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2020년 여름호

창비 여름호를 읽었다.

아무래도 특집란에 먼저 눈길이 갔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강경석 평론가의 “혁명의 재배치”는 나에게 이제야 페미니즘이 혁명임을 ‘겨우’ 인정하는 글로 보였다.

이건 전혀 폄하나 조소의 의미가 아니라 뒤늦은 환영이다.

비로소 창비 진영은 퀴어-페미니즘 문학이 ‘혁명’과 함께 얘기될 수 있다고 여러 레퍼런스들을 호명하는데, 결국은 ‘계급’의 문제를 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 혁명은 각자이면서 모두의 혁명이어야 하고 벌써 ‘다음’을 묻고 있다는 점에서 소위 물타기의 혐의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의미 있는 고민을 하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요컨대 “나/우리, 공동체/개인”의 구분을 넘어서는 어떤 ‘연대’를 상상해야 한다는 것인데, 아마도 창비에서는 그것이 곧 커먼즈라고 얘기하겠지만, 이 빗금에 존재할 무수한 가능성에 대해 계속 고민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한 듯하다.

신샛별 평론가의 글도 흥미롭게 읽었다.

다만 ‘돌봄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최근 한국소설의 인물들을 읽어내는 적확한 키워드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장류진이나 박솔뫼, 임솔아, 혹은 정이현이나 박민정, 김유담 등을 포함해 이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형을 일종의 ‘가이드’라고 부르고 싶은데(박솔뫼의 동면 가이드를 참고해) 그것을 좀 성급하게 정치적 의제로 확대시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혹은 오히려 그 반대로 새로운 인물, 감각의 가능성을 정치 체제의 문제로 축소시키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결국 그것은 한국문학이 여전히 촛불혁명기를 살아내고 있다는 전제, “‘촛불정신’의 요체”를 찾으려는 독해에서 오는 것인데 이 입장에는 아직도 동의가 어렵다.

여기에 김유담, 강화길, 장류진을 경유해(좀 무리하게 묶은 거 아닐까) 코로나 시대의 한국문학, 한국시민 ‘덕분에’로까지 이어지는 이 낙관은 수긍할 수가 없다.

조대한 평론가의 글은 ‘1인칭’으로 시를 읽어내는 작업의 연장으로 보인다.

역시나 흥미롭게 읽었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기왕에 주네트까지 인용한 마당에 시점론, 혹은 게임 서사 등의 이론적 논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최근 한국 시의 ‘특이점’이 장르적 감각의 변화에서 기인한다는 점은 명백한 것 같고, 그것이 ‘시점’의 문제일지 ‘거리’의 문제일지 ‘초점화’의 문제일지 ‘세계’의 문제일지는 깊이 따져보아야겠지만 “세계의 자아화”라는, 이제는 시효가 끝난 듯한 조동일의 개념을 재인식하는 부분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혹시 지금 한국시는 시조나 한시, 향가나 가사의 귀환이 아닐까, 근대시의 껍질을 벗고 아주 전통적인 ‘시’의 장르적 속성이 ‘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같은 요상한 생각도 드는 것이다.

<문학초점> 코너에서 백민석 작가의 발언들이 흥미로웠고 얼마 전 ‘문장의 소리’ 팟캐스트 때처럼, 하드캐리 했다고 생각한다.

황정은 작가의 ‘일기’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코로나 시대의 이런 풍경은 앞으로 자주 보게 될 듯 하다. (<자모> 여름호에 실린 임국영 작가의 에세이도 그렇고)

시에서는 성동혁 시인의 아주 짧은 두 시편(<발레1, 2>)에 오래 눈길이 갔고, 이희형 시인의 <곱창>을 읽으면서는 분명히 예전에 이 시인이 ‘고기 구워 먹는 시'(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 내가 한심하다)를 쓴 적 있는 것 같고, 이 불판의 풍경이 아주 낯익은데 ‘증거’를 찾지 못해 매우 답답했다…

아무튼 소설은 다섯 편이 실려 있다.

1. 권여선, 실버들 천만사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 이후 첫 단편인 것 같다.

제목은 김소월의 시 <실버들>에서 왔고, 아래와 같다.

실버들을 천만사 늘어놓고도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

이내 몸이 아무리 아쉽다기로

돌아서는 님이야 어이 잡으랴

한갓되이 실버들 바람에 늙고

이내 몸은 시름에 혼자여위네

가을 바람에 풀벌레 슬피 울 때에

외로운 밤에 그대도 잠 못 이루리

시집 <진달래꽃>에 실려 있지는 않고 유작으로 발굴된 시이다.

