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 대해 쓰면서 자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것(《자음과모음》2020년 가을호 머리말)

당신 인생에 관한 소설을 쓰고, 당신 인생으로 대가를 지불할 것. 최소한 세 번은.

자, 여기 도끼.

알렉산더 지, 『자전소설 쓰는 법』, 서민아 옮김, 필로소픽, 2019, 328쪽.

유난히 올 여름은 길었던 것 같다. 전례 없는 전염병의 시국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고 이상 기후에 따른 긴 장마가 이어지기도 했지만 여러 충격적인 사건·사고가 쉴 새 없이 터졌기 때문이다. 연이은 죽음들과 무력감을 느끼게 했던 선고, 불안한 사회와 믿을 수 없는 사람들, 그 와중에 한국문학은 다시 깊은 자성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꽤 오래 전인 듯 하지만 이상문학상 사태가 터져 나온 것은 2020년, 고작 올해 초의 일이었다. 그 이후 크고 작은 문제들이 계속 가시화되었고 급기야 김봉곤 작가의 이른바 ‘사적 대화 무단 인용’으로 한국문단은 엄청난 내홍을 겪어야 했다. 작가 개인의 책임과 윤리 문제에서 문학상과 출판사, 그리고 비평의 문제까지 불거진 이 사태에서 가장 첨예하면서도 근본적인 질문은 ‘소설이란 무엇인가’였다.

명칭을 어떻게 하든 소설이라는 장르에 작가인 ‘나’를 직접적으로 기입하는 방식은 오래된 전통이다. 고백록의 시대가 있었고, 자서전과 자전적 소설이 있었으며, 사소설과 오토픽션까지 무수한 시도와 논의들이 있어 왔다. 자전소설은 간단히 말해 작가-서술자-인물의 구도에서 이 세 층위를 일치시키는 방식이다. 자연인으로서의 ‘나’와 이야기를 전달하는 ‘나’, 그리고 소설 속에서 움직이는 ‘나’를 구분하지 않고, 1인칭의 세계로 합치하려는 그 시도는 그러나 당연하게도 여러 국면에서 ‘불가능’하다.

자전소설은 ‘나’를 드러내는 형식이며 그것은 작가인 ‘나’가 자신을 철저하게 대상화하는 일과도 같다. 즉 가감 없고 솔직하게 자신을 재현하겠다는 태도는 주체에 대한 환상을 동반한다. 따라서 픽션이 작동하는 기본 원리가 그 허구를 사실로 받아들이겠다는 ‘믿음’인 것처럼, 이를테면 필립 르죈이나 스즈키 토미가 탐구했듯 자전소설은 ‘약속’의 영역이다. 그 약속은 자서전이나 사소설처럼 장르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텍스트에 담긴 ‘표지’들로 담보된다. 인물에 대한 정보, 벌어진 사건들과 에피소드, 그리고 메타적인 장치들.

자전소설의 작가들은 소설이 현실을 원작으로 하는 2차 창작일 수 없다고 믿는다. 소설은 현실을 각색하거나 재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현실 그 자체라는 의미일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소설이 현실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오직 ‘나’에 관한 것일 때, ‘나’를 쓰기 위해 모종의 모험을 감행할 때 소설의 곤경은 생겨난다.

누군가의 소설이 누군가에게 고통과 상처가 되어 현실에서의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일은 그것의 의도성과 무관하게 명백히 작가의 비윤리적인 태도의 결과일 것이다. 그 피해를 ‘법적·제도적으로 따져 물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는 별개로 그것이 ‘소설’이기 때문에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이 ‘자전’소설이 지불해야 할 대가이고 감당해야 할 불안이다. 예컨대 자전소설은 늘 ‘무대 뒤’를 보여주려고 하지만 무대 뒤의 풍경을 결국 ‘무대 위’로 가져오게 되고, 나아가 현실의 ‘나’가 무대로 등장하는 게 아니라 무대가 된 현실을 살아가는 ‘나’로 자아 연출의 ‘역전’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데 그 딜레마는 결코 해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우리는 자전소설에 대해 지나친 회의나 우려를 표할 이유는 없다. 소수자의 삶이 가시화되는 것, 세계를 1인칭으로 그려내는 것, 당사자로서 발화하는 것 등에 대해 자전소설은 자기 검열의 기제를 강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더 큰 가능성의 영역을 확보해나가야 한다. 소위 정체성 정치의 ‘정체성’에서 주체의 “억압에 대한 경험”과 “대안의 가능성”이 중요한 두 축이라고 논의되는 것처럼, 자신에 대해 쓰면서 자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전소설의 핵심 명제일 것이다. (크레시다 헤예스, 『정체성 정치』, 강은교 옮김, 전기가오리, 2020, 21쪽.)

