 많”다고 이 소설은 이야기한다.

스물넷의 ‘석이’가 다다른 지금은 “아직도 당연하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해버리는 내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이지만 이 순간 그는 삶의 한 지점을 넘어서고 있다.

궁금했던 것은 ‘이모’의 삶에 대해 조금 더 말해줄 수는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유년의 기억과 그 사건 말고도 그 이후의 ‘이모’에 관해, ‘엄마’를 통해서 충분히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좀 아쉬웠고.

대체로 순차적으로 병치해 전개되는 구조도 조금 더 뒤섞었다면 어땠을까, 또 매 장의 말미에 다소 힘이 들어간 문장을 배치하는 방식도 사건을 너무 극적으로 몰고가는 느낌이어서 톤을 좀 낮추면 어땠을까 싶었다.

 

 

8 Responses

  1. @mahler910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한국 단편소설을 좋아해서 선생님의 글을 참조해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박솔뫼 작가의 글이 궁금해졌습니다.

  2. 하루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저는 문예지를 구독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내용이 수록되면 읽는데요, 그런 점에서 비평가님 글이 도움이 됩니다. 응원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3. 독자

    많은 고민을 엿볼 수 있는 글입니다.. 별점을 매기려고 했던 이유에 대해서 공감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걸 버리신 이유에 대해서는 더 깊은 공감을 하게 되네요. 사실 이곳을 즐겨 찾으면서도 별점을 볼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조금 서글플 때도 있었거든요

  4. 신동준

    최근에 거의 문학작품을 읽은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지나가다 궁금한 점이 있어 죄송하게도 약간의 짜증을 섞어 여쭤봅니다.
    평소에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의문인데 선생님의 글을 보니 참 날카롭게 비판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1. 그 어떤 집단보다도 문학작품을 생산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비평하는 사람들은 문단의 권력 관계, 구조, 신인 작가들의 등단 방식 등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단, 문학계가 다른 직업/사회적 영역과 어떻게 구별되길래 그토록 끝도 없이 이야기하게 되는 것인지요? 문학에서 멀어진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니 대체 문학이란 것이 무엇이 그리 특별한 것인지, 왜 그토록 지겹고 신물 날 정도로 문단의 구조와 권력을 물어뜯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질문을 비약하자면… 문학이란 게 다른 글이나 행동이나 일상생활과는 무언가 다른 특별한 것인지요?

    2. “한국 문단에서 발표되는 모든 신작 단편들을 읽”으려 하신다고 했는데, 그러한 비평가로서의 노력이 자칫 모든 문학작품을 하나의 역사 안으로 포섭해버리는 결과를 만들지는 않을지요? ‘한국 문학의 역사’라는 추상적인 개념 속에서 작품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연속성과 상호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간혹 작가들 중에는 그런 한국 문학의 전통과 역사와 무관하게 자신의 글을 쓰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비평이라는 작업이 그들의 글을 강제로 역사 속으로 편입시켜버리지는 않을까요? 실제로 작가들이 이전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얼마나 읽고 연구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한국’ 작품을 읽었을지 다른 나라의 작품을 읽었을지는 모르는 일이 아닐까요?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은 결코 아닌데, 비평이라는 게 아무래도 한 작품을 놓고 다른 작가의 글과 그 글을, 어떤 문학 전통 속에서의 그 글의 위치를, 사회적 이슈와 그 글을 비교하는 작업일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물론 그 어느 누구도 사회나 역사, 사상과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을테고, 무의식 중에, 또는 역사적 맥락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이 되겠지만, 그러한 연결 이전에 작품의 독립성이나 작가의 개성이 우선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대답을 하실 여유가 있으시다면 부탁드립니다. 별로 대답할 가치가 없을지 모르는 질문에 괜히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글 삭제하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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