소설이 2020년 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므로 기본적으로 ‘봄날은 간다’류의 정서를 깔고 있으며 권여선이 <봄밤>의 작가임을 상기한다면 “실버들을 천만사 늘어놓고도 /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라는 구절에 왜 꽂히게 되었는지 짐작할 만도 하다.

<봄밤>과는 다르게 이 소설은 모녀의 이야기다.

한 가정의 어머니로 자리 잡은 자신을 도저히 견디지 못해 이혼과 탈출을 감행한 엄마 ‘반희’와 그런 엄마의 부재로 상처받은 ‘채운’의 이야기.

초점화자인 ‘채운’의 아버지인 ‘병석’과 오빠인 ‘명운’은 언급만 될 뿐 등장하지 않는다.

‘병석’의 결혼식이 코로나로 취소된 일(이렇게 발빠른 소설이라니)을 계기로 1박 2일의 여행을 모녀는 떠나기로 하고, 그 이틀간의 이야기가 소설의 얼개다.

서로를 ‘반희 씨’, ‘채운 씨’로 부르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라든가 각자의 기억을 꺼내 공유하는 장면 같은 것이 좋았다.

읽는 내내 이건 좀 색다른 모녀 서사인가, 아닌가 고민하면서 또 이건 상당히 리얼하네, 작위적인데 하면서 끝까지 따라갔다.

아쉬운 것은 엄마인 ‘반희’가 견뎠던 그 시간들에 대해, 또 그 시간 속에서 ‘반희’나 ‘채운’이 느끼고 고민했을 여러 복잡한 사정에 관해 소설이 별로 설명해 주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나로서는 ‘꿈 많고 똑똑했던 한 여성이 독립을 원하던 차에 결혼이라는 제도에 휩쓸리듯 탑승해 괴로워하다 끝내 다시 자신을 되찾은 이야기’로 읽혔는데, 그러면 너무 단순하지 않을까.

이들 모녀가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 ‘화해’ 모드로 돌입하는 것도 조금 급전 같았다.

‘채운’의 나이를 고려하자면 이 스물다섯 해의 ‘앙금’이 너무 쉽게 해소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 소설은 ‘실버들 천만사’로부터 시작해 인연이라는 말, 실처럼 엮인 ‘우리들’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만드는데, ‘반희’가 자신의 일터를 “우리 체육관”이라고 말할 때 ‘채운’은 “2년 미만의 주기로 일자리를 옮겨야” 하는 ‘반희’의 상황을 떠올리고 ‘우리’라는 말이 “계약기간이 다 되어간다는 뜻”임을 알아차린다.

그러니까 ‘내가 요즘 일하는 체육관’에서 ‘우리 체육관’으로 옮겨가는 거리, ‘우리’라는 말에 담겨 있는 마음껏 사랑해도 된다는 함의.

지금껏 나는 무슨 짓을 하며 살아온 것일까, 반희는 생각했다. 두려워 도망치고 두려워 숨고 두려워 끊어내려고만 하면서. 채운과 이어진 수만가닥의 실을 끊어내려던 게 채운에게는 수천수만가닥의 실을 엉키게 하는 짓이었다면, 지금껏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온 것일까.(144쪽)

이 장면 이후 이어지는 둘의 화해가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는 결심을, 다른 무엇도 아닌 혈연에 대해, 내 몸 속에 들어 있던 또 다른 생명에 대해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뇌를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는 다짐을 평범하게 넘길 수는 없었다.

2. 김금희,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또 갱신된 김금희의 베스트.

작년 가을이었나,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에서 느꼈던 것과 유사하게, 정말 좋은 소설이면서 동시에 김금희만 쓸 수 있는 작품이다.

어쩌면 김금희는 제목에서 연상되듯 ‘우리’의 한 시절에 대해 계속해서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그것도 ‘여름’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지만 2000년대 초중반의 20대 청년 디테일에 관해서는 가히 독보적이다.

개인적으로 동세대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김애란이 길어올린 서사를 더 밀고 나간다는 느낌, 그리고 전성기의 김연수를 2020년으로 데려온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김금희의 회고-서사는 이제 더 말할 것도 없는 작가만의 인장이지만 그것이 매번 새롭고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내고, 또 단순히 회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어떤 식으로 이어질 때 아직 김금희에 관해서는 이야기할 거리가 많다고 생각된다.