다원성에 기초한 3세대 개인주의를 역설한 이졸데 카림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우연과 불확실성, 분열과 개방의 상태에 놓여 있다. “타자에게 더 이상 정상의 기준으로 제시될 수 없”고 “스스로에게도 정상을 제시하지 못”하는 일은 “소수자의 전형적인 경험”이었지만 “오늘날은 주류 사회도 소수자 사회처럼 기능”하고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이졸데 카림, 『나와 타자들』, 이승희 옮김, 민음사, 2019, 60쪽.) 또 그는 이 축소된 자아와 감소된 정체성의 시대는 우리를 무척 혼란스럽고 수고롭게 만드는데, 결국 “어떻게 동등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다를 수 있을까?” (위의 책, 71쪽.) 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이 사회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고 역설하기도 한다. 한 사람을 구성하는 정체성이 다양할 때, 소위 무수한 정체성이 ‘나’에게서 교차될 때,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나’로 통합시키고 또 증명할 수 있을까. 혹은 분열과 모순을 인정하고 여러 ‘나’를 어떻게 승인할 수 있을까.

조남주의 「오기」는 페미니즘 소설로 큰 성공을 거둔 작가 ‘나’가 고교 은사인 ‘김혜원 선생님’을 만나게 된 이야기이다. 무수한 악플에 시달리면서 작품의 후유증에 시달리던 ‘나’는 선생님의 부탁으로 거절해오던 외부 강연을 수락하고 그 날 선생님으로부터 아버지에게 당했던 가정폭력의 경험을 전해 듣게 된다. 그 일은 ‘나’가 유년기에 겪었던 가정폭력을 상기시켰고 ‘나’는 그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발표하는데, 선생님으로부터 “어떻게 남의 얘기를 고스란히 훔쳐다가 쓸 수가 있”느냐는 항의 전화를 받게 된다.

이번 소설이 내 이야기였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나도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생각과 감정을 드러낼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항변하는 것 같아 싫었다. 대체 그 자격은 무슨 기준으로 누가 왜 정하는 건데. 나 자신에게도, 누구에게도, 선생님에게도 그런 조건을 들이대고 싶지 않았다. 그냥, 너무 지쳤다. 나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조남주, 「오기」, 《Littor》, 2020년 4/5월호, 140쪽.

결국 ‘나’는 가장 악플을 많이 달았던 사람이 그 날 동석했던 선생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밤 우리 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얼마나 서로를 깊이 이해했는지, 얼마나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는지”를 떠올림과 동시에 “내 흔적을 악착같이 따라다니며 그렇게 모욕적인 글들을 남”긴 “그 두 마음”이 “과연 다를까” 하고 생각한다. 이렇게 바꿔 말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건 정말 내 이야기야’라고 감탄하는 독자와 ‘내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갖다 쓰다니’라며 분노하는 독자는 얼마나 다를까, 라고. 혹은 그 이야기가 작가의 실제 경험이라면 그 소설은 정말 다르게 읽히는가, 하고.

최근의 한국문학에서 재현의 윤리를 논할 수 있는 사례는 적지 않고 특히 여성과 퀴어, 장애인 등 소수자 정체성의 재현에서 여러 논의가 있어 왔음에도 다시금 이에 대해 성찰하고 고민해야 할 시점임은 분명하다. 특히 당사자성에 기초한 1인칭 담론을 형성해나가고, 창작자들에게 은연중에 ‘더 고백해’, ‘네 이야기를 써’, ‘우리는 네가 궁금해’, ‘네가 겪은 더 끔찍한 이야기를 해 봐’라고 말하면서 내밀한 자기 고백에 환호하고 또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대체로는 여성인 작가들에게 늘 ‘사실’을 확인하려 들었던, 피해자의 위치에 있는 당사자성에만 날카로웠던 그 비평의 잣대를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비평이 문학의 유통에만 활용되고 그 상품성에 복무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문학의 스캔들을 추동하고, 폭로를 추인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서도 곤란하지 않을까. 여러 ‘나’들이 경합하는 지금 한국문학의 현장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무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을호를 준비했다.

이번 호의 게스트 에디터는 열정적인 서평가이자 성실한 인문학자이면서 러시아 문학을 기반으로 근현대문학을 깊이 있게 읽어내는 문학사가 로쟈 이현우 선생이다. 우리가 다양한 게스트 에디터들을 논의하면서 결국 ‘고전’이라는 주제로 접근하게 되었을 때 이현우 선생에게 제안을 드리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이토록 다방면의 고전들을 꾸준히 섭렵하고 그 독서의 결과를 많은 독자들과 공유해온 경험은 우리가 무한대의 신뢰를 갖고 기획을 부탁드리기에 충분했다. ‘다시,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흥미로운 글들이 실려 있는지는 <게스트 에디터의 말>을 통해 확인하기 바란다.

