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2020년 여름호

문사 여름호를 읽었다.

아무래도 하이픈 쪽에 눈길이 많이 갔는데, 일단 본권을 보면.

의욕적으로 확대되었던 리뷰 지면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듯해 좀 아쉽다.

두 권씩 묶어 필자들에게 리뷰를 맡기는 방식이 아무래도 심심하고, 조금은 다이나믹한 형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흑/백 리뷰의 실패를 거울삼아…)

김현 30주기 추모 특집에서 ‘원로’들의 대담이 흥미로웠다.

김현에 관해서라야 누구든 한 마디씩 얹지 않을 수 없을 테고, 이 지난 세기의 낭만과 회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세계이지만 이런 ‘재미’를 어쩌면 나는 지금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오로지 문학만 내다보던 이 안온함이 이제는 하나도 부럽지 않아서, 확실히 내 안의 무언가가 변했다고 느꼈다.

신인상도 발표되었다.

공교롭게도 세 부문 모두 93,94,95년생 여성 시인, 소설가, 비평가를 선택해서, 확실히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하이픈.

문사 동인 조연정 평론가와 함께 소영현, 장은정 평론가가 합류해 말 그대로 “문학을 제도와 체제로서 사유하는 일”에 대해 여러 꼭지를 기획하고 다양한 필자가 글을 실었다.

기대에 비해 전반적으로는 좀 아쉬웠던, 대부분의 글이 뒤늦게 도착했다는 느낌이었다.

올 상반기에 여러 지면에서 발 빠르게 기획했던 탓도 있고 각각의 필자 역시 그간 자신이 써 왔던 논지를 요약하고 있는 측면이 있어서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다기보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잘 정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대목들은 있었는데, 이를테면 이성미 시인이 “그런데 이런 글을 쓰면 뭐 하나, 하는 생각”과 함께 “문학과사회 편집동인과 출판사 문학과지성사는 이번 기획 원고에서 지적된 문제점을 문학과사회를 비롯한 자사의 문예지와 문학상, 출판물 계약서 관행과 절차에 어떻게 반영하여 개선할 것인지 응답해주시기 바란다”고 썼듯, 이제는 실질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그러했고.

장은정, 오은교 평론가의 글도 내게는 큰 고민이었는데, 특히 오은교 평론가가 “이 제도권이 평시에는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가 비상시에는 여자의 얼굴로 교체되는 순간들에 대해,” “여성 창작자들에게 전에 없던 기회와 싸우지 않고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지가 쏟아지는 상황들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고 쓴 것.

적어도 지금 비평의 영역에 있어서는 남성들이 일단 좀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그것이 여성 창작자, 비평가에게 모든 피로와 부담을 떠넘기고 있는, 전례 없는 담론의 형국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됐고, 가만히 있어도 중간은 가게 되어 있는, 아무것도 몰라도 그다지 위협받지 않는 나를 포함한 문단의 남성들을 떠올리게도 됐다.

(강화길의 <음복>이 마치 문단의 풍경처럼 떠오르기도 했다)

2009년의 6.9작가선언, 2014년 이후 304낭독회, 2016년의 페미라이터를 경유해 2020년의 현재를 돌아보는 장은정 평론가의 글은 ‘우리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라는 고민 속에 있다.

문학은 정치와 달라야 한다, 문학이 현실이 되거나 삶이 곧바로 문학이 될 수는 없다는 주장들에 대해, 즉 문학은 미학적 장르이자 예술의 영역이라는 입장에 대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문학은 분명한 반박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앞으로의 문학, 비평은 달라져야 하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 논의가 문학이 곧 삶, 그러니까 문학은 사실상 모든 것이며 비평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식의 이른바 문학지상주의 혹은 신비주의에 가까워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주 작디 작은 문학을 너무 과대평가 하는 게 아닐까 하는.

6.9작가선언이 아니라 ‘오구오구우쭈쭈’ 같은 촌극을, 304낭독회의 외침이 아니라 표절을 옹호했던 궁색한 언어 같은 것, 문단 내 성폭력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공허하게 발표되어 온 선언문들을 떠올리면 문학이라는 게 대체 뭔가 싶고, 비평이 “비평가들에 의해 문학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장르로 제한적으로 이해되어온 것” 이상으로 확장되어야 하나 의문이 든다.

오히려 비평은 섣부르게 삶의 윤리를 말하기보다 더 문학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게 아닐까.

장은정 평론가가 썼듯 “문학평론가와 비평가의 차이를 고민”한다는 것은, 내가 나의 삶조차 확신할 수 없는, 전례 없는 복합적이고도 복잡한 현실 속에서 문학평론가는 결국 일종의 논객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일까.

