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티컬 에세이

‘불안의 비평’이라는 기획 아래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최근에 썼다. 그간 하고 있던 고민들을 두서없이 풀어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이 블로그의 운영, 즉 문예지 소설에 대한 감상을 남기는 일을 그만두기로 한 과정이기도 하다. 블로그를 당장 닫거나 없애지는 않겠지만 그간 해오던 일들은 그만두고 뭘 할 수 있을지 천천히 고민할 작정이다. 개인적으로 업데이트를 궁금해 하시던 몇몇 분들이 계시기도 했고 그냥 두는 게 다소 무심해 보이기도 해서 이런 글을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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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모 평론가가 ‘각주가 없는 글’이 쓰기 어렵다고 말한 걸 들었다. 자료와 싸우고 또 분석하면서 실증적인 탐구를 해나가는 방식과 자신의 삶과 견주어가면서 스스로의 감각이나 느낌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비평적 글쓰기의 차이를 얘기하는 것 같았다. 비평에서 비평가인 ‘나’를 어떻게 보여줘야 할까, 아니 비평가인 ‘나’가 글 속에 드러날 이유가 있을까, 같은 질문들을 나도 하고 있었다. 자신의 비평은 남성 평론가의 텍스트로 읽힐 수밖에 없음을 자각하는 평론가도 있었고, 성찰과 고민 속에서 끝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비평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특정 사례를 떠올릴 필요도 없이 한국 문학장의 여성 평론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 ‘나’와 치열하게 싸워 오고 있다.
나는 어떨까. 언젠가 “‘나’를 지우고 비평 행위를 한다는 것이 명백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설령 그것이 비평이 아니라 에세이에 가까워진다 하더라도 애써 ‘나’의 흔적을 지우기보다는 드러내자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고 쓴 적이 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솔직해지자는 명분 아래 오히려 나의 부끄러움과 무지는 감추고 입바른 말들을 늘어놓기에 바빴던 것 같다. 그렇게 했음에도 편견과 배제가 노출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고. 작가를 탐구하고 작품을 분석한다는 명목으로, 거기에 비평이라는 행위가 가져다주는 기묘한 중립성과 엄정함에 취해 내가 마치 판관이 된 것처럼 여겼던 것도 같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문학 비평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작품에 대한 평가가 아니면 무엇일까, 늘 고민해왔다. 선호를 드러내지 않는 비평은 가능할까. 비평에서 작가나 작품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문학비평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아마도 특정한 작품은 동원되지 않을 텐데, 물론 일종의 메타비평의 성격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글은 에세이와 구별될 수 있을까. 소위 ‘비평적 에세이’로 이름붙일 때, 그 글은 비평가의 사유를 음미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문학 비평가는 정말로 ‘삶’을 비평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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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이라는 말을 스스로 쓰지 않은지는 좀 오래되었고, 데뷔라는 말로 표현해오다가 최근에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2013년부터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라고. 그런데 이런 수식에서 마치 고학력자가 ‘출신 학교를 표기하지 않습니다’를 프로필에 걸어 놓았을 때의 묘한 불편함을 느낀 것도 최근의 일이다. ‘2013년부터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고 쓸 수 있을 때, 그 뒤에 감추어진 맥락들은 불필요한 것일까, 불가피한 것일까. 어쩌면 삭제해도 무방하지만 공개되어도 나쁠 것이 없는, 마이너스 값의 제곱 같은 게 아닐까.
아무튼 대부분의 비평가가 그렇겠지만 나 역시 문학 비평가가 되어야겠다는 확고한 생각이나 모종의 준비가 있지는 않았다. 막연하게 언젠가는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었고 다소 우연한 계기로 한 편의 글을 완성해 응모하게 되었다. 투고를 하면서도 비평가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비평 활동이라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거의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이런 ‘무지’가 일종의 특권이었음을 역시 최근에야 조금 깨닫게 되었다. 늘 문학에 관한, 문학 비평에 관한 교육을 받아왔고, 물론 직접 알지는 못했지만 평단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선배들, 선생님들의 글을 읽으면서 혹은 그 문학사를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친연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고, 그 결과로 나는 대단한 결심이나 엄청난 각오 없이도 그냥 비평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비평가가 되고나서야 내가 얼마나 문학을 사랑하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갑자기 나는 선생님이 되었고, 문학평론가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평론 쓰는 사람이라는 말로 소개를 하게 됐다. 그건 서서히 일어난 변화가 아니라 2013년 9월 이후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청탁 전화를 받고, 문단의 모임 자리에 잠깐 나간 직후 곧바로 생겨난 일이었다. 그 즈음은 이런 생각뿐이었다. 내가 이제 비평가가 되었다고? 내가…? 지금…?