기록 지면에서는 ‘구독’이라는 키워드로 세 필자의 글을 싣게 되었다. 우리가 염두에 두었던 것이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텍스트의 확장이기도 했지만 각각의 필자가 개성적인 글을 보내주어 더욱 흥미로운 지면이 되었다. 서호준의 시인 ‘엄정동’에 관한 이야기, 이유리의 엄마와 꽃에 관한 이야기, ‘전기가오리’ 운영 경험을 토대로 구독 모델에 대한 실제적인 조언을 건네는 신우승의 글이 그것이다. 필자들 모두가 구독 플랫폼의 운영자이(었)기도 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더 풍성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크리티카는 ‘픽션-논-픽션’이라는 주제로 꾸려 보았다. 공교롭게도 ‘픽션’이라는 장르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요청되는 시기에 문학의 범주로서 ‘논픽션’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지면이 되었다. 우선 김인환 선생께 산문에 관해 짧은 글을 부탁 드렸다. “소설은 꾸며낸 이야기이고 산문은 겪어본 이야기”라고 간명하게 정의하면서도 좋은 산문이란 무엇인지 오생근의 근작을 꼼꼼하게 읽어내며 살피고 있는 이 글은 다소간 닫혀 있던 문학의 시야를 넓힐 수 있게 한다. 오랫동안 르포작가 및 르포문학 강사로 활동해 온 김순천은 세계의 다양한 르포 저작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르포는 환상이나 상상의 세계는 다루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편견이며 “르포가 다룰 수 있는 세계는 무한하며 다양하다”는 언급이었다. 르포문학을 좁고 특수한 범주로 여겨왔다면 역시나 이 글이 그러한 통념을 깨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번역가 노승영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일화들을 언급하면서 (논)픽션의 윤리에 관해 흥미로운 사례를 소개한다. 특출난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월리스는 프라이버시의 문제를 비롯해 ‘퍼블리시티권(right of publicity)’의 문제로 곤혹을 치른 바 있는데 그것은 필자가 언급했듯 지금의 한국문단에도 시사하는 점이 있다. 임현 작가는 자전적 소설, 자서전, 오토픽션 등의 개념이 섬세하게 검토되어야 함을 역설하면서 프랑스 문학에서의 그 치열한 논의 전개 양상과 달리 “한국문학은 애당초 문학으로서의 자서전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을 뿐더러, 마찬가지로 평전이나 르포르타주, 여행기나 구술록 등의 논픽션 서사에 대한 문학적 지위를 보장한 적도 없”다고 쓰고 있다. 즉 “문학을 픽션-논픽션으로 폭넓게 구분하는 서구와 달리, 문학-비문학 혹은 소설-비소설의 구분이 익숙”한 한국문학은 그 장르적 범주가 매우 좁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러 논의에서 문학 혹은 한국문학을 문단에서 생산되는 단편소설로 전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동의하지 않기가 어렵다. 말미에 ‘존중’이라는 단어에 도달하기까지 이 글을 함께 읽으며 고민할 수 있기를 바란다.

테마 리뷰는 반환점을 돌아 각각의 필자가 세 번째 원고들을 보내 왔다. 세 작가의 작품을 통해 ‘고독과 몽상’을 읽어내는 김유태의 글, 아이에게 쓴 편지 형식의 회고록을 통해 젠더와 인종의 문제를 고찰하는 노지양의 글, 이상우의 『두 사람이 걸어가』를 이질적 1인칭으로 분석하는 민경환의 글, ‘스텔라 오딧세이 트릴로지’라는 이름의 김보영 소설 세 편을 토대로 SF장르의 약진과 현재를 조망하는 오은교의 글, 김연덕의 시 「그릭크로스」를 읽고 이야기를 나눈 조대한의 글 등은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계간평 지면인 큐러티시즘은 역시나 신인 평론가 두 분께서 맡아 주셨고 홍성희 평론가가 ‘공간’을 키워드로 세 편의 시를, 이소 평론가가 ‘거리’의 관점에서 네 편의 소설을 읽어내 주었다. 품이 많이 들고 태는 별로 나지 않는 일에 기꺼이 참여해 준 필자께 감사드린다.

창작란도 풍성하다. 김이강, 박상수, 배시은, 서윤후, 손유미, 안희연, 이영재 시인의 신작시와 박서련, 이장욱, 이주란, 황여정 작가의 단편소설, 그리고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치는 김희선 작가의 장편까지 준비되어 있다. 여러모로 어려운 시기에 애써 작품을 보내 주신 필자 분들께 깊은 감사를 전한다.

마지막으로 좋은 소식을 한 가지 전할 수 있어 기쁘다. 가을호부터 김나영, 조대한 평론가가 편집위원으로 합류하였다. 든든한 동료가 생겼다는 기쁨과 더불어 『자음과모음』이 추구하던 혁신의 동력이 더욱 다채롭게 이어지리라는 기대와 다짐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언택트’가 되었든 ‘뉴노멀’이 되었든 포스트 코로나의 사회가 무척 달라질 것이라는 예측은 틀리지 않을 것 같다. 한국문학 역시 이 시기를 지나며 여러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그 변화의 자리에, 또 그 많은 고민들 속에서 『자음과모음』도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무엇보다 건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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