소설은 주인공 ‘은경’이 ‘기오성’과 보낸 3개월 간의 여름을 떠올리는 내용이다.

물론 그 회상의 매개는 현재의 ‘청년 논객 기오성’을 찾고자 하는 누군가 때문이고.

아무튼 학부생 시절 노교수의 종택에 숙식하며 족보 정리 아르바이트를 했던 그 여름에, ‘은경’과 ‘오성’은 함께였고 이들의 마음은 무척이나 복잡했던 것 같다.

그것은 노교수의 손녀 ‘강선’ 때문이기도 한데 미국 유학을 준비하면서 사춘기에 접어든 ‘강선’과 이라크 파병을 준비하는 ‘오성’, 그 사이에서 계급적, 이념적 부박을 경험하는 ‘나(은경)’까지 2004년의 풍경이 선연하다.

‘기오성’은 김금희 특유의 남성 인물 계보에 놓일 것이고, 그 매력도 분명하지만 이 소설에서 나는 사실 ‘강선’이나 ‘사촌’ 같은 인물에 훨씬 더 마음이 간다.

‘오성’과 천변 텐트에서 하룻밤을 보낸 ‘강선’이 “언니, 그 밤에 누가 있어요? 우리는 밤새 우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어”라고 말할 때, 또 “눈빛 좀 봐, 언니를 보는 기오빠 눈빛에 사랑이 가득해”라며 중얼거릴 때 이야기의 텐션이 급상승하는 것은 물론이거나와 이 소설의 처음과 끝을 담당한 ‘사촌’의 경우, “아주 엉기가 난다”는 그의 말, 괜찮은 적따위 없지만 늘 “괘안타”라 말하는 그 선선한 태도가 소설을 풍부하게 읽게 한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거의 매 순간이 훌륭하고 인물들의 개성과 적절한 배치 역시 나무랄 데가 없다.

3. 명학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아마도 데뷔 후 세 작품 정도를 쓰지 않았나 싶은데, <폴이라 불리는 명준>과 <미친개의 처분에 관한 보고서>가 그 나름대로 흥미로웠다면, <dmswl>를 비롯해 이번 작품은 다소 무리하다.

<dmswl>에서 임신한 여고생(그러나 자살한)의 인스타그램 소재를 재현하는 방식도 그랬지만 이번 소설에서 ‘수진’을 다루는 시선이 굉장히 불편하다.

고교 동창 여럿과 아주 오랜만에 만나 술자리를 가졌고 어쩌다 ‘기훈’의 집으로 다들 가게 되었으며 거기에서 ‘수진’은 술과 약에 취해 침실에서 잠들게 된다.

소설은 ‘수진’이 기억을 잃은 채 ‘기훈’의 침대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이후의 전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수진’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 끔찍함이 여러 시선에 의해 대상화 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사실상 이 작가의 목소리는 “와, 여자들, 진짜 대단하다. 세상 남자를 죄다 범죄좌 취급하는구나”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은 그 날 밤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지만 정황상 불길한 시나리오를 떠올릴 수밖에 없고 작가는 그것에 ‘심취’하고 있다.

결말에서 ‘수진’이 이 모든 것을 일종의 음모로 느끼고 “닥쳐. 나는 안 숨어. 꼭 밝혀낼 거야. 무슨 일인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라고 결심하는데, 결국 남성 작가 내면의 ‘무고에의 욕망’으로밖에는 설명이 안된다.

여기에 ‘기훈’은 ‘현우’와의 미묘한 관계를 빌미로 ‘양성애자’로 암시되는데 그건 곧 ‘기훈’의 무고에 기여한다는 것 외에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이미 다른 여성 작가들은 저 멀리 앞서가 있다는 것만 적시해 두자.

4. 윤성희, 블랙홀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윤성희의 소설이어서 크게 덧붙일 말은 없지만.

귀농한 부모가 파국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이야기임에도 그래서 이 삼남매가 상당한 곤경에 처하는 이야기인데도 비극이 아니라 희극에 가깝게 여겨지게 만드는 스킬은 여전하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마을 사람들에 대한 증오로 음식에 농약을 탄 ‘어머니’가 수감 중인 지금, 시골집을 정리하기 위해 모인 삼남매의 회상은 다소 낭만적이지 않나 싶다.