그러기에 나는 한국문학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이 필드에 대한 무지를 들킬까 봐, 특히 읽지 않은 작품이 얼마나 많은지 누군가가 알게 될까 봐 그야말로 전전긍긍했다. 공부하지 않은 채로 시험장에 앉아 있는 수험생의 심정으로 나는 만약 그 ‘순간’이 온다면 겸허하게 인정해야겠다는 마음도 먹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순간은 단 한 차례도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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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비평가라는 직함은 예상과 달랐다. 무엇보다 내가 생각했던 형태의 비평은 대체로 주어지지 않았다. 비평가로서의 삶에는 어떠한 절차도 없었고, 단지 문예지로부터의 청탁이 있을 뿐이었다. 대체로 쪽글 형태의 리뷰였으며 그마저도 선택권 없이 작품이 지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본격적인 작가론이나 주제론 성격의 글을 쓰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고 문학 잡지의 말미에 이름을 싣는 것도 흔치 않은 기회였다.
비평을 둘러싼 한국문학의 구조적 체계를 미처 이해하지 못했을 때였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 있던 비평의 방식이 이러한 ‘청탁’ 시스템이 아니라는 생각은 계속 맴돌았다.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이 아니라 의뢰받은 글만을 소화하는 비평가가 자율적이고 독립적이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자명하고, 쉬지 않고 글을 써내도 최소한의 생활조차 어려운 이 세계에서 그렇게 버틸 이유도 없었다. 다른 직업군과 마찬가지로 비평가 역시 제일 두려운 것은 해고이고, 그것은 명시적으로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개점휴업’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블로그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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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에 실린 비평을 읽는 독자가 얼마나 될까. 그것도 짧은 지면을 차지한 알려지지 않은 평론가의 글을. 그 글은 문예지의 구색을 갖추는 데는 꽤 도움이 될 테지만 대화의 씨앗조차 되지 않을 만큼 영향력은 미비하다. ‘비평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만큼이나 비평가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비평은 누구나 한다’는 사실이다. 작품을 읽고 그에 대한 느낌을 적어내는, 즉 모든 종류의 독후감은 당연하게도 비평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그래도 비평이라는 행위는 상당히 훈련된 전문가가 정제되고 논리적인 언어를 사용해 작품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겸하는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 글.’ 그런 글들이 문예지에 실린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확장’시키고 싶어 하고, 문학 작품을 읽는 일도 마찬가지다. 독서는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행위 중 하나이지만 비평의 자리는 그것에 관해 ‘함께’ 말할 때 열린다. 그런데 누군가는 비평의 무용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작품은 자유롭게 감상하면 그만이지 전문가의 해석 같은 건 불필요하다고. 문학이라는 유통 과정에서 관행적으로 따라붙는 비평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도 많다. 문예지에서 비평가는 적폐나 권력의 이름으로 퇴출되기도 하고, 긴 글을 읽을 독자는 이제 없다며 비평의 분량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문학 단행본에 실리는 해설은 점점 더 요식 행위처럼 취급되기 일쑤다.
내친 김에 한국문학의 비평적 글쓰기에 자주 제기되는 문제 중 하나인 ‘주례사 비평’에 관해서도 얘기해보자. 작품에 대한 상찬만을 늘어놓고 비판 정신을 도외시하는 행태를 적시하는 아주 오래된 용어인데, 요즘은 ‘스타 만들기’에 복무하는 비평이라고도 불리는 것 같다. 비평에 대해서 엄숙하게 일침을 놓는 사람들은 이렇듯 ‘비판’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비판 정신, 비판적 관점, 비판적 시선… 그런데 결혼식에 참석해 그 앞날을 축복하고 있는 주례에게 비판적 태도를 가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문제는 주례사 자체가 아니라 비평가가 서 있는 주례라는 위치다. 그렇게 보면 요즘은 ‘사회자’의 역할을 비평이 담당하고 있는 듯도 하다. 작품에 대한 적절한 정리와 평가, 독자와 작가를 매끄럽게 이어주는 역할 같은. 그렇지만 비평가에게 제일 어울리는 자리는 역시 하객일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축하하는 마음을 갖되 이 결혼이 정말 축복할 만한 일이지, 아니 차라리 결혼이라는 제도가 도대체 필요하기나 한지 질문하고 토론하는 일을 일삼는 아주 까다로운 하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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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들도 그렇지만 문학 창작자에게 가장 답답한 일은 도무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아무런 피드백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단행본이 출간되면 상황은 조금 나아지지만 그마저도 ‘반짝’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문예지에 발표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작품을 쌓는 정도의 작업으로만 남는다. 처음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원고는 지면에 쓰고 비평은 블로그에서 한다는 마음을 먹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책은 출판사가 팔고 비평가는 문학을 판다는 거창함 같은 것은 없었고 내 자신만의 감각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감상을 요구받아 힘겹게 써내는 글이 아니라 아무런 제약도, 형식도 없이 떠오르는 말을 다 써버리고 싶었다.
이런 일이 상당한 불안을 동반하는 과정이었음은 다소 뒤늦게 알게 되었다. 작품에 대한 일종의 피드백을 염두에 둔 행위이기는 했지만 이 글들을 누군가 읽으리라는 생각을, 또 작가가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은 깊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매너를 갖춘 하객이고 싶었는데, 뒷담화를 하다 들킨 기분이었다.