이 글에서도 잠깐 언급되고 있지만 문학평론가들은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논쟁이 아주 중요한 비평적 모먼트였다고 언급하기 전에, 비평이 그 작품의 호응에 사실상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것에 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작품을 읽고 그것에 관해 논의를 펼친다는 아주 단순한 비평의 영역조차 문학평론가들이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인용된 김미정 평론가의 말을 빌어 “점점 조밀해지는 분과 속에서 우리는 전문가가 되기를 권장받아왔”는데, 전문가라는 말은 곧 “내가 쓰고 있는 글이 어떤 위치와 맥락에서 어떤 소용과 의미를 가지고 어떤 과정에 놓여 있는지” 알고 있다는 의미에 가깝지, 왜 그것이 “나의 직업에서 스스로 소외되고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 의미는 왜소한 자기 분과에 갇혀 관습적이고 폐쇄적인 담론만 반복하는 어떤 경향에 관한 것이겠지만 적어도 지금 문학 비평의 범주에서 확장을 말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읽었고 고민은 계속될 것 같으니, 이 정도에서 소설을 읽자.

신인상을 포함해 총 다섯 편이 실려 있다.

1. 김이설, 환기의 계절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시의성’을 염두에 둔 게 아닐까 싶은 작품이었다.

결혼 후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밝히며 엄마와 가정을 버린 아버지와 지금 남편이 다른 연인이 생겨 이혼을 요구해오는 ‘나’의 이야기가 엮여 있다.

이른바 모녀 서사의 관점에서 두 여성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고, 사랑과 욕망은 다시 우정과 용서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고민할 지점이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다소 극적으로, 또 작위적으로 인물들의 관계와 사연이 설정되었다는 느낌, 여러 요소들이 낯익다는 측면이 크고 결정적으로 이 이야기에 굳이 ‘환기의 계절’으로 코로나 시국을 연결했다는 점이 무리였던 것 같다.

게이임을 선언하고 떠났던 아버지가 말년에 돌아왔고 그걸 받아준 엄마, 같은 사무실 사람과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람에게 아이가 생겼으니 이혼해 달라는 남편을, 딸인 ‘다린’을 생각해서라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나’가 모종의 화해로 이어지는 결말도 좀 단순한 방식이 아니었다 싶다.

2. 송지현, 오늘의 가족

이 속도라면 금방이라도 두 번째 소설집이 나올 것 같다.

정확히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연작 성격으로 쓰고 있는 것 같고, 올해 발표한 <손바닥으로 검지를 감싸는>, <진강이의 액센트>,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 등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 작품이 추후 표제작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고, 이주란의 서사와 비슷하면서도 흥미롭게 다른 지점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아무튼 ‘미주’가 외조부의 장례식장에 머무는 동안의 이야기들이고, 당연하게도 가족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가 끼어든다.

전반적으로 가족에 대한 우리 세대의 감각이랄까, 낯설지만 또 사실은 굉장히 낯익은 어떤 가족의 풍경에 관해 인상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가족, 친지, 혈연이라는 것은 참 복잡하고도 심란하며 제목처럼 ‘오늘’의 가족은 또 다르다는 점이 나름대로 신선했다.

‘미주’의 부모가 동성동본이라는 이유로 결혼이 늦어졌다는 장면에서 이런 대화가 새삼 재미있었다.

― 엄마, 할머니는 성이 반씨잖아.

― 그렇지.

― 외할머니는 우씨고.

― 그렇다.

― 그럼 동성동본의 결혼이 왜 금지된 거야.

― 그땐 몰랐지. 그땐 몰랐어.

3. 우다영,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

‘아니, 이게 우다영이 소설이라고…?’라는 생각과 ‘아, 우다영의 작품이네’라는 생각을 교차해가며 읽었다.

마치 김초엽과 정소연을 합쳐 놓은 듯한 SF로맨스가 매력적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이런 설정이 늘 그렇듯, ‘영혼’과 ‘각성’이라는 개념이 명확하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고, 무수한 생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깨닫게 된다는 식은 사실상 불교의 세계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든 ‘인연’의 반복이라는 것, 결국은 패턴이자 관계라는 깨달음이 흥미로웠다.

‘아즈깔’이라는 풀의 이야기, 영혼과 각성을 연구하는 ‘언니’와 ‘나’, 그리고 다양한 ‘각성자’들, 무엇보다도 ‘원호’ 같은 캐릭터가 아주 매력적이었다.

이 소설을 끝내 긍정적으로 읽게 된 것도 ‘나’에게 찾아온 각성의 순간이 ‘원호’의 관계로 이어지는 결말 때문이었는데, “그리고 나와 원호의 영혼을 떠올리면, 나는 잠시 아득해진다”라는 문장부터 시작되는 소설의 마지막 세 문단 정도가 정말로 아름다웠다.