나는 윤성희 작가가 <베개를 베다> 이후 쓴 단편들이 자극적인 사건들을 다소 손쉽게 ‘인생사’로 편입시킨다는 느낌을 받는데, 물론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생각하지만 그걸 시간의 두께로, 이른바 전통적이고도 단순한 방식으로 갈음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엄마’에 대한 이런저런 기억을 떠올리면서 가족 앨범을 태우는 삼남매의 모습이 “나는 언니가 어느 사진 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걸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는 걸 보았지만 못 본 척 했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 될 때 다소 갸우뚱해지는 것이다.

‘우리네 인생사 다 그런 것이지’ 정도에서 이 소설을, 나아가 윤성희의 근작을 얼마나 ‘더’ 읽어낼 수 있을까, 하고.

5. 이주혜, 자주 도둑

중편 분량의 작품.

충분한 볼륨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했다는 느낌을 받았고, 읽으면서 오랜만에 몰입했다.

그간 발표한 작품들을 따라 읽기는 했고, 아마도 곧 소설집이 출간되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이번 작품은 앞선 단편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앞선 평론도 있었지만 ‘돌봄 노동’에 관해 최근 한국소설이 꽤 많이 주목하고 있고, 주로 여성이 종사하는 간병과 육아 노동에 대해, 그 많은 ‘이모님’과 ‘여사님’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이 소설은 반드시 언급되어야 한다.

읽으면서 강진아 작가의 <오늘의 엄마>도 떠올랐는데, 엄마를 돌보는 딸의 이야기와 이 소설에서처럼 시아버지를 돌보는 며느리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다르지만 ‘간병’이 얼마나 사람을 소모시키는지, 죽음에 다다르는 과정은 새삼 얼마나 끔찍한지, 특히나 여성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가혹한지 두 작품 모두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 소설의 핵심은 그토록 젠틀했던 ‘시아버지’가 ‘섬망’의 증상이 나타나자 나의 아들을 빼앗아간 불충분한 ‘도둑년’이자 애도 안 낳는 ‘쓸모없는 사람’으로 며느리인 ‘나’를 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좆 까라, 가부장제!”를 외치며 이혼을 선택하는데, 이 ‘해소’가 개운하지 못한 것은 ‘영옥씨’ 때문이다.

시아버지의 간병인이었던 ‘황영옥’의 목소리는 소설 말미에야 들을 수 있는데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홀로 지켜봐야 했던 그가 주술처럼 “어르신, 염천에는 죽지 말아요. 한밤중에는 죽지 말아요. 좋은 날에 죽어요. 밝은 날에 죽어요. 자식이 보는 앞에서 죽어요”라고 말하는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어른들이 짓궂은 장난으로 아이를 괴롭히는 일본의 ‘나마하게’를 티비로 보면서 ‘영옥씨’가 그렇게 눈물을 터뜨렸던 이유와 그걸 ‘아동학대’라며 화를 내던 ‘나’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었을까.

그리고 마침내 시아버지의 횡포에 머리채가 잡힌 ‘영옥씨’와 병원 옥상에서 담배를 나눠 피며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 웃음을 터뜨렸던 그 순간, 그 간극은 얼마나 좁혀졌던 것일까.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자두가 시아버지의 변화와 더불어 이 소설을 견인하는 인상적인 상징임은 말할 것도 없고, 소설의 매 순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도 좋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소설을 여닫는 장치가 ‘나’가 번역한 책의 ‘역자 후기’를 작성해야 한다는 것인데, 에이드리언 리치와 엘리자베스 비숍을 언급한 방식이 다소 ‘직접적’이어서 오히려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생각도 든다.

소설의 핵심이 ‘끔찍한 가부장제’이기는 하지만, 번역 작업의 대상까지 일치시켜 소설의 방향을 제시하는 게 풍성한 여운을 다소 제한한다는 느낌이다.

닿을지 알 수 없는 엽서를 ‘영옥씨’에게 보내는 장면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너 이 녀석, 아침에 잘 일어나고 있는 거냐?”라는 ‘나미하게’의 말, “왜 나는 그만 자고 일어나라고, 이러다 지각하겠다고, 깨워주는 사람이 없는 걸까요?”라는 ‘영옥’의 말, 그리고 ‘나’가 “영옥씨. 아침에 잘 일어나고 있나요?”라고 안부를 묻는 결말까지, 정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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