심지어는 발표된 소설들에 별점을 매기기 시작하면서 내가 비평가라는 자의식에 취해서 그 행위를 다소 즐기기도 했던 것 같다. 작품을 열심히 따라 읽지 않는 사람들을 일종의 직무유기자로 몰아세우고, 그럴 듯한 언어로 휘감아 그 작품이 좋다는 것인지 싫다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행위를 경멸하면서 날선 표현을 자주했다. 문학 비평가는 당연히 일종의 전문가이자 프로이므로 필드에서 가열하게 뛰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다소간의 저열함을 무릅쓰고서라도 정확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모습이 내가 그토록 경멸하던, 문학을 신비화하고 우상화하는 문학주의자들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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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 어떤 작품에 관한 언급을 짧게 남긴 뒤, 그에 관한 문제 제기 성격의 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대체로 정당한 비판이었고,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다만 그런 생각은 남았다. 이건 그냥 몇 줄의 트윗일 뿐이잖아?
그때쯤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 스스로의 인정이나 감각과는 별개로 나는 한 사람의 비평가이고, 내가 뱉는 말, 쓰는 글은 모조리 비평의 텍스트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 ‘비평은 블로그에 한다’는 그 순진하고도 단순한 결심이 얼마나 많은 것을 의미하는지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언젠가 나는 “이 시대의 시인이나 소설가들은 상업성에 초연한 태도를 가지면서도 누구보다 적극적인 마케터가 되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손쉽게 외면 받고, 그렇게 잘할 경우 더 손쉽게 비난 받는다”고 쓴 적이 있다. 또 최근의 문학적 경향에 대해 “이제 한국문단은 좋은 작품을 써내는 것에 더해 어떤 기획과 조직의 능력까지 창작자에게 요구하”고 있다고도 썼었다. 비평가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문학을 판다는 이름으로 비평가인 나를 세일즈 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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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어떤 비평가가 문학은 질문하는 장르라고 정의하면서 끝끝내 대답하지 않는 권력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을 보았다. 그런데 동시에 나는 질문할 수 없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자신의 발언권이나 채널의 소유 여부 같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질문을 할 여력 없이 작품을 쓰는 데 간신히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는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이, 특히 그런 비평가들이 한국문단에 많다고 생각한다.
어떤 비평적 의제가 던져졌을 때 그곳에 참여할 수 있는 비평가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이 지면처럼 비평의 불안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도 제한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매해 데뷔하는 시인, 소설가들이 몇 명이고 이 중 아주 적은 창작자만이 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는 분석은 흔하지만 비평가는 그런 분석의 자료도 되지 못한다. 어렵사리 자신의 단행본을 가질 수 있는 시인, 소설가는 있어도 비평가는 없다. 독자를 곧바로 만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 창작자의 대열에 비평가는 대체로 속하지 못한다. 그럼 대체 지금 한국의 문학 비평가는 무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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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이 정치적 올바름에 매몰되어서 작품은 물론 비평이 ‘온건’해지고, 여성-서사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편향이 발생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최근 한국문학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가시화된 ‘독자’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비평가도 있다. 경청할 만한 논의이지만 납득하기는 어렵다. 다소 문학 바깥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검열이나 소송 같은 말이 창작자의 입에서 나오고 ‘시민 독재’ 운운하는 것을 지켜보면 황당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에서 금기를 깨트리는 상상력, 불온함과 광기, 충동과 욕망 같은 것들이 얼마나 새로운 감각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안다. 그리고 위대한 예술이 대체로 그래왔다는 것도. 하지만 문학이 싸워야 할 것은 부당한 억압이나 불편한 구속이지 부도덕한 일탈의 실현이나 비윤리적 욕망의 해소 같은 게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이 창작자들을 질식시킨다고 여기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왜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일종의 완전무결함을 강조하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진짜’ 페미니즘을 구별하려 들고 거칠고 공격적인 담론에 지레 선을 긋는 태도에는 사실 여성의 문제에 관해서라면 유독 다른 잣대가 작동하고 있다는 방증이 숨어 있기도 하다. 어떤 이념적 흐름에는 무수한 입장들, 논의들, 담론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당연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우리가 투쟁해야 할 것은 노선이지 그것에 반기를 드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문학 비평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작품을 읽고 작가와 호흡하며 때로는 환호하고 때로는 싸워야 한다. 자신의 비평적 견해를 뒷받침할 작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틀렸거나 적어도 너무 이르다는 뜻이다. 반대로 작품의 성취에 가려 비평이 빛을 발하지 못할 때도 물론 있다. 그래서 비평가는 자주 옹색하고 궁색해진다. 어떤 작가에게, 어떤 작품에게 자신을 투영하지 않고 비평은 가능하지 않음을 인정할 때 남는 것은 그저 작품을 읽는 일밖에 없다. 비평은 대체로 늘 불안하지만 작품에 기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작품을 읽을 수 있게 하는 비평은 무엇일까. 리뷰나 해설, 작품론이나 작가론? 월평이나 계간평?
문학 비평의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종이 잡지의 한계나 비평적 답습을 벗어나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플랫폼과 상상력이 모종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체가 비평의 질적 전환을 담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2 Responses

  1. ㅈㅅㅇ

    업데이트를 궁금해하던 독자 중 하나입니다.
    어떤 공간에서든 계속 뵐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고민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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