문사 여름호의 시 지면에는 조용미 시인의 <구체적인 삶>이라는 작품이 실려 있는데 아마 두 사람이 매우 놀라며 서로의 작품을 읽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4. 신종원, 멜로디 웹 텍스처

<전자 시대의 아리아>, <밴시의 푸가>, <작은 코다>로부터 이어지는 신종원의 음악 소설.

어쩌면 신종원은 김태용이 <음악 이전의 책>에서 보여준 그 스타일의 훌륭한 후계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앞선 발표작들도 그랬지만 이 소설 역시 흥미롭게 또 어떤 대목에서는 짜릿함을 느끼며 읽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어떤 집에 살고 있는 ‘거미’가 ‘세입자’인 사람들을 위협하며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소설은 매우매우 복잡하다.

거미줄을 치는 장면이 베를 짜는 길쌈꾼의 꿈으로 연결될 때 이 느닷없는 확장과 몰아치는 음률은 다소 과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직전 작품 <작은 코다>의 멸치잡이 노래 같은 걸 떠올리면 충분히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아라크네의 형상으로 이어지는 결말도 역시나 <작은 코다>의 세이렌처럼 다소 신화적 비약으로 손쉽게 마무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또 마누엘 푸익의 <거미 여인의 키스>를, 김솔의 <유럽식 독서법> 연작을 떠올리면 역시나 흥미롭게 읽힌다.

무엇보다도 어쨌든 신인 작가가 자신의 확고한 스타일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지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5. 구소현, 요술 궁전

문사 신인상 소설 부문에는 총 501명이 응모했다고 하고, 최종적으로 이 작품과 <검은 말>이라는 작품이 남았던 것 같다.

심사평으로 추측건대 <검은 말>은 말 그대로 문지 스타일의 작품이었던 것 같은데 작년도 그렇고 창비의 최근 경향도 에꼴이나 사단을 형성하려는 의식이 많이 옅어진 것 같다. (심사에서 천운영 작가가 캐스팅 보트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 소설은 연인인 시각장애인 ‘선우’와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게 될 ‘환’의 이야기다.

여기에 ‘선우’의 자살시도가 이 연인의 현재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류의 이야기가 대체로 그렇듯 고통을 소비하는, 인물을 극단으로 몰고가고 있다는 혐의를 우선 받을 수밖에 없는데 이 작가가 많은 고민 끝에 그걸 잘 봉합했다는 생각이 든다.

수상소감에서 밝힌 바 이 소설은 이들의 헤어짐으로 끝날 예정이었는데 결국 “둘은 오랜만에 솔직했다”는 문장으로, 다소간의 희망을 남겨 두었다.

장애와 고통에 관해 이 작품이 얼마나 진전된 시선을 보여주는지 나로서는 판단이 어렵지만 소설이 형성하고 있는 분위기나 감각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제목이자 소설 속에서 언급되는 천위메이의 <요술 궁전>이라는 중국 소설은 실재하지는 않는 듯한데 그래서 오히려 아쉬웠고, 소설에 달려 있는 주석들이 흐름을 방해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불필요해 보였던 점도 단점이라 생각된다.

읽어주는 소설을 내용을 모른 채 골라온다고 했지만 사실 ‘환’이 해피엔딩인지를 꼭 확인하고 책을 구매한다는 결말에서의 언급은 다소 예상되는 방식의 마무리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 소설 전체가, 실제 작가의 말까지 포함하여, 힙겹지만 끝내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결심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나름대로 설득되는 지점이 있었다.

같이 투고된 <수수께끼를 푸는 방식>도 곧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1 Response

  1. 선생님, 장은정입니다. 블로그에 쓰신 글이다보니 지면에 발표하는 원고와 달리 촘촘한 논리적 전개를 읽기는 어려워서 선생님의 주장은 알겠으나 그 주장이 도출되는 과정은 제가 정확히 이해하진 못한 것 같습니다(제 주장이 어째서 문학이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문학지상주의로 읽히는지 사실은 이해가 안갑니다). 어쨌든 제 글에 대해 피드백 남겨주신 것에 감사하게 생각하며, 김봉곤 작가 사태 이후에도 “오히려 비평은 섣부르게 삶의 윤리를 말하기보다 더 문학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게 아닐까.”라고 여전히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오히려 이 사태를 겪으며 제가 최근 2~3년 간 작가중심주의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던 것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겪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번 김봉곤 작가 사태 이후에도 여전히 비평이 삶의 윤리보다는 문학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